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man Library] 예술은 누구에게 열려있는가 : 배리어프리에서 그 너머까지
[Human Library] 예술은 누구에게 열려있는가 : 배리어프리에서 그 너머까지
  • 독립기획자 김나연
  • 승인 2024.05.29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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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공공성은 ‘예술은 공익에 기여해야 한다’와 ‘모두가 예술을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두 관점에서 논해지곤 한다. 그렇다면 그 ‘모두’는 누구를 포함하는가. 과연 현시대의 예술은 ‘모두’에게 열려있는가.

한국에는 한국어와 한국 수어라는 두 가지 언어가 존재한다. 하지만 연극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기본값은 음성언어다. 비장애인이 다수인 사회에서 이는 당연한 일이 된다. 우리 사회의 ‘당연함’은 이렇게나 견고하다. 배우의 입으로부터 발화되는 대사에 수어 통역이나 자막과 같은 부가 서비스가 제공되는 경우는 있어도 그 반대는 쉽게 생각되지 않는다. 언어의 장벽 앞에선 함께 웃을 수도, 함께 울 수도 없다. 소수라는 이유만으로 배제되는 감각은 살갗 깊이 새겨진다. 

물리적 장벽을 허물고자 하는 배리어프리적 시도는 국립극단, 국립극장과 같은 공공기관을 필두로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접근성 서비스가 보편화되며 ‘공연장’의 접근성과 ‘공연’의 접근성을 높이려는 시도가 지속되는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서비스도 결국 비장애인이 기본값으로 설정되어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본값 자체를 뒤흔들 수는 없을까. 수어로 진행되는 공연에서 헤드셋으로 음성해설을 듣는, 휠체어로 가득 찬 객석에서 의자 서비스를 신청해 앉아있는 비장애인의 모습을 상상해보곤 한다. 

예술에서 ‘공공성’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만약 청각장애인을 위해 수어만으로 공연을 제작한다고 하면 시각장애를 가진 이들은 해당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 불가하다. 어쩌면 모두를 포용하는 예술이란 애당초 불가능한 이상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예술에서의 ‘공공성’은 ‘다양성’과 함께 논의될 수밖에 없다. 선택지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공연 예술에서는 장애인의 존재 자체가 지워지곤 한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노트르담의 꼽추>에서 주인공 콰지모도는 농인으로 묘사된다. 농인의 캐릭터가 공연 예술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비장애인이 되고 청인 배우가 배역을 맡게 되는 것은 이상한 구조다. 미국의 데프 웨스트 시어터(Deaf West Theatre)에서 제작된 뮤지컬<The Hunchback of Notre Dame>은 바로 이러한 구조를 부순다. 콰지모도 역에 농인 배우와 청인 배우를 캐스팅하여 수어로 극을 이끌어가는 콰지모도에게 목소리를 부여한 것이다. 두 배우가 모두 무대 위에 존재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보통 수어 통역사나 음성 해설사, 자막은 최대한 극을 방해하지 않도록 숨어있지 않은가. 물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공연을 만들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극 중에서뿐만 아니라 공연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배제되는 이가 없도록 하는 데에는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구조와 체계를 만들어가는 일이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부딪히고 깨지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구조를 뒤엎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연극이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허구적이면서도 무엇보다 현실적이다. 기존의 관성을 벗어나, 당연함이 뒤집힌 허구의 세계를 마주하며 우리는 현실의 장벽을 직면하게 된다. 그렇게 연극이 끝난 자리에는 관객이 남는다. 예술은 결코 아름다움만을 이야기 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견고한 기본값을 전복시키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 되어야 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