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 이탈리아 : 비발디 <사계>와 협주곡의 진화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 이탈리아 : 비발디 <사계>와 협주곡의 진화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4.06.1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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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크시대 역동적 이뤄진 음악 실험, 비발디 협주곡서 하나의 정점 도달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1683년, 오스만 투르크의 빈 포위 공격은 실패했다. 유럽을 이슬람 세계로 만들겠다는 술탄의 오랜 야망은 물거품이 됐다. 빈 사람들은 이들이 놓고 간 커피에 우유를 타서 달달하게 마셨는데, 여기서 ‘비엔나 커피’가 유래했다. 투르크 병사들이 즐기던 초승달 모양의 빵 ‘크로아상’도 유럽에 전해졌다. 술탄 근위병인 예니체리의 음악은 유럽 음악가들의 이국 취향을 자극했고, 약 100년 뒤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과 오페라 <후궁탈출>에 영향을 주었다. 

이탈리아로 시선을 돌려 보자. 자유의 도시 베네치아는, 경제는 예전 같지 않았지만 여전히 유럽 음악의 중심이었다. 산마르코 광장은 12월이면 카르나발(Carnaval, 사육제)을 즐기는 인파로 붐볐다. 1631년 몬테베르디가 산마르코 성당의 음악감독에 취임하여 <포페아의 대관식> 등 새로운 오페라를 발표했고, 1637년 산 카시아노 극장이 문을 열어 일반 대중들도 오페라를 즐길 수 있게 됐다. 베네치아의 17개 극장에서는 17세기 말까지 388편의 오페라가 상연됐다. 로마와 나폴리에도 오페라 극장이 잇따라 들어섰고, 화려한 기교를 뽐내는 카스트라토(castrato, 거세된 남성 성악가)가 대중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요즘 음악 용어가 이탈리아말로 돼 있는 건, 중요한 음악의 혁신이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1703년, 25살의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가 사제 서품을 받았다. ‘빨강 머리의 신부’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는 미사보다 음악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미사 중에 신도들에게 기도를 시키고 그 틈을 타서 곡을 쓰곤 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베껴 쓰는 것보다 내가 작곡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며 의기양양했다. 동시대의 법률가이자 극작가 골도니는 이런 그를 헐뜯었다. “비발디는 바이올리니스트서는 만점, 작곡가로서는 그저그런 편, 사제로서는 빵점이다.” 비발디의 순발력도 뒤지지 않았다. “골도니는 험담가로는 만점, 작가로는 그저그런 편, 법률가로는 빵점이다.” 비발디는 기관지 천식이 심해서 미사 집전이 힘들었다. 카톨릭 당국은 그를 곱게 보지 않았다. 사제가 된지 4년이 채 안 돼 종교재판소는 비발디의 미사 집전을 금지해 버렸는데, 그는 “음악에 몰두할 수 있게 됐다”며 오히려 기뻐했다고 한다. 

18세기 유럽에서 비발디의 인기는 바흐와 헨델을 능가했다. 바흐는 비발디의 악보를 보면서 작곡을 연습했고, 무려 17곡에 이르는 그의 협주곡을 편곡했다. 누구나 아는 <사계>(1725)는 봄 · 여름 · 가을 · 겨울 네 계절의 정취를 담은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화성과 창의의 시도’ Op.8에 포함된 12곡 중 맨 앞의 네 곡으로, 비발디 자신이 계절마다 시를 써 넣었다. “소네트에 의해 매우 사실적으로, 명확하게 묘사된” 이 작품은 ‘표제음악의 효시’로 꼽히기도 한다. 비발디는 바이올린 뿐 아니라 첼로, 플루트, 만돌린 등 여러 악기를 위해 500곡 가까운 넘는 협주곡을 썼다. 

비발디 <사계> (바이올린 율리아 피셔)

당시 베네치아는 남녀 간의 풍기문란이 심했던 모양이다. 피에타 자선원은 문 앞에 버려진 사생아를 900명 가량 수용했는데, 이들 중 엄선한 40명 가량의 소녀들이 비발디의 협주곡을 세상에서 제일 먼저 연주했다. 이 불우한 소녀들 중에는 애꾸도 있고 천연두로 망가진 얼굴도 있었지만 “천사처럼 노래했고, 어떤 악기도 두려움 없이 척척 연주했으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아하고 정확하게 박자를 맞추었다.” 비발디는 이 소녀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고, 이들이 연주할 수 있도록 비교적 쉽게 곡을 썼다. 이들에게는 음악을 연습하고 연주하러 가는 시간이야말로 햇살을 보는 해방과 기쁨의 시간이었고, 비발디의 음악이야말로 새로운 삶을 꿈꾸게 해 주는 축복이었을 것이다.  

비발디는 <글로리아>를 비롯한 150여 편의 종교음악과 90여 편의 오페라도 썼는데, 실종된 그의 악보들은 지금도 계속 발굴되고 있다. 그는 1741년, 만토바 출신의 소프라노 안나 지로와 함께 오페라를 공연하려고 빈을 방문했지만, 후원을 기대했던 카를 6세가 세상을 떠나자 쓸쓸히 객지에서 생을 마쳤다. 비발디의 이름은 사후에 완전히 잊혀졌지만, 19세기의 ‘바흐 르네상스’ 이후 그에게 영향을 준 중요한 음악가로 새롭게 평가됐다. 

20세기 작곡가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는 이러한 비발디가 과대평가됐다며 “똑같은 협주곡을 400번이나 쓴 사람”이라고 폄하했다. 1913년 <봄의 제전>으로 샹젤리제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음악의 혁명아 스트라빈스키가 볼 때, 길이 10분 안팎의 비발디 협주곡들이 모두 고만고만해 보인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의 이 말이 비발디를 정당하게 평가한 거라고 볼 수 있을까? 먼저, 비발디 협주곡이 탄생하기까지의 역사를 잠깐 돌아볼 필요가 있다.  

‘협주곡’(concerto)은 ‘겨루다’, ‘다투다’란 뜻의 ‘콘체르타레’(concertare)에서 온 말로, 독주 악기가 합주단과 대결하는 구성이다. 독창과 합창의 대조가 두드러지는 르네상스 말기의 노래 양식에서 협주곡이 싹텄다. 다양한 조바꿈 기법과 ‘리토르넬로’ 형식을 활용한 것은 비발디 협주곡의 특징이었다. 이 시기의 오페라 아리아들은 주로 A-B-A의 ‘다 카포’(Da capo, ‘처음부터’란 뜻) 형식을 취했는데, 비발디는 이를 확장하여 A-B-A-C-A-D-A의 ‘리토르넬로’(Ritornello, ‘돌아온다’는 뜻) 형식을 완성했다. A부분의 합주가 되풀이 나오는 사이사이에 다양한 조성의 에피소드 B, C, D가 등장하여 음악이 자연스레 확장된 것이다. 비발디가 개발한 ‘리토르넬로’ 형식은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까지 이어졌다. 이 시대 청중들은 ‘리토르넬로’ 형식으로 창작된 새로운 곡을 즐겁게 기다렸고, 비발디는 이 형식을 파괴할 특별한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몰랐을 리 없는 스트라빈스키가 20세기의 기준으로 비발디의 음악이 “모두 비슷하다”고 깎아내린 건 부당해 보인다. 스트라빈스키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이후의) 예술가들은 이미 남들이 말한 것을 자기 방식으로 다시 말할 수 있을 뿐”이라고 탄식한 바 있다. (이희경 <메트로폴리스의 소리들>, p.55) 끊임없이 자기만의 새로운 형식과 음악어법을 선보여야 하는 창조적 예술가의 고충을 토로한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문화도 변해 왔기 때문에, 바로크 시대와 20세기의 작곡, 연주, 수용 방식이 다른 건 당연한 일이다. 바로크 시대에 역동적으로 이뤄진 음악의 실험은 비발디의 협주곡에서 하나의 정점에 도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