[공연리뷰]‘낡은’ 침대를 타고 떠나는 ‘낯선’ 모험, 뮤지컬 <레드북>
[공연리뷰]‘낡은’ 침대를 타고 떠나는 ‘낯선’ 모험, 뮤지컬 <레드북>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3.05.10 1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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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레드북’ 공연사진, 안나 役 민경아
▲뮤지컬 ’레드북’ 공연사진, 안나 役 민경아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신사의 나라 영국, 그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던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살아가는 안나는 “난 슬퍼질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결혼을 해야만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고, 서른도 안 된 여자가 늙었다고 일면식도 없는 타인에게 지적받으며 성추행을 당해도 경찰서에 끌려가는 건 오히려 여성이었던 시대이다. 

모르는 게 마음 편한 ‘나머지’ 사람들 가운데 ‘난 뭐지?’라는 의문을 품는 한 사람, 안나는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더해 종이에 남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고들이 모여 ‘레드북’이라는 책으로 출간된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 옆에서 그저 자신을 숨기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대에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신체, 감정, 경험 등을 세상에 드러낸 안내의 용기는 정신 나간 행동으로 치부되고, 결국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 

독창적인 천재라며 안나를 칭송했던 목소리가 하루아침에 비난의 야유로 바뀔 때에도, 안나는 슬픔에 빠지기보다 상상을 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꿈꾼다. 2막의 시작을 여는 <낡은 침대를 타고>는 안나와 브라운의 머릿속을 그대로 재현한듯하다. 무대가 한 권의 거대한 ‘레드북’ 모양을 하고 있어 더욱 그렇게 보인다. 거대한 흰 천과 조명, 그리고 몽환적인 멜로디의 넘버는 백지처럼 하얗던 침대 위를 정글, 태평양, 지중해로 바꿔놓는다. 

<낡은 침대를 타고>는 이 작품과 함께한 많은 배우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으로 꼽힌다. 그저 음악이나 연출이 아름다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낡은’ 침대로 비유되는 고루한 현실을 당장 180도 바꿀 순 없지만, ‘낯선’ 여정에 서로가 있다면 괜찮다는 확신과 안도를 동시에 갖게 한다. 이는 곧 뮤지컬 <레드북>이 갖고 있는 힘이기도 하다. 

2막의 후반부, 안나가 부르는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은 1막에서 ‘난 뭐지’라는 질문에 대해 찾아낸 답과 같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 없이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안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고 그리하여 ‘나’를 지키는 사람이다. 민경아는 관객들을 브라운으로 만드는 신비한 능력을 공연 내내 보여줬다. 천방지축 이해하기 어려워 보이던 안나를 어느새 사랑하고 응원하게 됐으니 말이다. 

안나가 ‘말하는 사람’이라면 그녀 앞에 나타난 신사 브라운은 ‘듣는 사람’이다. 브라운 역시 그 시절, 영국 신사답게 보수적이었다. 브라운은 성()을 솔직히 다뤘다는 이유만으로 법정에 선 안나에게 법정에서 잠시만 제 정신이 아니었다며 그녀의 글이 잘못됐다 인정하라고 설득하기도 한다. 하지만 안나는 잘못되지 않은 걸 잘못됐다고 말하는 걸 거부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킨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브라운도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송원근은 안나를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브라운을, 안나 곁에 절대 없어선 안 될 평생의 반려자로 확신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신이 좋아요”라고 말하는 브라운 그 자체의 감정을 섬세하게 전달했다. 

공연이 무대에 오르는 2023년, 여전히 여성에 대한 차별과 범죄는 매일 뉴스 타이틀을 장식한다. 그래서 가장 보수적인 시대에 야한 상상을 하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뮤지컬 레드북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이야기다. “안나, 이야기를 들려주렴.” 안나의 이야기로 바이올렛이 다시 사랑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게 됐듯, 객석의 관객들도 무대라는 거대한 크기의 레드북과 그 안의 이야기를 쓴 안나를 통해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공연장 밖으로 나설 수 있을 것이다. 28일까지 대학로 홍익대아트센터 대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