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교방가요』 정재의 창조적 변용
[성기숙의 문화읽기]『교방가요』 정재의 창조적 변용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3.05.31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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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무용단 정기공연 “교방정재”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국립국악원은 조선시대 장악원에서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의 맥을 잇는 대표적 국가기관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국립국악원무용단 역시 정재(呈才)의 본산으로 인식된다. 2023년 정기공연에 오른 “교방정재”(2023.4.27~28, 국립국악원 예악당)는 국악원무용단의 예술적 정체성을 가늠케 하는 귀한 무대였다. 조선후기 진주교방에서 전습된 악가무를 기록한 정현석의 『교방가요(敎坊歌謠)』(1872)에 수록된 정재를 다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첫 무대는 헌반도(獻蟠桃)가 장식했다. 궁중연향에 연행된 당악정재 형식의 헌선도(獻仙桃)의 창조적 변형의 산물이다. 풍악이 울리면 무용수가 쌍쌍히 마주하여 춤추고 물러가기를 반복한다. 동선(童仙)은 복숭아를 든 소반을 들고 나왔다가 곧 물러선다. 선녀(仙女)와의 밀착된 교감으로 친밀도를 높인다. “서왕모가 선녀를 보내시니 머리엔 연화관을 쓰고 비단치마 끈다”는 노랫말에서 중국 고대 신화 속 여신의 세계를 형상화했음을 알 수 있다. 

황창무는 신라시대 연원된 춤으로 『동경잡기』에 기록된 고사(故事)에서 유래된 춤이다. 신라의 7세 소년 황창이 적국인 백제가 들어가 칼춤을 추다가 백제왕을 찔러 죽이고 그 역시 잡혀 죽었다는 영웅적 서사를 담고 있다. 신라 사람들이 황창의 얼굴을 본뜬 가면을 만들어 쓰고 춤을 춘데서 황창무가 유래한다. 『교방가요』에는 황창무 외에도 4명이 등장하는 검무가 글과 그림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엔 융복을 착용한 소기(少妓) 2명과 황삼을 입은 동기(童妓) 2명이 등장한다. 

미루어 짐작컨대, 19세기 진주교방에서는 황창무와 검무가 각기 다른 춤 형식으로 존재하지 않았을까? 시대적 변천에 따른 ‘황창무 → 검무’로의 이행이 아닌, 황창무와 검무가 각기 다른 독자적 춤양식으로 존속했을 가능성이 짙다. 이번에 선보인 황창무는 역동적이고 절도있는 움직임이 주조를 이룬다. 황창의 용맹과 무적(武的) 기질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전체적 인상은 현대적 창작에 가깝다.

처용가무 역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우선 가면과 의상에서 두드러진다. 이번 공연에서는 신라 헌강왕 때 울산에서 발원되었다는 지역성에 착안하여 울산의 처용탈 명인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나무탈을 착용하고 춤추었다. 지역의 고유성을 높이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한편, 『교방가요』의 처용무 도상을 참조하여 새롭게 제작한 의상은 간결한 디자인으로 정제된 미감이 돋보였다. 방위개념에 따른 춤사위 연출과 깊은 무릎 굴신 등 춤사위는 대체로 정통 처용무와 같은 맥락으로 읽혀진다. 

고려시대 무고(舞鼓)는 고무(鼓舞)라는 명칭으로 공연되었다. 고무는 무애, 동동과 더불어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향악정재로 손꼽힌다. 『교방가요』의 고무는 중앙에 북이 놓여지고 그 주변으로 4명의 여기가 춤추는 모습을 연출한다. 무원들이 북 주위를 돌며 춤추다가 몸을 뒤집어 북을 치면서 ‘지화자’를 제창하는 장면이 이색적이다. 시종 정중동적 분위기를 유지하다가 종결부에 이르러 북채를 집어던지듯 역동성을 가미한 번뜩이는 몸짓이 인상 깊다.   

학무(鶴舞) 또한 이채롭다. 『교방가요』의 그림에는 연꽃 두 송이가 있고 백학 2쌍, 동기 2명이 등장한다. 한복 차림의 앳된 소녀를 등에 태운 백학 두 마리가 무대 위를 노닌다. 대풍류 가락에 맞춘 학춤의 자유로운 몸짓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흔히 정재는 유가의 예악사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항장무는 다소 낯설다. 춤의 유래와 내용에서 정재로 묶일 수 있는 접점이 극히 적다. 항장무는 홍문연의(鴻門演義) 서사를 배경으로 한다. 중국 진나라 때 항우와 유방의 대결을 담고 있다. 다분히 무적이고 전투적이다. 따라서 춤만으로 항장무를 표현하기엔 다소 버거울 수 있다. 때문에 보통은 연극적 요소를 삽입한다. 이번 공연에서는 연극 대신 판소리를 차용하여 항장무의 복잡한 서사를 풀어냈다. 소리꾼의 기량 또한 수준급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마지막으로 무대에 오른 선악(船樂)은 곧 선유락(船遊樂)을 일컫는다. 선유락은 조선후기 가장 인기있는 정재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선유락의 원래 명칭은 배따라기였다. ‘배가 떠난다’는 뜻을 담고 있는 배따라기라는 슬픈 곡조에 맞춰 춤춘다. 멀리 사행을 떠나는 젊은 무관과 기녀 사이의 이별을 그리고 있다. 강가를 배경으로 사행길에 오르기 전 강나루에서 연인과의 이별을 묘사한 춤으로 비극적 정조가 흐른다.

여타의 정재와 달리 선악은 지방교방에서 추어지다가 궁중연향의 주요 레퍼토리로 안착되었다. 16세기 평안도에서 발원된 선유락이 영·정조 시대 궁중으로 유입되었다가 진주교방으로 전파되었음은 실로 흥미롭다. 그 중심엔 선상기(選上妓)가 있었다. 

선상기란 궁중연향을 위해 지방 교방청에서 뽑아 올린 기녀를 말한다. 선상기를 통해 궁중정재 고유의 미감이 지방교방으로 전이되어 속화(俗化) 내지 약식화되었다. 소위 창조적 변용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교방가요』는 조선후기 이른바 선상기(選上妓) 제도와 더불어 궁중정재의 변용과 속화의 흐름을 살피게 한다는 점에서 긴요한 문헌으로 평가된다. 국립국악원무용단의 공연 “교방정재”는 바로 조선후기 선상기를 통한 정재 변용의 산물을 보여주고자 한 흔적이 역력하다.  

조선후기 진주목사 정현석이 집필한 『교방가요』는 가곡과 가사, 악기와 무곡, 악장과 판소리와 잡희, 잡요, 단가 등을 비롯 각종 정재와 민속춤이 수록되어 있다. 19세기 지방 교방청에서 전습된 가무악을 통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희소적 가치가 높다. 나아가 중앙과 지방 간 정재의 교류양성과 교섭 등 당대 춤문화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살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국립국악원무용단의 “교방정재” 공연은 유의미한 시도라고 여겨진다.   

주지하듯, 『교방가요』는 여러 판본이 전한다. 국립중앙도서관본, 고려대도서관본, 통문관본, 연낙재본 등 4종이 있다. 채색화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같은 맥락에 있다.  『교방가요』에 수록된 정재와 민속춤의 복원 혹은 오늘의 시각에서 재창작하는 작업은 향후에도 꾸준히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