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신무용가 조택원의 ‘신노심불로’ 회고
[성기숙의 문화읽기]신무용가 조택원의 ‘신노심불로’ 회고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4.03.27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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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무용 부활 세태에 즈음하여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신무용가 조택원(趙澤元, 1907~1976)이 안무한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손꼽힌다. 우리 무용사에 있어 해외에서 초연된 작품은 그리 흔하지 않다. 1949년 미국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에서 ‘신노심불로’가 초연됐다. 조택원이 1947년 국내 무용계를 떠나 미국으로 향한지 두 해 만에 새 작품을 안무하여 미국무대에 첫 선을 보인 것이다. 무용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신노심불로’라는 작품의 탄생에는 중고제 국악명인 심상건(沈相健, 1889~1965)의 조력이 컸다. 심상건은 충남 서산 출신 중고제 전통무악의 거장 숙부 심정순 문하에서 기악, 산조, 가야금병창 등을 익혔다. 일제강점기 조선음률협회, 조선성악연구회 등 주류 음악계를 형성했던 여러 협회의 구성원으로 활동하였고, 음반취입을 위해 일본을 자주 드나들었다. 또 경성방송국 고정출연자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특히, 1947년 조택원무용단 일원으로 미국에 진출하여 악사로 참여한 이력도 이채롭다. 중고제 국악반주로 미전역을 순회공연하며 한국의 문화적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   

작품 ‘신노심불로’의 창작 배경 또한 의미롭다. 이 작품은 심상건의 장고장단과 우리의 토속 민요가락에 영감을 얻어 창작되었다. 한 노인이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에 맞춰 춤추다가 힘에 겨워하며 육신이 노쇠했음을 슬퍼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생무상을 그린 작품으로 노장적 색채가 짙다. ‘신노심불로’ 창작 배경에 대해 조택원은 자서전 『가사호접』에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   

“미국에 가자마자 나는 심상건을 스승으로 모셔 전문적으로 장구공부를 했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치고 있노라면 그 장구의 리듬은 그대로 내 몸속에서 하나의 율동이 되어 팔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다리로 파급되어 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이 리듬은 몇 소절씩의 멜로디를 형성했고, 이 멜로디가 어떤 때에는 느린 진양조로, 또 어떤 때에는 빠른 단머리로 하나의 악장을 이루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신노심불로’의 바탕이 된다. 

“한 여름에 노인이 나무 밑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있다(누운 데서 시작되는 춤은 발레에는 없다). 그러자 멀리서 은은하게 피리소리가 들려온다. 그 늘어진 가락의 피리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노인은 차차 흥이 나기 시작한다(이처럼 흥겨워져야 춤이 나오는 것이 한국춤의 본질이다). 노인은 어깨를 으쓱으쓱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느린 진양조는 차차 빨라져 격렬한 템포로 옮겨간다. 춤에 지친 노인은 끝내 쓰러지고 만다. 이윽고 다시 일어나 앉아 담뱃대를 문 노인은 생각한다. 한숨이 나온다. 내 몸도 이제는 다 늙었구나! 마음은 이토록 날듯이 젊었는데…”(조택원, 『가사호접』, 서문당, 1973)

민속 장고리듬을 율동화한 ‘신노심불로’는 흥과 멋의 한국적 풍류를 소재로 미국 관객에게 크게 어필했다. 심지어 타이티 태생의 흑인무용가 장 레옹 디스티네에 의해 소위 ‘아프리카판’까지 등장하기에 이른다. 디스티네는 원작에서 춤꾼이 눕는 장면을 생략하고 장구와 가야금 대신 북을 사용했다고 알려진다. 마도로스 파이프를 물고 북을 치면서 춤을 추는 등 부분적으로 개작을 했지만, 원작에서와 같이 노쇠해가고 있음을 철학적 관조의 미학으로 접근한 것은 동일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신노심불로’는 미국 현대무용의 대모 루스 세인트 데니스의 후원으로 1949년 뉴욕 자연사박물관에서 초연되었다. 루스 세인트 데니스는 조택원의 미국활동을 전폭적으로 후원한 대표적 무용가로 알려진다. 동양의 정신세계에 탐닉했던 그는 ‘육체와 영혼의 융합’을 주창하며 미국 현대무용의 예술적 진화를 견인한 인물로 세계적 무용가 반열에 있었다.

2007년 12월 9일, 조택원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공연의 일환으로 작품 ‘신노심불로’가 복원 재현되어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서 선보였다. 연낙재에서 발굴 수집한 1956년 조택원의 일본 공연실황이 담긴 ‘신노심불로’의 영상자료가 있어 가능했다. 당시 필자가 작품의 학술 고증 및 복원작업을 주도했다. 춤은 한국무용가 조흥동에게 의뢰하였고,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원일이 음악감독으로 ‘신노심불로’의 음악복원 작업에 참여했다. 연낙재 소장 조택원 공연자료 및 영상발굴 자료 등이 유의미하게 사용된 결과의 소산이라 하겠다.

지난 2018년 조택원무용단 일원으로 1940년대 후반 미국공연에 참여한 심상건 일가에 대한 현지조사를 실시했다. 미국 5개 도시를 10일간 답사했던 기억이 새롭다. 한마디로 숨가쁜 일정이었다. 심상건의 셋째 딸로 중고제 전통가무악을 습득하고 조택원무용단 일원으로 도미하여 가야금연주와 창 그리고 춤을 추었던 심태진 선생을 만나 귀중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LA의 월셔이벨극장을 거쳐 하와이 한인동포들의 후원으로 열린 크고 작은 조선악무공연 그리고 뉴욕, 워싱톤, 시카고 등 조택원과 미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펼쳤던 예술 활동의 여정이 활자화되어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을 큰 소득으로 여긴다. 더욱이 국내엔 알려지지 않은 뉴욕에서의 흥미진진한 일화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성기숙, 『태평양 건너 그들이 있었네_중고제 국악명인 심성건 가(家) 사람들의 삶과 예술』, 연낙재, 2021).

안타깝게도, 심태진 선생은 2년 전 101세를 일기로 플로리다 펜서 콜라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조택원을 기억하는 또 한 사람으로는 아내이자 무용가인 김문숙 선생이 있다. 선생 또한 지난해 94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1976년 조택원 선생과 사별한 후 반 백년을 살아온 동부이촌동을 떠나 마포 아파트에서 생을 마쳤다. 살아생전 말년에 이른 김문숙 선생을 수 차례 찾아뵈었다. 이른 오후부터 시작된 대화는 아파트 베란다 사이로 스며든 석양이 희미해질 무렵까지 이어지곤 했다. 

선생과의 대화는 주로 조택원 선생과의 인연을 비롯 예술정신과 업적 그리고 무용계 후속 세대에 대한 우려와 걱정으로 채워졌다. 조택원 선생의 춤 철학과 예술정신을 과연 누가 제대로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컸다. 오늘날 원로세대에 이른 몇몇 무용가의 탐욕과 그릇된 행보 및 방기된 책무에 대해서도 따끔한 일침을 서슴치 않았다. 기록자로서의 의무를 새삼 일깨우는 죽비 같은 말씀으로 들렸다.

최근 신무용이 주목되는 세태의 흐름을 목도한다. 1970년대 중반 한국창작춤의 출현과 함께 급격히 퇴조했던 신무용이 다시금 부활될 조짐이 움트고 있는 셈이다. 덩달아 조택원 선생의 신무용 작품도 무대에 자주 소환될 것으로 예측된다. 근현대 격동의 시기, 척박한 토양에서 치열한 창작정신으로 일궈온 조택원 신무용의 예술미학적 고유성이 온전히 보존되고 있는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