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 공연예술평론계의 태동기 3
[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 공연예술평론계의 태동기 3
  •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 승인 2023.05.1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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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세상은 참으로 많이도 변하고 있다. 계절의 변화를 따라 마음이 변하는 건 그러려니 하겠는데 사람들의 사는 모습과 그 삶의 모습이 상상을 뛰어넘을 때는 내가 제대로 살고있나 하고 겁이날때가 있다. 오늘 나는 놀랍게도 인사동에서 지인과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독일 복흠대학 한국학과 교수로 있으며 한국학과를 베를린대학 한국학과 못지않게 키운 Werner Sasse(잣쎄, 이하 잣쎄)교수가 미술전시회를 열고 있으니 들러보라고 권한 지인의 말이 생각 나 전시장을 찾았다. 인사아트플라자 5층 전시장에서 만난, 화가로 변신한 잣쎄교수는 여전히 큰 키에 많이 늙어 보이지 않은 모습이었다. 전시장 한 층을 검은 돌덩이 같은 두세 개의 검은 뭉치의 그림을 임의로 배치해 놓은 듯한 단순한 화폭으로 큰 공간을 채운 채, 자기 키의 반밖에 안 되는 한 한국 여인과 서있었다.

잣쎄 교수를 내가 처음 만난 것은 내가 귀국한 60년대 말과 70년대 초 그가 한국 외국어대학 독어독문학과의 독일어 강사로 있으면서 장위동에 집을 얻어 살며 쌍둥이 남매를 포함, 네 아이를 키우며 씩씩하고 재미있게 사는 모습을 보며, 하나도 힘들어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 이후 70년대 말 독일정부 초청으로 내가 다시 독일을 들렀을 때, 그는 나를 복흠대학 한국어과에 초청하여 한국연극에 관한 특강을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가 한국어과 교수실에 자기들 애들이 키우는 세퍼트종 2마리와 막내아들까지 데려와 교수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60년대 말 한국에서의 삶의 행보가 놀라웠던 당시를 회상하며 나는 이번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자유분방하면서도 주변환경을 자기에게 맞추어가며 사는 그의 자유롭고 여유로운 모습이 오히려 당당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는 어김없이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다. 전시장에 서있는 그의 옆의 작은 키의 그 여인은 바로 90년대 초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놀라게 하며 등장한 홍신자 실험무용가였다. 그녀는 90년대 한국 무용계와 예술계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고정관념의 테두리를 여보란 듯이 흔들어 놓은 독보적인 예술가였다. 잣쎄 교수는 홍신자무용가를 내게 소개하며 자신들이 결혼한 지 12년째라며 자기는 16명의 손자가 있다고 자랑하는 게 아닌가. 또한 현재는 제주도 서귀포에 살고 있다 하였다. 이 좋은 공간에 전시 초대를 받아 이런 호강을 한다고 자랑하는 것이다.

 

Werner Sasse 교수의 전시를 보며 우리 사회문화를 돌아보다

 

나는 잣쎄(Sasse) 교수와 홍신자 무용가 부부를 보며 참으로 인생을 얽매이지 않은 채, 그것도 독일도 아닌 한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한국의 문화와 삶의 모습이 많이도 헐거워지고 관대해졌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문화란 역시 인간이 스스로 바꾸어 가며 가꾸는 것인데 한국인들의 인간을 보고 사물을 보는 테두리를 너무나 자기중심이 아닌 사회와 풍습의 테두리라는 잣대로 금을 그어놓은 채 우리는 그 안에서만 살아가려는 소극적인 태도로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면서 나는 24세 연상인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여인과 결혼하여 잘 살고 있는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을 떠올려 보았다. 마침 친지의 따님이 파리에 가서 미술전시회를 열고 있는데 마크롱 대통령 부인이 친구와 관람 온 모습을 찍어 보낸 사진을 떠올렸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사람을 사회와 시대, 풍습과 남의 눈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안주하며 살아온 온실 안의 화초였던가 싶기도 하다. 그만큼 자신이 없었던 것이기도 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60년 대 말에서 70년대 말, 심지어 80년대 초 중반까지도 인사동의 문화의 변화상을 회상해 보면 예술가들의 <나, 자신>을 찾는 모습은 당시도 많이 쭈볏쭈볏하며 <자아를 표현하는데> 조심하며, 자신 있게 내세우기보다 옛 세월의 껍질에 기대어 알을 깨고 나올 자신감이 부족했던 시대가 아니었나 되돌아본다. 그렇다고 확신에 찬 새로운 용기는 더더욱 내지 못했던 7,80년대의 인사동의 풍경을 한국예술계가 어렵게 ‘껍질깨기’를 하던 시대로 회상해 본다.

90년대와 2000년대 초, 예술가들의 연배가 점점 젊어지면서 옛날에 한 발을 걸치고, 한 발은 새로운 시대로 진입했음을 외치는 인사동의 전시회나 예술품의 당당하고 당돌한 모습을 보면서 안도의 숨을 내쉴 때가 많았다.

‘역시 우리 예술계에도 당당하게 스스로를 세상에 내세우는 청순한 젊은 세대가 이끌어 갈때가 왔구나’ 하면서 큰 위안을 받으며 우리미래에 큰 기대를 하며 살고있는 나의 오늘을 행복해하고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애벌레에서 성충의 시대로, 성충의 시대에서 나비와 나방의 시대를 거쳐 세상을 큰 날게 펴고 당당하고 자유롭게 나르며 세상을 당당하고 넓게 돌아볼 수있다니. 이제 한민족의 홍익인간 사상의 넓고 깊은 뿌리에 발을 딛고, 넓은 세상 속에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한국인의 한국인다움을 펼쳐 나가기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