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 ‘조선춤방Ⅱ’을 통해 오랜만에 만난 전황의 춤
[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 ‘조선춤방Ⅱ’을 통해 오랜만에 만난 전황의 춤
  • 윤중강 평론가/연출가
  • 승인 2024.05.29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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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적이고, 역동적이고, 화려하다.
▲윤중강 평론가/연출가
▲윤중강 평론가/연출가

전황(1927~2015)은 20세기 후반 50년 동안, 한국공연예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함에도 21세기에 들어서 그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국악인과 무용인이 늘어가니 안타깝다. 젊은 시절 한 때 연예계와 영화계에서 일을 했기에 그랬고, 대학의 무용과나 국악과를 중심으로 제자를 길러내지 않았기에 그렇다. 그러나 국립극장의 국립무용단의 작품을 안무했고, 국립창극단의 단장을 지낸 전황을 몰라선 곤란하다. 

국립국악원에선 작년에 이어서 올해 ‘조선춤방Ⅱ’을 개최했고, 전황의 춤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황춤방의 춤사범은 윤성주(인천시립무용단 예술감독)였고, ‘검(劍)’이란 작품은 안덕기(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교수)가 선보였다. 이번에 발표한 ‘검’이란 작품의 맥을 살피면, 최승희 전황 윤성주 안덕기의 4대의 계보라 하겠다. 

1963년 전황은 신흥무용연구소을 개설한다. 그 시절 유명한 무용학원이라면 김백봉연구소(필동), 전황연구소(광화문)였다. 두 사람은 최승희의 정통 직계 제자로 남쪽에 정착한 인물이다. 전황의 신흥무용연구소는 어린이반이 유명했다. 당시 필동 코리아하우스에선 자주 공연이 있었는데, 그 시절 참가한 어린이에는 전황의 딸인 전미례와 윤성주가 있다. 

여러 형태의 ‘검무’를 창작한 전황  

전황은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2004)을 통해 자신의 삶과 예술을 소상히 밝혔다. 거기서 ‘여성화된 남성춤’에 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한 바 있다. 필자 또한 이에 공감하는 현실에서, 안덕기의 춤에 관심이 가게 되었다. 한국춤의 사사 계보상 어느 정도의 ‘남성춤에 내재한 여성성’은 존재하는데, 안덕기는 여성성이 전무(全無)하다. 이런 이유 하나만으로도 안덕기의 춤은 가치가 다르다. 

1964년 6월 27일~28일,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선 ‘전황민속무용발표회’가 열렸다. 당시 일반적으로 ‘민속’이라면 예술과는 거리가 있다는 인식이 있었고, 또 시대적인 거리감도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함에도 전황은 ’민속‘을 앞에 내세웠다는 점이 이채롭다. 이는 전황의 선배 또는 동년배 무용인과 전황을 확실하게 변별되는 지점이다. 

전황의 첫 번째 개인발표회에는 ’검무’란 제목의 단일작품도 있었지만, 연극성을 지난 ‘항우와 우미인’에도 칼이 등장한다. 당시 김경옥(무용평론가)은 ‘재치와 열정’이란 단어로 전황을 높이 평가하면서, ‘필요 없는 연기가 과잉’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무용과 연극을 완연히 분리해서 평가하고픈 김경옥의 개인적인 성향이 반영된 것이다. 나는 영화계, 대중예술계를 경험한 전황에게 있어서, 무대에서 표현되는 연극성은 참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고 싶다. 

1962년 12월 26일, 워커힐 준공기념 공연이 열렸는데, 이 당시 전황은 ‘광예무악단(光藝舞樂團)을 조직해서 국내공연과 해외공연을 병행할 계획을 세운다. 무용단이 아닌 무악단이라고 한 것은, 자신의 공연이 단지 무용에만 머물지 않음을 뜻한다. 전황의 ‘검무’는 이 자리에서 가장 큰 박수를 받았고, 이후 해외에서 공연된 검무의 초기 버전이 된다. 

여성국극의 악사, 안무, 대본으로 활역한 전황 

1953년 부산에 정착한 전황이 최초로 참여한 작품은 여성국극 <가야금>(유치진 원작)이다. 
이 작품은 여성국극(1951)으로 초연(부산동아극장, 박성옥 음악)이후 여러 번 재연되었다. 환도 후 <가야금의 유래>(1954)란 제목으로 극단 신협이 공연했고(시공관 및 평화극장, 나운영 음악). 영화 ‘가야금’(1964)까지 만들어졌다. (권영순 감독, 황병기 음악) 여성국극, 연극, 영화까지 이어진 이 작품의 주요 배역은 가실왕(박귀희, 김동원, 신성일), 배꽃아기(김소희, 최은희, 최지희), 우륵 (신숙, 이해랑, 김진규)으로 그 분야의 최고배우가 맡아서 인기를 끌었다. 

전황은 원래 박성옥에게 아쟁을 배워서 악사로 참여했지만, 최승희제자로서 안무력이 남달랐던 그는 이내 여러 여성국극의 안무를 담당했다. 그렇다고 그가 여성국극의 악사를 하지 않은 것 또한 아니다. 여성국극 악사는 4인이 한 팀을 이루고 규모에 따라서 5인이 되기도 하는데, 전황, 정철호, 박동진, 서공철이 한 팀을 이루고 여기에 신쾌동(거문고)이 합세하기도 했다. 

전황은 직접 여성국극의 대본을 쓰기도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벌에 쏘인 꽃>이란 작품을 내세웠는데, 실제 전황이 대본을 쓴 작품은 국극단 ‘화랑’이 공연한 ‘천정배필’(3막 5장)로, 당시 여성국극 최고 드림팀의 수작이었다. (전 황 대본, 한일섭 작곡, 김정환 미술, 원우전 장치) 

전황류(流), 두 가지 확실한 특징 

강홍식과 이혼한 전옥은 최일과 재혼한다. 해방후 이들 전옥의 브랜드명은 백조(白鳥)였다.백조가극단, 백조악극단, 또 ‘백조 쇼’는 유명했는데, 이런 공연에서 전황이 총지휘를 맡기도 했다. 이들 부부는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신파적 대중성’이 깔린 영화를 제작해 히트했는데, 전황도 합류했다. 화류춘몽(1958), 사랑이 가기전에(1959), 버림 받은 천사(1960)의 크레딧에 서 전황을 확인할 수 있다. 1962년 박정희정권은 당시 군소영화사를 일제히 폐업시키게 되는데, 백조영화사도 이로 인해 한국영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전황이 광화문에 무용연구소를 개설한 것도, 이런 시대적 흐름과 연관이 있다. 이 시기부터 전황은 천부적 재능을 지닌 춤에 전념한다. 전황의 춤을 ‘전황류(流)’라고 확실하게 이름 부칠 수 있는 확실한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템포감이다. 한국무용공연사에서 민속적인 음악과 춤을 바탕으로 해서 역동적인 무대는 전황의 안무로부터 출발했다. 둘째는 화려함이다. 이런 두 가지 이유로 해서,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정부 주도의 해외 공연에선 전황의 작품이 특히 인기가 많고, 한국공연의 엔딩은 전황 안무였다. 전황은 이를 스스로 피니쉬블록 (finish block)이라 했고 자부심이 대단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의 농악은 최고의 인기였다. 농악이 처음 무대에 오른 건 한성준의 고전무용대회(1938)이고, 1960년대 초반 박성옥에 의한 리틀 엔젤스공연에서도 농악이 있었지만, 국립무용단을 비롯한 무대화된 농악은 거의 전황의 안무에 근거한 바리에이션이다. 전황의 안무력은 1970년 오사카 엑스포(만국박람회),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빛을 발했고, 특히 1972년 삿포로 동계올림픽 관련 일본 전역 순회공연에선 전황이 총연출을 맡게 된다. 

전황에 관해선 할 얘기가 참 많으나, 일단 여기서 줄인다. 앞으로 국악계와 무용계는 물론 한국의 극장공연사, 영화사, 무엇보다 여성국극사를 소상히 정리할 때 당시 전황이란 인물의 활약이 바르게 기록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