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 춤의 뮤즈 – 바로크 무용 음악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 춤의 뮤즈 – 바로크 무용 음악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4.05.2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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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무용 음악은 바로크 기악의 풍요로운 원천이 됐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사교댄스가 널리 유행했고,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춤을 잘 추어야 했다. 춤은 남녀가 어울리며 서로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에 엄격한 규율사회에서 필수였다. 춤의 대가인 투아노 아르보(Thoinot Arbeau)는 <무용기보법>(1589)에서 “(춤 출 기회가 없다면) 어떻게 여성이 누구와 결혼할지 결정할 수 있겠는가?” 묻고 있다. 이러한 춤에는 언제나 음악이 함께 했다. 종교 갈등이 심했던 독일에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음악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한 미하엘 프레토리우스(Michael Praetorius, 1571~1621)는 ‘춤의 뮤즈’에게 바친 무용 음악 <테르프시코레>(Terpshichore)를 썼는데, 바로크 초기 무용 음악의 결정판으로, 지금 들어도 무척 흥겹다. 뒷받침해 주던 무용 음악은 점차 연주용 모음곡과 변주곡으로 독립하여 바로크 음악을 꽃피웠다. 

미하엘 프레토리우스 <춤의 뮤즈, 태르프시코레>(연주 : 보이스 오브 뮤직) 

바흐와 헨델의 모음곡(Suite)도 무용 음악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바로크 시대 모음곡은 대조적인 2~3개의 춤곡을 함께 묶어 연주하면서 생겨났다. 두 박자의 느린 춤곡과 세 박자의 빠른 춤곡을 주로 연주했고, 독일 춤곡인 알르망드(allemande)와 프랑스 춤곡인 쿠랑트(courante)가 특히 인기 있었다. 모음곡은 사라방드(Sarabande)와 지그(Gigue) 등을 포함시키며 확대되어 바로크 음악의 대표 양식 중 하나로 바흐와 헨델 시대까지 이어졌다. 모음곡을 여는 프렐류드(Prelude) 역시 춤에서 기원했다. 춤을 시작하기 전에 템포와 분위기를 알려주는 연주가 먼저 이뤄졌고 이게 프렐류드로 발전한 것이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G장조 (첼로 미샤 마이스키. 이 모음곡은 프렐류드-알레망드-쿠랑트-사라방드-메뉴엣-지그 등 다양한 춤곡으로 구성돼 있다.)

변주곡(Variations)도 춤곡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일단 춤이 시작되면 끝날 때가지 음악이 이어져야 했고, 이를 위해 자연스레 즉흥 변주를 구사하여 음악을 늘이곤 했다. 흥겨운 춤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음악을 악보에 기록한 결과 태어난 게 변주곡인 셈이다. 코렐리의 <라 폴리아>, 헨델의 <파사칼리아>, 바흐의 <샤콘느>*는 춤에서 탄생한 바로크 변주곡의 대표작이다. 

헨델 파사칼리아 (하프시코드 : 에버하르트 크라우스)

라 폴리아는 원래 포르투갈의 민속 무곡으로, 비발디 · 살리에리도 이 선율을 주제로 곡을 썼지만 지금은 코렐리의 작품이 가장 널리 사랑받고 있다. 장중하고 애절한 주제에 이어 22개의 변주곡이 펼쳐진다. 

아르칸젤로 코렐리(1653 ~ 1713)는 바로크 바이올린 음악의 기초를 다진 사람으로, 비발디, 바흐의 협주곡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매우 검소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헨델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취미는 돈이 안 드는 그림 감상 뿐”이었다. 그는 귀족들에게 늘 공손했다. 어느 날, 그가 연주하는데 한 귀족이 옆 사람과 잡담을 시작했다. 그러자 코렐리는 바이올린을 놓고 객석으로 가서 앉았다. 이유를 물어보니 “제 연주가 저 분들 대화를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라고 대답했다. 젊은 시절의 베토벤은 청중들의 태도가 불량하면 그냥 피아노를 쾅 닫고 나가버렸다는데, 이에 비하면 코렐리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의 바이올린 연주는 음색이 우아하고, 표정이 풍부하고, 운궁(運弓, 활 쓰는 법)이 다채로웠다고 한다(안동림 <이 한 장의 명반>, 1997, p.36~37). <라 폴리아> 변주곡은 원래 1700년에 출판된 바이올린 소나타 Op.5 중 마지막 곡인 12번이었다. 프란스 브뤼헨의 리코더(앞으로 부는 플루트, 불어로 flûte a bec) 연주가 일품이다. 거장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와 안너 빌스마가 쳄발로, 첼로를 맡아 열심히 반주한다. 바이올린을 공부하는 학생들 중 절반 정도가 이 곡 때문에 아예 바이올린을 포기해 버린다고 하니 무척 큰 도전인 듯 하다. 그런데, 프란스 브뤼헨이 연주한 리코더 편곡판이 어느 바이올린 연주보다 더 애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바이올린 전공자들이 굴욕을 느낄까 걱정되는 대목이다. 

 

코렐리 <라 폴리아> (리코더 : 프란스 브뤼헨)

스페인 춤곡인 사라방드(sarabande) 풍의 아리아를 주제로 사용한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1742)은 고금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변주곡 중 하나로 꼽힌다. 최초의 바흐 전기를 쓴 요한 포르켈에 따르면 이 곡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드레스덴에 머물던 러시아 대사 카이절링 백작은 불면증 때문에 밤마다 골트베르크라는 15살 난 쳄발로 연주자를 불러서 연주를 시켰고, 그다지 효과가 없자 바흐에게 잠을 부르는 음악을 주문했다. 이에 따라 바흐가 작곡한 게 이 변주곡인데, 백작은 크게 만족하여 금잔에 금화를 가득 담아서 바흐에게 주었다. 그의 1년 연봉을 웃도는 금액으로, 평생 받은 사례 중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이 곡에 대한 바흐 자신의 코멘트를 보자. “변주곡은 기본 화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별로 재미없는 작업이지만, 졸게 만들기엔 제일 좋은 방법이지.” 시끌벅적한 춤판에서 태어난 변주곡이 불과 150년 만에 잠을 재촉하는 음악으로 진화했다니, 자못 역설적이다.   

바흐 골트베르크 변주곡 (피아노 글렌 굴드, 1981년)

* 샤콘느는 17세기 스페인과 남프랑스에서 유행한 3박자의 느린 춤곡인데,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중남미에서 유럽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바흐의 <샤콘느>는 무반주 파르티타 2번 D단조의 마지막 악장으로, 주제와 30개의 변주곡으로 이뤄져 있다. ‘파르티타’(Partita)도 똑같이 모음곡이란 뜻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으로 통하는 비탈리(Tomaso Vitali, 1663~1745)의 <샤콘느>도 변주곡 형식이지만, 1867년 독일의 바이올리니스트 페르디난트 다비트가 발표하면서 “원래 작곡자가 비탈리”라고 했을 뿐, 실제 작곡자가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