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라벨라 오페라단의 <로베르토 데브뢰>, 한국 초연 대성공
[이채훈의 클래식비평]라벨라 오페라단의 <로베르토 데브뢰>, 한국 초연 대성공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3.05.3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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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니제티 오페라 이해의 지평 넓인 ‘여왕 3부작’ 완결판
소프라노 박연주, 테너 이재식의 완벽한 노래 청중 압도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5월 26일(금),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은 <로베르토 데브뢰>를 통해 오페라극장의 진면목을 되찾았다. 오페라의 울림통이라 할 수 있는 극장의 공간이 이렇게 충만하게 넘쳐 흐를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놀라운 무대였다. 

엘리자베타 역의 소프라노 박연주는 압도적인 성량과 드라마틱한 표현으로 청중들을 감동시켰다. “조용히 하시오, 나는 통치하지도 않고 살지도 않아요.”(Tacete, non regno, non vivo) 3막 3장, 사랑하는 로베르토의 죽음을 알게 된 엘리자베타의 마지막 아리아에 청중들은 전율하며 숨을 죽였다. 3막으로 이뤄진 드라마는 원작 소설이 ‘잉글랜드의 엘리자베트 여왕’인 만큼 여왕의 감정선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1막은 로베르트의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 2막은 그의 배신에 분노하고 질투하는 마음, 3막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회한으로 몸부림치는 마음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소프라노 박연주는 이러한 엘리자베타의 감정 변화를 자기 것으로 체화하여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 오직 사라의 명예를 지켜주고 싶을 뿐.”(io non temo la morte, lo viver solo tanto desio che la virtu Sara…) 테너 이재식은 3막 2장 죽음을 앞둔 로베르토의 아리아에서 탄탄한 미성, 정확한 음정, 섬세한 표정으로 완벽의 경지를 들려주었다. 도니제티의 ‘여왕 3부작’은 안나 볼레나, 마리아 스투아르다에 이어 로베르토 데브뢰까지, 영국 왕실의 권력 관계에서 희생되어 참수형을 당한 비극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로베르토는 여왕의 노여움을 사서 죽음에 이르게 되지만 끝까지 사랑하는 사라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의연함을 지킨다. 테너 이재식은 이러한 로베르토의 진실된 마음, 그 고뇌와 결기를 한치의 부족함 없이 훌륭하게 표현했다. 

이 날 공연은 훌륭한 아리아뿐 아니라 다양한 이중창과 앙상블로 가득한 벨칸토의 대향연이었다. 노팅엄 공작 역의 바리톤 정승기와 사라 역의 메조소프라노 최찬양도 두 주인공과 대등한 비중의 노래와 연기로 훌륭히 제 몫을 해냈다. 실바노 코르시가 이끄는 베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시종일관 안정된 호흡으로 무대 위의 성악가들과 조화를 이루었다. 성악 앙상블과 호른 솔로가 어루러지는 대목은 특히 아름다웠다.

이강호 단장이 이끄는 라벨라 오페라단은 2016년 <안나 볼레나>, 2019년 <마리아 스투아르다>에 이어 올해 <로베르토 데브뢰>의 한국 초연을 성공시켜 도니제티의 ‘여왕 3부작’을 모두 선보이는 위업을 달성했다. 도니제티는 로시니, 벨리니와 더불어 벨칸토의 3대 거장으로 알려져 왔지만 우리가 아는 그의 작품은 <사랑의 묘약>,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그리고 단막 희극 <리타> 정도였다. 라벨라 오페라단의 노력에 힘입어 우리는 이제 도니제티 오페라의 전모를 조망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우리 오페라 공연의 역사와 지평을 확대한 라벨라 오페라단 관계자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무대, 의상, 분장은 정통 사극답게 충실한 고증에 힘을 쏟은 것으로 보인다. 회전무대를 활용하여 드라마의 전개를 매끄럽게 했고, 3막 런던탑에서 웨스트민스터로 전환할 때 무대가 상하로 움직이는 진풍경을 연출한 게 인상적이었다. 연출을 맡은 김숙영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실존 인물들을 명확하고 심도있게 분석했다”며, “오페라 극장 무대의 인프라를 최대한 사용하여 시각적, 공간적 범위를 넓히고, 대본에 없는 연극적 요소도 활용하여 탄탄한 스토리 라인을 형성했다”고 밝혔는데, 이러한 의도는 성공적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숙영은 A와 B, 두 가지 버전의 연출을 시도했다는데, 둘 다 보고 비교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오페라는 영국 왕실의 비화를 소재로 했기 때문에 연출자의 지적대로 “당대 인기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페라에 비해 극적 장치나 드라마틱한 감동이 다소 느슨하다”고 볼 소지가 있는 게 사실이다. 원작에서 여왕이 로베르토에게 준 반지를 여왕에게 보여주면 사형을 면할 수 있을 거라고 설정한 것은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로베르토가 팽개친 그 반지를 사라가 보관해 두었는데, 그 반지를 사라가 여왕에게 들고 가서 로베르토의 충직함을 증명한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해 보인다. 반지를 들고 가려는 사라를 노팅엄 공작이 가둬버리고, 뒤늦게 반지를 들고 온 사라를 여왕이 나무라는 것도 이 시대의 시선에서 보면 자연스럽지 않다. 

이러한 원작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고 있던 벨칸토의 아름다움, 자극적인 요소보다 음악과 드라마를 통해 벨칸토 오페라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려내기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다”는 이강호 단장의 의지는 소중한 열매를 맺었다고 보아도 좋으리라.

<로베르토 데브뢰>는 고난도의 기교, 폭넓은 음역과 다이내믹 때문에 쉽게 공연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고 한다. 이 어려운 작품을 성공적으로 초연한 노력과 열정은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초연을 계기로 <로베르토 데브뢰>는 우리나라 오페라 정규 레퍼토리 반열에 올랐고, 꾸준히 오페라 팬들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굳이 욕심을 부리자면, 영국 왕실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관객이 많다는 점을 감안, 서곡이 흐를 때 헨리 8세에서 엘리자베트 1세에 이르는 영국 역사, 그리고 로베르토 데브뢰와 엘리자베트 1세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상징적 이미지와 자막으로 소개하면 이해를 돕고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