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충무로야사] -영화 ‘바보들의 행진’과 하길종 감독-
[연재 충무로야사] -영화 ‘바보들의 행진’과 하길종 감독-
  • 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 승인 2010.02.2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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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프롤로그.

끝없이 펼쳐진 모래언덕, 세찬바람이 불고 있다. 이동하는 CA프레임 안에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웬 중년사내(신성일분)가 심하게 기침을 토하며 모래 위를 휘청휘청 걷고 있다.

모래바람은 울부짖듯 심하게 사내에게 몰아쳐온다.

사내의 시선으로 멀리서 빨간 스카프인지 비닐봉투인지 분간이 안 되는 물체가 바람의 소용돌이 속에 솟구쳤다 내리 꽂혔다 하며 휩쓸려온다. 사내는 멍청한 시선으로 그것을 응시한다.

물체가 가깝게 휩쓸려오자 그것은 빨간색 파라솔임을 알 수 있다. 파라솔은 사내의 곁을 스쳐 멀리 허공으로 사라진다.


이상은 하길종감독의 ‘속 별들의 고향’ 오프닝씬이다. 바람, 모래언덕, 기침하며 걷고 있는 중년사내, 바람에 휩쓸리는 빨간 파라솔. 이러한 영상적 등식은 다분히 상징성과 비유를 내포하고 있는 듯 보인다.

모래바람의 임팩트와 사운드, 피를 토하듯 기침하는 사내, 어쩌면 사내는 주인공이 아닌 하길종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빨간 파라솔은 각혈내지는 여주인공 수경(장미희분)의 운명을 상징하거나 비유했는지도... 이 작품을 연출한 후 그 역시 3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으니까.

▲故 하길종 감독

하길종감독은 서울대 불문과 출신으로 대학시절 ‘태(胎)를 위한 과거분사’ 라는 시집을 출간한 대학생 시인이었다.

그는 대학을 마친 후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 아트아카데미에서 사진예술과 회화를 수학한 후 이듬해 캘리포니아UCLA대학원에서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하게 되고, 재학 중 영화 ‘미지와의 만남’, ‘스타워즈’로 잘 알려진 조지 루카스감독, 영화 ‘대부’와 ‘지옥의 묵시록’의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등과 교류하며 그의 데뷔작인 ‘병사들의 제전’을 제작발표하기에 이른다.

대학불문과에서 시를 전공하다가 엉뚱하게 사진예술과 회화를 공부하고 또다시 영화연출로 전환한 그의 예술적 행적은 영화가 종합예술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별달리 이상할 것도 없이 지극히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와 술한잔 하면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에 대한 행적저변에는 시대적 아픔같은게 내재되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그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시집인 ‘태를 위한 과거분사’와 대학시절에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를 거듭 겪은 체험적 술회를 들어보면 쉽게 공감할 수 있다.

필자역시 대학시절 4.19세대였고 후일 4.19혁명 다큐멘터리 시나리오를 집필한바 있어 그의 아픔에 쉽게 동화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각설하고, 그는 UCLA에서 영화수업을 마치고 그 이듬해인 1970년 가을, 급거 귀국한다. 그리고 72년도에 영화 ‘화분’(이효석원작)으로 한국영화계에 화려하게(?) 데뷔한다. ‘화분’은 영화인들의 초미의 관심과 기대 속에 개봉되었으나 괄목할만한 대중적 호응은 얻지 못했다. 그러나 마니아층과 영화평론가들에게는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얻은 것으로 기억된다.

그가 평소 영화평론가 안병섭, 변인식등과 자주 어울리게 된 동기도 이런 점에 연유한다고 생각된다. 이후 1974년도에 영화 ‘바보들의 행진’을 연출하면서 드디어 마니아층과 관객들 모두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게 된다.

데뷔작인 ‘화분’은 문학작품으로 일반대중이나 관객들에게 다소 이질감이나 거리감을 줄 수 있었으나 4.19와 5.16을 경험한 대학생들의 꿈과 좌절과 아픔을 나름의 독특한 연출감각으로 영상화한 점이 선풍적인 흥행적 흐름을 탄 것이다. 당시 최인호의 소설 속 인물 중 병태와 영자, 민우와 다혜 등은 시대적 아픔의 햄릿형과 돈키호테형으로 버무려 희화화 한 대학생들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가수 송창식이 부른 주제가 ‘고래사냥’, 김정호가 부른 김상배 작곡·작사 ‘날이 갈수록’의 폭발적인 인기는 ‘바보들의 행진’ 흥행에 큰 영향을 주었다. 술집이건 해수욕장이건 MT장소건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고래사냥’과 ‘날이 갈수록’이 열창되곤 했다.

그것은 마치 미남배우 워렌 비티와 나탈리 우드가 주연한 엘리아 카잔의 ‘초원의 빛’이 한국에 수입 상영되자 영국의 계관시인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 ‘초원의 빛’이 수록된 시집이 불티나게 팔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그룹사운드라고 할 수 있는 ‘키보이즈’(윤항기,김홍탁)가 초원시리즈를 불러 그들이 부른 ‘해변으로 가요’, ‘정든 배’와 함께 대히트를 시킨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엘리아 카잔의 ‘초원의 빛’은 대학생활에서 한번쯤은 경험하는 여드름현상과 같은 사랑의 아픔을 극히 보편적 시각에서 그렸으나, ‘바보들의 행진’은 군사정권의 엄혹한 검열기준과 강압적인 제약이 젊은이들의 시대적 아픔과 좌절의식을 한층 자극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보들의 행진’ 속편격인 ‘병태와 영자’, 그 이후에 제작된 배창호감독의 ‘고래사냥’등을 보면 그러한 사실들이 훨씬 더 설득력 있게 정리된다.

그리고 바람 부는 해변에서 모래바람에 휘말려 어디론가 휩쓸려가는 빨간색 파라솔로 파격적 영상을 보여주는 ‘속 별들의 고향’의 오프닝씬은 마치 그의 ‘요절을 위한 미래분사’처럼 느껴졌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정리/조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