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 ‘玄의 무대’, 신무용 기본어법의 미완결성
[성기숙의 문화읽기] ‘玄의 무대’, 신무용 기본어법의 미완결성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4.06.19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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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정동극장 기획 ‘세실풍류’ 중 안귀호의 춤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춤 솜씨는 차치하고서 우선 온통 흰색으로 치장된 무대가 문제였다. 무대바닥, 호리존트, 등·퇴장을 위한 가림막 등 무대는 한결 같이 흰색으로 꾸며졌다. 흰색의 무대는 춤사위의 선명성을 희석시켰다. 승무의 장삼자락이 내뿜는 장쾌한 미감은 관객의 시선에 온전히 포착될 기회를 잃었다”.

작년 정동극장 기획 “세실풍류”에 대한 공연평 「名舞의 실종, 공허한 무대」(서울문화투데이, 2023년 6월 1일자) 글의 일부다. 올해 정동극장 기획의 “세실풍류”의 공연장은 온통 ‘현(玄)의 무대’로 치장되었다. 이른바 ‘검은 무대’는 작품에 따라 심미적 차이는 있겠으나 전반적으로 안정적 공간미학의 기조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잘한 선택이라 여겨진다. 

“2024 세실풍류” 무대에 고(故) 김백봉(1927~2023) 선생의 손녀딸 안귀호가 신무용 ‘청명심수’(請明心受)를 선보였다(2024년 4월 9일 국립정동극장 세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김백봉은 일제강점기 세계적 무용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신무용가 최승희의 제자로 유명하다. 평안남도 평양 출생인 김백봉은 최승희 문하에서 춤을 익히고 무용단원으로 활동하다가 해방직후 스승을 따라 월북했다. 다시 1.4후퇴 때 월남하여 1954년 시공관에서 첫 무용발표회를 통해 이름을 알렸다.

당시 평단의 평가는 엇갈렸다. 무용평론가 조동화는 민족무용에 대한 절망에서 예기치 않은 한국무용사의 여명기를 맞이했다고 호평했다. 반면, 강이문은 특별히 독창성을 발견할 수 없다고 일갈하면서도 다소 여지를 남겼다. 예컨대, 형식면에서 편린적 회고조를 넘어 생신(生新)한 기풍과 뚜렷한 방법론 제시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 

신무용의 아이콘 최승희의 부재 속에 김백봉은 대한민국 무용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몇 안되는 행운아로 통한다. 그러나 월북무용가로 낙인찍힌 스승 최승희로 인해 늘 정보당국의 감시의 대상이 되는 불운을 겪었다. 데뷔무대는 화려했으나 북방의 고향을 등지고 남하한 그녀의 일생은 한마디로 풍진 세월이었다. 분단시대 연좌제, 반공이데올로기 등에서 연상되듯  남북 대치국면이 자아낸 극도의 긴장은 그의 삶에도 고스란히 영향 미쳤다. 

주지하듯, 김백봉은 최승희의 계보를 잇는 신무용 제2세대의 대표주자로 손꼽힌다. 6.25 전쟁으로 황무지가 된 한국무용계를 재건하는데 앞장선 인물로 개척자적 위치에서 헌신한 공로가 적지 않다. 월남 이후 전 생애를 교육현장에서 신무용의 보전과 전승 및 국내외 예술활동을 통해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특히 경희대 무용과 창설(1966년)에 산파역할을 한 그는 남편 안제승과 함께 부부 교수로 일평생 대학에 봉직하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무용계에서 경희대 무용과는 이른바 신무용 종가(宗家)로 불리운다. 신무용 종가로서의 경희대 무용과엔 김백봉 퇴임 이후 장녀 안병주가 교수직에 오르면서 사실상 후계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교수직의 대물림은 무용계에선 보기 드문 이례적 행운으로 간주된다.

한편, 김백봉 문하의 상아탑에서 배출된 신무용 제자들은 일일이 거론하기조차 숨가쁘다. 김말애, 유학자, 유옥재, 박연진, 지희영, 양성옥, 전은자, 장유경, 정은혜, 임성옥 등 실로 즐비하다. 아쉽게도 대다수는 신무용 실력이 출중함에도 제대로 꽃피우지 못하고, 주변에 머문 경우가 적지 않다.  

왜 그럴까? 김백봉의 두 딸(안병주·안나경) 그리고 손녀(안귀호) 등 직계 후손들이 신무용 정통 계보의 중심 축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에서 ‘청명심수’의 원작자 김백봉의 손녀딸 안귀호가 “세실풍류” 무대에 섭외된 것이라면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김백봉 신무용은 가계전승 선상에 있는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닌, 적어도 그를 사사한 대한민국 무용인 모두의 자산이 아니던가? 

작품 ‘청명심수’는 김백봉 신무용을 표상하는 결정판으로 손색이 없다. 창작배경 또한 예사롭지 않다. 1972년 교통사고로 절망의 시간을 보낼 즈음 성금련의 가야금 산조가락에 영감을 얻어 창작됐다.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에서 두 팔을 벌여 ‘이리 오라’ 손짓하는 산의 부름에서 고향을 만나고 부모와 조우하는 천상에서의 꿈이 담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무용평론가 김태원은 김백봉의 ‘청명심수’에서 가야금 선율에 따라 무대를 누르고 튕기고 때리는 북방녀(北方女) 특유의 강인함 속 유연한 몸놀림을 눈여겨 봤다. 그렇다면 김백봉 신무용의 계보선상에 있는 손녀딸 안귀호가 선보인 ‘청명심수’는 어떤가? 

안귀호는 짙은 다홍빛 한복 차림의 아담하고 단아한 춤태로 여성적 미감을 과시했다. 그러나 ‘청명심수’ 창작 당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간 절박성이 생략된 채 산조춤 특유의 표피적 정감을 담아내는데 머물렀다. 북방녀의 정열과 피의 맥박이 튕겨지는 강인함의 기운 또한 찾기 어려웠다. 

다시 말해, 신무용 특유의 유미주의적 화사함은 돋보이나 춤사위 마디마디엔 치명적 결함도 엿보인다. 허공을 부유(浮游)하는 양 팔사위는 아름답지만 손동작의 종결 처리는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어색하다 못해 신무용 고유의 미적 완결성이 반감된다는 인상이 짙다. 

개인적 체험에 의하면, 신무용 기본어법 중 팔사위는 오랜 수련기간을 요한다. 특히 ‘귀밑 쓸기’ 동작은 신무용 학습에서 지극히 기본동작에 속하지만 집중감에 따라 성취도가 달라진다. 이 동작은 김백봉 신무용의 체득에서도 예외 없이 강조되는 춤사위로 중요시된다. 안귀호의 ‘청명심수’ 작품에서 팔동작의 종결 혹은 곡선 처리의 미완결성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정리하자면, 신무용 고유의 문법체계에서 관찰할 때 안귀호가 선보인 ‘청명심수’는 어설프고 낯설다. 그것이 신무용 기본어법의 불완전한 체득의 소산에서 기인된 것이라면 김백봉 신무용의 전승자로서 냉철한 성찰이 필요한 것 아닌가? 성찰은 그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공연해설자는 안귀호를 일컫어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라 추켜세운다. 한 발 더 나아가 이 대목에서 관객들에게 박수칠 것을 청한다. 단순 유도 차원을 넘어 강요에 가깝다. 

묻는다. 안귀호가 가계전승에 따른 김백봉 신무용의 후계라는 점에서 고귀하고 존귀하다는 것인가? 아니면 ‘청명심수’에 투영된 신무용 춤사위가 탁월한 경지에 이르러 고귀하고 존귀하다는 것인가? 전문적 심미안이 결여된, 이른바 자아도취적 ‘주례사 해설’은 지양되어야 마땅하다. 자칫 한국무용사의 정도(正道)를 왜곡, 굴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