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박달님이 들려준 ‘전북제’ 산조
[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박달님이 들려준 ‘전북제’ 산조
  • 윤중강 평론가/연출가
  • 승인 2024.09.11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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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연출가
▲윤중강 평론가/연출가

“대동강 물맛을 알아야 서도소리를 제대로 부른다.” 이런 말이 전해온다. 난 이제 이리 말하겠다. “만경평야를 알아야 전북제 소리를 낼 수 있다.” 전북제산조를 오랜만에 ‘제(制)대로’ 들었다. 박달님 열 번째 독주회 ‘숨’이 그랬다. (8. 29.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 

전북제 :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끝에 가선 ‘별것’임을 증명 

산조는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 발전한 예술이다. 전북에선 이영채(1879~1931)가 있었고, 신관용(1912~1961)이 있었다. 둘 다 김제 출신이다. 전북제의 특징은 무엇일까. 불필요한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겉으로 강하게 에너지를 내뿜진 않지만, 안으로 올곧게 뭉쳐진 에너지가 있다. 최명희 작가의 ‘혼불’에서 생명을 틔워내는 강인한 ‘꽃심’과 비교해도 되겠다. 

전북제의 특징의 하나는 요설(饒舌)의 배제! 쓸데없는 얘기, 군더더기를 부치지 않는다. 30분이 안 되는 신관용류 가야금산조를 들으면 알 수 있다. 전남제가 감정을 확연히 드러낸다면, 전북제는 이를 다소 감추는 게 특징이다. 전남제는 숨소리마저 크게 하는 호소력이라면, 전북제는 웅변 속에서 느껴지는 침묵이 있다. 박날님은 마치 기도하듯이 신관용류를 연주했다. 이는 연주가의 종교적인 심성과도 연관된 것일 테지만, 전북제는 이렇듯 혼자서 구도하듯 몰입할 때 깊은 멋이 전해진다. 전북제는 처음엔 별 거 아닌 것 같으나, 끝에 가선 별것임을 증명한다. 박달님의 이번 연주가 그랬다. 

산조에서 지역성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이 연주하고 있는 산조의 뿌리가 어느 지역인지 모르고 타는 연주자가 참 많다. 가야금산조의 경우, 충청제와 전북제는 잘못하면 전승이 끊길 수 있다. ‘심상건류’는 충청제요, ‘신관용류’는 전북제다. 심상건류를 잘 타는 중견 연주가는 찾아보기 어려운데, 신관용류는 박달님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왜 유독 두 지역의 산조는 잘 발달되지 못했을까. 국악계에서 오랫동안 산조의 지역성을 이분화시켰기에 그렇다. 이제 ‘경기제와 남도제’란 이분법은 끝내야 한다. 경기제와 충청제는 완연히 다르고, 전북제와 전남제도 엄밀히 구분해야 한다. 

해금산조는 지영희류가 경기제, 한범수류가 충청제, 서용석류가 전남제이다. 아쉽게도 전북제 해금산조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행스럽게도 거문고산조의 양대유파는 각각 전북제와 전남제를 대표한다. 신쾌동은 전북 익산태생, 한갑득은 전남 광주태생이다. 이런 배경이 느껴지게 타는 산조를 들을 때면 감동해도, 그저 가락의 차이로만 알고 타는 산조는 허전하다. 

전남은 무인(巫人), 경기는 재인(才人), 전북은 아전(衙前)  

전남제는 무속(巫俗)을 기반으로 성장, 경기제는 재인(才人)을 중심으로 발전한 경우가 많다. 이들은 1930년대엔 서울로 모였고, 경성방송국(JODK)에서 연주했다. 그들에 의해서 산조라는 양식이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다. 전남제는 박종기(진도, 1880~1947), 경기제는 지용구(수원, 1857~1938), 충청제는 심상건 (서산, 1889~1965)가 대표적인데, 아쉽게도 ‘전북제’는 없다. 

왜일까? 이는 전북인의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전북인에게는 아전(衙前)적 심리가 강하다. 산조에서도 그런 특징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전북은 아전에 의해서 지역문화의 고유성을 그대로 지켜졌고,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의 진출에 꽤 소극적이다. 또한 중앙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어떻게 행동하듯 휩쓸리지 않는다. 

신관용류를 연주하는 박달님에게서 이런 ‘꽃심의 굳건함’이 보였다. 속인주의적 시각에서나 속지주의적 시각에서나, 박달님은 완벽한 전북인이기에 누구보다도 전북제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전(前) 시대의 명인과는 또 다르게 조성(調性)의 변화를 새롭게 발견하면서 아주 세련되게 연주하는 방법을 터득해냈다. 이제 전북제 가야금산조의 전승은 어느 정도 안심해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