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마지막 주말, 창단을 앞둔 서울시발레단이 맛보기로 준비한 ‘봄의 제전’을 보고 나왔을 때, 세종대로 건너편 교보빌딩에 걸린 시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그대가 밀어 올린/꽃줄기 끝에서/그대가 피는 것인데/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로부터 꼭 넉 달, 발레단 창단공연인 ‘한여름 밤의 꿈’(8,23~25.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보았다. 공교롭게 이날도 토요일 오후, 4월의 시가 있던 자리에 새롭게 걸린 8월의 시가 빛나고 있었다.
아마도 20대 후반이었을 주재만 안무가의 작품을 두 번 맨해튼에서 본 적이 있다. 20년쯤 전이라 제목도, 장소도 희미하지만 브로드웨이의 조이스극장(Joyce theater)이고 동성애가 소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 굴지의 안무가가 되어 돌아온 주재만이 한국 최초의 컨템퍼러리발레단으로 창단한 서울시발레단의 첫 작품을 서울 무대에 올렸다.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은 1966년 이후 마리우스 프티파, 미하일 포킨, 조지 발란신 등 전설적인 안무가들에게 꿈의 원천을 제공했던 셰익스피어의 대표적 희극이다.
주재만은 이 작품을 100분간, 32명의 무용수가 출연하는 대형 컨템퍼러리발레로 창작했다. 제목과 주제가 같을 뿐 모든 것이 새로운 주재만의 세계초연작품이다. ‘사랑’이 주제다. 원작이 사람들 간의 엇갈린 사랑을 희극적으로 표현한 스토리발레인데 비해 주재만의 작품은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본격적으로 추적한다. 멘델스존의 경쾌한 음악은 로베르토 슈만의 진중하면서도 서정적인 음악으로 대체되고 현대음악가인 필립 다니엘의 창작곡 두 편이 추가되었다. 클래식 혹은 신고전주의 발레형식으로 제작되었던 앞선 작품들과 달리 전형적인 포스트모던 컨템퍼러리발레형식이다. 조지 발란신이 뉴욕시티발레을 위해 안무한 ‘한여름밤의 꿈’(1962)이 여덟살 어린 나이에 미하일롭스키 극장(페테르브르그) 무대에 섰던 자신의 기억을 소환하여 만든 추억의 산물이었듯 주재만의 작품 역시 그가 신봉하는 사랑에 대한 신념을 대극장 무대에 쏘아 올린 로망의 산물일 것이다.
느낌표라기보다 물음표에 가까운 1부의 사랑
작품은 1부와 2부 각 50분씩, 100분으로 구성된다. 1부와 2부가 각각 독립적인 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차별성이 있다. 1부 무대엔 줄기차게 비가 내리고 조명은 어둡고 의상은 검정 일색이다. 주재만은 사랑이 포용하는 모든 감정과 경험, 행위 일체를 솔로와 듀엣, 3인무, 군무 등을 통해 묵직하게 표현한다. 환희의 뒤에는 그림자처럼 고통이 따르고 만남과 이별, 양지는 음지와 상존한다. 1부에서 묘사되는 사랑은 느낌표라기보다 물음표에 가깝다. 이 물음표가 클래식발레와 로맨틱발레, 모던발레와 컨템퍼러리 댄스 등 다양한 춤 형식을 통해 펼쳐지는 특이한 무대는 서두의 영상에서 이미 예고된 대로다. 백스크린에 나타나는 영상은 3단으로 구획되어 있다. 2층엔 상체를 벗은 11명 무용수가 자기만의 표정과 동작으로 독립적인 공간을 구성하고 그 아래 단 역시 11명 무용수가 고정된 자리에서 몸체와 발동작으로 현란한 춤사위를 실험한다. 이들이 구성한 다섯 커플이 의자를 중심으로 다섯 개의 에피소드를 연출한다. 맨 윗단엔 한 쌍의 남녀가 발을 맞댄 채 반대 방향으로 누워 있다. 발들은 닿을 듯 말 듯 실랑이를 반복한다. 발가락이 부딪치다간 밀어내고 발들은 교차하기도, 멀어지기도 한다. 남녀간의 사랑도 이런 모양으로 계속되어갈 것이다.
별빛처럼 빛나는 사랑의 신비, 그리고 희망
강렬한 팡파레 소리와 함께 열린 2부 무대 한가운데 새빨간 조명을 받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두 개의 뿌리에서 자라나 하나의 나무로 합쳐진 연리지(連理枝)를 닮은 사랑의 화신이다. 1부와 달리 환하게 밝아진 무대, 푸른색 의상, 경쾌한 음악이 사랑의 신비를 예감케 하는 무대가 펼쳐진다. 컨템퍼러리발레를 표방하면서 탄생한 서울시발레단이 주재만에게 창단공연안무를 맡긴 결정이 옳았음을 증명해준 환상적인 무대다. 김희현과 이지영이 춤추는 ‘the Room/I love you 방’이 2부의 하이라이트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파드되를 연상시키는 감각적인 춤이다. 밤하늘엔 별이 빛나고 “이 세상 가장 강력한 힘, 사랑을 통해 미지의 세계를 현실로 펼쳐보라”라는 안무가의 강렬한 메시지가 전체 무용수들의 군무를 통해 피날레를 장식한다. 2부는 1부에서 보여준 다양한 발레 형식들과 대비되면서 컨템퍼러리발레의 진수를 보여준 주재만의 트레이드마크로 서울시발레단과 함께 기억될 것이다. “그대가 밀어 올린/꽃줄기 끝에서/그대가 피는 것인데/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에 이어진 8월의 싯귀 “미소짓는 너의 얼굴은/여름날 장미꽃처럼/가장 따분한 곳까지/ 향기롭게 해” 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