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비평] <피가로의 결혼>, 베세토 오페라단의 열정과 예술혼 돋보여
[이채훈의 클래식 비평] <피가로의 결혼>, 베세토 오페라단의 열정과 예술혼 돋보여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4.06.24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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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라노 윤현정 등 고른 기량과 호흡, 감동의 무대 선사
미세한 코믹 포인트 잘 살린 연출, 관객 웃음 유발에 성공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사)베세토 오페라의 <피가로의 결혼>이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을 후끈 달구었다. 6월 22일(토), 제15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두 번째 무대. 페스티벌에 대한 정부 지원이 끊긴 악조건이지만 객석은 꽉 찼고, 열기는 뜨거웠다. <피가로의 결혼>은 신분의 차별을 넘어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예찬한 걸작인데, 이날 공연에서는 민간 오페라단의 순수한 열정과 예술혼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보였다.  

<피가로의 결혼>은 모든 출연자가 고르게 잘 해야 성공할 수 있고, 그래서 자주 공연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이날 출연자들은 뛰어난 기량과 편안한 호흡으로 청중들을 만족시켰다. 

수잔나를 맡아 맹활약한 소프라노 윤현정은 단연 돋보였다. 1786년 초연 당시 인기 최고의 소프라노 낸시 스토라체가 수잔나를 맡았기 때문에 작곡자 모차르트와 대본작가 다폰테는 그녀에게 가장 많은 역할을 주었다. 윤현정은 4막 아리아(Deh vieni non tardar)는 물론, 피가로 · 백작 · 백작부인 · 케루비노 · 마르첼리나와 함께 이중창을 부르며 맑고 발랄한 수잔나의 이미지를 거침없이 발산했다. 피가로의 바리톤 최병혁의 기량은 탁월했다. 특히 1막 아리아(Non piu andrai)는 초연 때부터 인기가 높아서 춤곡으로 편곡되고 영화 <아마데우스>의 ‘환영행진곡’에도 등장하는데, 최병혁은 우렁찬 목소리와 섬세한 표정으로 커다란 환호를 이끌어냈다. 소프라노 나정원은 우아하고 기품있는 백작부인의 이미지에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고, 2막 아리아(Porgi amor)와 3막 아리아(Dove sono)는 오케스트라의 목관과 아름답게 어우러졌다. 사춘기 소년 케루비노를 맡은 메조소프라노 송윤진은 1막 아리아(Non so piu cosa son)와 2막 아리아(Voi che sapete)를 매혹적으로 불렀을 뿐 아니라 탁월한 연기로 큰 즐거움을 주었다.

연출은 설득력이 높았다. 서곡이 흐를 때 무대 위에서 구시대 권력자의 위선과 민중의 비판적 시선을 보여줌으로써 극의 핵심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전달했다. 심플한 무대에 조명으로 분위기에 변화를 준 것은 담백하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1막 기울어진 건물은 무너지기 직전의 봉건사회를 상징하고, 4막 뿌리뽑힌 채 천장에 매달린 나무는 뒤집어진 신분사회를 암시하는 듯했다. 3막 백작부인의 아리아(Dove sono)의 숭고한 선율이 흐를 때 무용을 삽입하고, 백작을 찬양하는 합창을 어린이 두 명이 시작하도록 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어둠 속에서 진행되는 4막은 액션을 명료하게 처리하여 드라마 흐름이 잘 전달됐다. 

여러 장면에 담겨 있는 미세한 코믹 포인트를 무리 없이 잘 표현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1막 케루비노와 백작이 차례로 소파 뒤에 숨고, 2막 백작부인과 수잔나가 케루비노를 여장시키고, 옷장 속에 숨어 있던 케루비노가 유리창을 넘어 도망치고, 3막 바르톨로와 마르첼리나가 피가로의 부모라는 게 밝혀지고, 4막 어둠 속에서 사람을 오인해서 여러 해프닝이 빚어지는데, 이 순간마다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는데 성공했다. 3막 피가로, 바르톨로, 마르첼리나가 팔뚝을 치켜들며 한 핏줄을 과시하는 장면은 폭소를 자아냈다.  

주연부터 조연까지 모든 출연자들이 열연했다. 백작을 맡은 바리톤 박경준은 수잔나를 유혹하다가 번번히 실패하는 구시대 권력자의 안쓰러운 모습을 훌륭하게 연기했다. 테너 석승권은 바질리오/쿠르치오의 1인 2역을 맡았는데,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결혼공증인 쿠르치오의 말더듬이 연기로 관객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피가로의 결혼>을 공연하기엔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이 다소 규모가 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오페라가 초연된 빈의 부르크테아터는 1,200석이었지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은 2,200석이다. 초연 때 피가로를 맡은 베누치의 소리가 극장 구석까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는데, 부르크테아터의 곱절 가까이 되는 큰 공간에서 그렇게 꽉찬 느낌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2막 케루비노가 유리창 넘어 도망치는 장면의 이중창(Aprite presto)은 세 번이나 앙코르를 받았다는데, 이는 청중이 출연자와 가깝게 교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멀리 앉아있는 관객들은 출연자들의 표정 연기를 보기 어렵고 그 때문에 드라마의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점을 감안한다면, 출연자들이 최대한 관객 가까이 다가설 수 있도록 위치와 동선을 설정할 방법은 없었을까. 

음악과 드라마의 전달을 위해 자막은 매우 중요하다. 이날 자막은 의미가 명료하지 않고, 심지어 철자가 틀린 것까지 있어서 안타까웠다. 특히 중창의 경우 어느 대목이 누구의 대사인지 구별해서 표시해 주면 좋았겠다. 

재정 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지만 오케스트라 규모가 작다 보니 음량이 작아서 음악이 충분히 살아나지 못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좀더 생기 있는 표현과 섬세한 밸런스를 이루었다면 규모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겠지만 그 정도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케루비노 2막 아리아(Voi che sapete)에서 현의 피치카토 소리가 잘 안 들리니까 수잔나가 기타 치는 동작이 공허해 보였다. 레치타티보를 반주하는 포르테피아노 연주는 시종일관 훌륭했다.

열악한 조건이지만 베세토 오페라단(단장 강화자)의 행군은 계속된다. <피가로의 결혼>은 예술의전당 공연의 성공에 이어 오는 7월 6일 오후 3시 공주문예회관 무대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