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대구현대미술가협회의 과제와 미래적 전망 II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대구현대미술가협회의 과제와 미래적 전망 II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4.09.11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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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윤진섭 미술평론가

<이전 호에 이어>

Ⅱ.

[대구현대미술제]가 1979년에 제5회 행사를 끝으로 막을 내린지도 4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세상은 많이 변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문명의 패러다임이 대전환을 이루었으며, 이제는 세계가 한 가족처럼 소통하는 ‘SNS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즉, ‘손끝의 창조(Creation from the Fingertips)’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날이 발전해 가는 저작 앱(app)을 비롯하여 인공지능(AI), 챗봇(chatbot: 음성이나 문자를 통한 인간과의 대화를 통해서 특정한 작업을 수행하도록 제작된 컴퓨터 프로그램/NAVER), NFT, 메타버스 등등 디지털 기반의 가공할 신기술의 개발은 나날이 인간의 창조력에 도전하고 있다. 이러한 예술의 위기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할까? 

[대구현대미술제]가 열리던 70년대만 하더라도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그룹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대관화랑에서 전시를 했으며, 큐레이터란 말이 없던 그 시절에 전시기획은 작가들이 직접 하던 시절이었다.  

1995년에 창설된 광주비엔날레를 기점으로 한국 미술계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이른바 국제화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베니스비엔날레의 한국관 개관, <미술의 해> 등 이 무렵의 한국 미술계는 놀라울 정도로 변신을 거듭했다. 작가에게서 큐레이터에게로 전시기획의 무게 중심이 옮겨갔으며, 갤러리 숫자의 증가와 함께 아트페어, 각종 옥션은 상업주의의 확산을 부채질했다. 그에 비례하여 미술에서 전위와 실험이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과연 전위미술이 존재하는가?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무장한 ‘작가주의’의 실종에 애도를 표함과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비엔날레, 미술관, 화랑간의 관계는 또 어떠한가. 

 “<전위예술론>을 쓴 레나토 포기올리(Renato Poggioli)가 예로 드는 파레토(Pareto)의 ‘잔여물(residui)’ 개념은 흥미로운 관점을 시사해 준다. 파레토에 의하면 인간 행위가 지닌 ‘비합리성’과 관련된 잔여물은 여섯 개의 성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결합의 본능, 집단 추대, 외부적 표출 욕구, 사회성, 개인성, 성적 욕구’ 등이 그것이다. 파레토는 “인간은 이 비합리적인 성격의 잔여물들 위에서 수많은 신념체계를 구축한다.”고 보았다(레나토 포기올리, <전위예술론>). 예컨대 인간의 행위는 가장 이성적이며 합리적이어야 할 학문과 전시기획, 비평 등의 영역에서조차 이러한 잔여물들의 영향 때문에 비합리적이며 반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게 될 위험에 처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인간행위를 결정하는 수많은 변수들 간의 상호의존적 양상”(Pareto) 때문에 집단적인 패거리 문화와 따돌림, 게토와 같은 현상들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비단 미술의 경우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정치현장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나타나는 광범위한 현상이다.

- 윤진섭,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역사와 비평>, 2020 -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서두에 언급한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총감독 파올로 헤르켄호프를 떠올렸다. 그는 왜 비엔날레 주제의 키워드를 ‘카니발리즘’으로 잡았던 것일까? 그는 경제적으로 핍박받는 제3세계의 입장에서 미국으로부터 부는 신자유주의의 북풍을 의식했던 것일까? 그래서 6대주 권역의 큐레이터들에게 이 식인풍습의 관행을 각자의 입장에서 해석해 볼 것을 권유했던 것일까? 파올로의 권유를 받은 아피난 포샤난다는 이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막강한 국제금융 세력이 아시아에 가하는 약탈’로 해석했다. 그것을 침략으로 규정할 때, 침략을 당한 입장에서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는 과연 무엇일까? 굴욕을 견디며 던져주는 빵을 위해 참아야하는 것일까? 아니면 빵을 상대방의 면상을 향해 던지고 풀뿌리로 연명하면서 힘을 길러야 할 것인가? 서구와 연관시켜 볼 때, 내가 미술현장에서 부딪힌 문제들 중 상당수는 이런 심리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민주주의 요체라고 하는 다수결의 원리는 그것이 원칙대로 지켜질 때 금과옥조(金科玉條)인 것이지, 담합과 협잡, 눈속임과 매수, 패거리와 짝짓기가 횡행하는 사회현실에서는 허수에 불과한 것이다. 선의를 가장한 ‘보이지 않는 힘’은 미술현장에 출몰하여 질서를 교란시키며, 자의적으로 세계를 분리하고, 자기 입맛에 맞게 판을 짜는 도박장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오늘날 아방가르디스트들에게 요구되는 사명이 있다면, 이처럼 어둡고 전망이 불투명한 시대에 인류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줄 수 있는 ‘전사의 힘’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상업주의에 영합하는 무늬만의 사이비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목표와 이상이 행동과 일치하는 진정한 의미의 아방가르드 정신의 회복이 그 어느 때 보다도 필요한 시기가 바로 오늘이 아닌가 한다.”

- 윤진섭,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역사와 비평>, 2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