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1년 365일, 매일 오후 5시 18분이면 광주 5ㆍ18 민주광장 시계탑에서는 어김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온다. 매일 그리고 매년 5월 18일 즈음이 되면 곳곳에 울려 퍼지며 우리의 피를 뜨겁게 하는 2분이 채 안 되는 이 곡이, 광주 빛고을시민문화관에서는 조금 특별하게 불렸다. 5ㆍ18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뮤지컬 <광주>에서 시민군을 연기한 수십 명의 배우들은, 합창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작품의 네 번째 시즌 시작을 알렸다. 개막을 앞둔 16일 오후, 고선웅 연출을 비롯한 <광주>의 창작진과 출연진을 만나봤다.
광주시와 광주문화재단이 공연 제작사인 라이브(주), 극공작소 마방진과 공동제작한 뮤지컬 <광주>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5ㆍ18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창작 뮤지컬이다.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연극 <푸르른 날에>와 <나는 광주에 없었다>를 연출한 고선웅이 극작과 연출을 맡았으며, 네덜란드 가우데아무스 국제 작곡 콩쿠르와 영국 맨체스터 세계 현대 음악제에서 입선하고 오페라 <1945>, 음악극 <적로> 등의 작곡가 최우정 서울대 음대 교수가 참여했다. 한국 민주주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광주’는 2019년, ‘님을 위한 행진곡 대중화‧세계화 사업’의 일환으로 뮤지컬 <광주>를 기획, 서울과 광주를 비롯하여 전국 6개 도시에서 총 세 번의 시즌을 공연했다.
초연 <광주>로 데뷔해 한 시즌도 빠짐없이 이 작품에 참여하고 있는 문수경 역의 최지혜는 “같은 배역으로 네 시즌을 맡으면 익숙해지지 않을까, 감동이 덜 오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불필요한 생각이었다. 하면 할수록 설레고 떨리고 새로운 것이 많이 느껴진다”라며 “연출님께서 ‘그냥 존재하라’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무대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열심히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사랑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광주'는 1980년 광주에 편의대원이 존재했다고 증언한 김용장 전 미군 501정보여단 방첩부대 군사정보관과 허장환 전 보안부대 수사관의 진술을 가미해 픽션을 더했다. 극 중 505부대 편의대원 '박한수'가 등장해 무고한 시민들이 겪는 참상을 목도한 후 이념 변화를 겪기도 한다.
초연 당시 시민군을 교란하기 위해 군에서 투입된 편의대 소속 박한수가 극을 이끄는 캐릭터로 설정돼, 관객들의 감정 이입이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다. 더불어 광주와 아무 연고도 없는 그가 단기간에 시민들 편에 서게 되는 모습 역시 설득력이 약하다는 평이 많았다. 이에 2021년 재연과 2022년 삼연을 거치며 박한수는 어린 시절 광주에 살았으며, 야학교사 문수경과 소꿉친구라는 전사를 갖게 됐다. 또한 전남도청에서 시민들과 함께 투쟁하다 죽는다는 설정에서, 광주에서 벌어진 일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현장에서 벗어나 살아남는 것으로 결말을 바꾸며 편의대원 박한수에게 부여됐던 지나친 영웅서사를 과감히 덜어내기도 했다. 아울러 윤상원 열사를 모티브로 한 인물 윤이건을 메인 캐릭터로 내세우는 등 광주 시민의 서사에 더욱 힘을 실었다. 이런 서사와 캐릭터의 변화에 맞물려 음악도 대거 수정했다.
‘광주’는 뮤지컬이라는 문화 콘텐츠를 즐김과 동시에 관객들에게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잘못 알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는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계기를 주기 위해 노래한다. ‘봄’과 ‘사랑’을 노래하는 광주 시민과 ‘화려한 휴가’를 준비하는 편의대를 대비, 광주시민들이 무기를 들 수밖에 없었던 과정에 설득력을 높인다.
고선웅 연출은 “작품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인물로 박한수가 있지만, 그 중심에는 윤이건과 광주 시민들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은 다 허구이다. 그 허구를 통해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진실’이다. 뮤지컬 <광주>의 서사가 나름의 설득력을 갖고 관객들과 만날 수 있다면, 광주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데 전혀 나쁜 접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설명했다.
‘광주’는 2020년 초연 이래 서울·광주·부산·전주·세종에서 공연하며 한국뮤지컬어워즈 창작 부문 프로듀서상 등을 수상했다. 2021년 서울 LG아트센터 재연, 지난해 예술의전당 삼연했고, 2021년부터 일본 TV 방송 ‘위성극장’을 통해 일본 전역에 방송됐다. 하지만 올해는 광주에서만 공연된다. 애초 광주문화재단의 뮤지컬 <광주> 지원은 3개년 프로젝트로, 지난해 공연이 마지막이었으나, 올해는 5ㆍ18주간에 맞춰 광주에서만 선보이게 된 것이다. 이번 공연이 끝난 후, 뮤지컬 <광주>를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황이다. 광주시와 광주문화재단의 지원이 중단된다면 민간 제작사인 라이브(주)와 극공작소 마방진이 자체적으로 올리기엔 부담이 큰 탓이다.
유희성 예술감독은 “뮤지컬 <광주>처럼 민·관이 오랜 시간 협업한 사례는 흔치 않다”라며 “앞으로도 광주시와 광주문화재단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주신다면, 세계적 문화 콘텐트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전했다.
5ㆍ18민주화운동에 대해 우리 모두 알고는 있지만, 진실을 규명하지 못하고 흐른 시간 속에서 많은 이들의 희생은 아직도 폄훼되고 있다. 이는 뮤지컬 <광주>가 앞으로도 꾸준히 관객들과 만나야 할 이유가 된다. 때로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 수백 편의 논문보다 강한 힘을 보여준다. 5ㆍ18 민주광장에 울려 퍼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5ㆍ18 역사에 대한 왜곡을 종식시키진 못 하지만, 세상이 매일 5ㆍ18을 기억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뮤지컬 <광주>의 노래가 닿아야 할 곳이 아직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