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전통적이면서 현대적인 재료”
3m 옻칠 조각, 수중 설치 회화, 금니사경 등 120여 점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동시대미술은 그동안 주변부로 밀려났던 공예와 불교미술을 중심부로 소환한다. 우리 전통이 새겨진 옻을 재료로 현대적인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는 성파 스님의 전시가 열렸다. 예술의전당(사장 장형준)은 내일(28일)부터 오는 11월 17일(일)까지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성파 선예禪藝 특별전 - COSMOS》을 개최한다. 오늘(27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는 성파의 예술 세계를 면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옻은 오랜 시간 반복해서 칠하면 칠할수록, 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윽한 빛을 낸다. 칠장에서 적정 습도와 온도를 유지하면서 칠이 마르길 기다리고, 표면을 수십 차례 사포질하며 매끈하게 다듬고, 그 위에 새로이 덧칠로 쌓아나가는 인고의 과정은 하나의 수행과도 같이 느껴진다. 덧그릴수록 탁해지는 유화 물감과 다르게 옻칠은 수차례 더할수록 맑게 빛난다. 성파는 이 작업을 수행할 때 ‘무아지경’의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기자간담회에서 “왜 ‘옻’을 재료로 선택했는지” 묻는 질문에 성파는 “오랜 세월동안 부패되지 않고 보존할 수 있는 옻의 내구성”을 이유로 꼽았다. 작품과 전시를 통해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묻는 질문에는 “예술은 세계의 공용어라는 말이 있다. 그림을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서 ‘독화’한다고도 하는데, 말그대로 그림을 ‘읽는’ 것이다. 이 시대의 이야기를 작품에 담아, 10년 후, 혹은 200년 후 나를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하고자한다”라며, “종교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작품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도들이 작품을 읽는다면, 내 말이 전달될 것”이라고 답변했다.
전통 재료 선택...물성에 집중
대한민국 조계종 큰 스님인 성파는 40여 년간 예술가로서 불교미술, 서예, 한국화, 도자, 염색, 조각 등 다양한 장르의 화업을 전개해 왔다. 이번 단독 개인전에서는 1980년대에 선보였던 금니사경과 최신작은 물론 옻칠 회화와 설치 작품을 중심으로 평생 화업을 총망라하는 120여 점을 선보인다.
중국 성파 선예에 있어 ‘재료에 대한 연구’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전통 한지 제작부터 안료와 염료의 재배 및 가공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물감과 바탕이 되는 재료들을 직접 다룬다. 성파의 작업실에는 옻뿐만 아니라 칠안료, 닥나무, 조개껍데기, 계란껍질, 밀가루풀 등 자연에서 얻은 재료와 도구들이 가득하다. 닥나무를 재배해 직접 한지를 제작하고, 고려시대 감지(紺紙)를 재현하기 위해 쪽을 직접 키우기도 한다.
그는 특히 ‘옻’의 물성의 활용에 능하다. 그동안 공예 재료의 일부였던 옻이라는 물질을 작품의 주재료로 사용하며 전통 재료와 결합하여 회화, 도자, 섬유, 조각 등의 작업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작가 성파가 평생을 바쳐 연구한 한국적 재료 탐구를 기반으로,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 작품을 선보이고자 한다.
전시는 6개의 섹션으로 구성했다. 태초(太初), 유동(流動), 꿈(夢), 조물(造物), 궤적(軌跡) 물속의 달 등이다.
첫 번째 섹션인 ‘태초(太初)’에서는 암흑의 공간에 세워진 검은 기둥 조형들을 만나볼 수 있다. 대나무처럼 뻗어있는 흑색의 조형들은 삼베로 모양을 잡고 여러 차례 건칠로 형태를 고정한 작품이다. 언뜻 보기에는 삼베와 옻으로 이루어졌다고는 상상도 하기 어렵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삼베 특유의 격자무늬가 드러난다. 검은 기둥은 우주의 근원을 탐구하는 상징적 오브제로, 초월적 공간과 시간의 개념, 암흑물질과 태초의 에너지를 시각화했다.
성파는 그의 작품을 두고 “자연이, 바람이, 물이 그렸다”고 표현한다. 두 번째 섹션 ‘유동(流動)’에서는 바람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얇은 한지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은 바람이 불면 가볍게 살랑일듯한 모양새로 연달아 걸려있다. 옻과 한지, 옻나무와 닥나무의 만남이다. 가벼운 옻칠로 물과 바람의 유동성과 결, 에너지의 움직임을 형상화한 작품들은 서양의 마블링 기법과는 달리 물질 너머의 에너지와 기운을 시각적으로 풀어냈다.
세 번째 섹션 ‘꿈(夢)’은 성파의 초현실 세계로 진입한다. 추상과 구상이 혼합된 인간, 동물, 기하학적 형태들이 혼재하며 무의식 속에서 펼쳐지는 꿈의 세계를 탐험한다.
네 번째 섹션 ‘조물(造物)’은 성파가 도자와 옻칠을 결합하고 공예와 미술을 넘나들며 ‘칠예 도자’ 장르를 개척한 과정을 보여준다. 정형과 비정형의 공존, 전통과 현대의 만남을 성파 선예의 방식으로 선보인다.
다섯 번째 섹션 ‘궤적(軌跡)’은 성파의 생애와 예술적 발전 과정을 추적하는 섹션이다. 그가 걸어온 예술적 궤적을 시기별로 나누어 보여준다. 유교의 시서화를 시작으로 불교의 사경과 도자, 그리고 추상적인 옻칠 예술로 확장되는 성파의 예술적 여정을 탐구한다. 한국의 옻칠과 중국의 조칠, 일본의 마끼에, 베트남의 현대 래커화 등 칠화가 발전한 4개국의 다양한 기법이 녹아있는 듯 한 다양성을 제시한다. 옻과 난각, 자개 등의 재료를 통해 재탄생한 화조도와 민화 등이 백미다.
마지막 섹션인 ‘물속의 달’에는 물질과 정신, 실재와 비실재의 경계를 초월하는 작품들이 전시된다. 상(相)에 대한 집착을 떠나 옻의 물성이 성파의 수행과 철학을 만나 조형 언어로 승화되는 과정을 감상할 수 있다.
내달 10일 오후 1시 30분에는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4층 컨퍼런스홀에서 ‘성파의 예술 세계’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개최된다. 심은록(미술평론가), 이동국(경기도박물관장), 이영준(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이인범(미술평론가), 정종미(한국화가, 전 고려대학교 교수), 마엘 벨렉 Mael Bellec(세르누치미술관 큐레이터), 버지니아 문 Virginia Moon(LA카운티미술관 큐레이터) 등이 참여해 성파의 예술관을 논하는 자리다.
아울러, 전시 기간 중 한가람디자인미술관 로비 내 특별 마련된 다도 공간에서 다도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네이버 예약으로 선착순 운영되며 추후 홈페이지를 통해 공지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