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 유니버설발레단의 ‘라 바야데르’-숨져간 사원의 무희, 그들의 초혼제
[이근수의 무용평론] 유니버설발레단의 ‘라 바야데르’-숨져간 사원의 무희, 그들의 초혼제
  •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한국회계학회 명예회장
  • 승인 2024.10.09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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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한국회계학회 명예회장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한국회계학회 명예회장

유니버설발레 창단 15주년 기념을 위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라 바야데르(La Bayadere,1999.11,3~7)’가 올해 창단 40주년을 기념하는 마지막 작품으로 오페라극장(예술의 전당) 무대에 다시 올랐다.(2024.9.27~9.29)’ 마리우스 프티파 안무와 루드비히 밍쿠스 음악으로 페테르부르그 마린스키극장에서 초연한(1877) 원작을 당시 유니버설발레의 예술감독이던 올레그 비노그라도프가 연출한 3막 4장, 130분의 대작이다. 초연을 본 후 썼던 리뷰에서 ‘라 바야데르의 진주’로 묘사했던 문훈숙은 이제 발레단 모두를 이끌면서 공연 해설자로 무대에 섰다. 

‘라 바야데르’는 장대한 무대와 극적인 드라마 전개로도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의 백미는 매력적인 춤에 있다. 두 개의 솔로와 두 개의 파드되, 백색의 군무를 비롯하여 황금신상, 인디언춤, 북춤, 앵무새춤, 그밖에도 막판 3개의 솔로 등 다양한 구성을 자랑한다. 배신당한 슬픔과 절망 속에서 춤추는 니키아의 시정 넘치는 솔로(2막)와 폐허가 된 신전을 내려오면서 32명의 청순한 정령들이 연속해서 보여주는 심플하면서도 얼음처럼 깨끗한 백색 발레(3막)는 라 바야데르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고 이와 함께 니키아와 솔로르의 2인무(1막1장, 3막), 감자티 공주의 솔로(1막2장) 등이 영감의 무대를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25년 전, 니키아의 솔로 춤을 보고 나는 이렇게 썼다. 
“변심한 애인 솔로르와 감자티공주의 결혼식장에 불려 나와 축하의 춤을 추게 된 니키아는 비탄과 절망 속에서 온몸을 던져 슬픔의 춤을 춘다. 그녀에게 보내온 꽃바구니가 애인으로부터 보내온 위로의 선물이라고 착각한 그녀의 춤이 비탄에서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 꽃바구니 속에 숨겨진 독사는 그 여린 손끝을 물어뜯고 순간적으로 느낀 배신감 때문에 그녀는 절망한다. 비탄과 환희, 배신감으로 이어지는 순간적인 감정의 곡예를 절묘하게 풀어가면서 푸른 달빛 조명 아래 펼쳐지는 문훈숙의 춤은 소리 없는 흐느낌이며 지상의 모든 썩어가는 것들을 초월한 천상의 음악처럼 객석으로 울려왔다.”(1999. 12, 춤과 사람들) 

어떤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주역이 문훈숙에서 강미선(9월27일)으로 바뀌었지만 니키아의 춤이 주는 감동은 여전했다. 2023년 브누아 드 라당스 최우수 여성무용가로 선정된 유니버설발레의 프리마돈나인 ‘강미선’은 공연 첫날, 솔로르 역의 수석무용수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감자티 공주역의 ‘이유림’과 호흡을 맞추면서 그녀 최고의 인생 춤을 보여주었다. 1막에서 보여준 솔로르 와의 2인무가 사랑의 환희와 장미빛 미래를 예고하는 희망의 춤이었다면 자신을 배신하고 감자티 공주와 나란히 앉은 연인 앞에서 춤춘 2막의 솔로는 원망과 비관, 회한과 염원을 뒤섞으며 일말의 미련과 기대가 절망 가운데 복합적으로 녹아든 춤이었다. 니키아의 적수로 감자티 공주를 춤추는 이유림은 유니버설발레가 공들이고 있는 신예 솔리스트다. 니키아를 밀어내고 솔로르와의 결혼을 쟁취한 그녀의 춤은 발랄하면서도 오만하다. 금수저 공주로 태어나 거리낌 없이 자라난 가벼움과 밝은 에너지가 넘친다. 마지막 날 공연에서 니키아 역을 맡는 그녀가 어떤 변신을 보여줄지, 황혜민 손유희 등 프리마들이 떠나간 자리가 어떻게 채워질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32명의 발레 블랑-서양판 초혼제가 보여준 고전판 미니멀리즘의 미학

3막을 구성하는 흰색의 군무가 ‘라 바야데르’의 클라이맥스다. 하얀 클래식 튀튀를 똑같이 차려입은 32명의 발레리나가 한 명씩 차례로 폐허가 된 신전 문을 통과하여 긴 언덕길을 돌아 내려온다. 천사가 하강하는듯한 이 반복 동작은 아다지오 음악에 맞춘 아라베스크 펭셰(Arabesques Penchees)다. 가슴을 뒤로 젖히고 두 손을 머리 위로 높게 들어 올리는 변형 아라베스크 테크닉이 끊어질 듯 이어지며 서른두 번이나 반복될 때 고전 판 미니멀리즘의 미학은 그 정점을 찍는다. 니키아를 떠나보낸 후 통렬하게 배신을 후회하는 솔로르 앞에 환영처럼 그녀가 나타난다. 마리우스 프티파가 창조한 서양판 초혼제(招魂祭)라 할 수 있을까. 서로를 연결하는 기다란 스카프 양 끝을 잡고 그들은 이루어질 수 없는 회한의 춤을 춘다. 사랑과 배신, 삶과 죽음, 영혼과 시간에 대한 기억들을 되살려주는 피날레 장면을 지켜보면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이 작품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클래식발레 중 하나”로 평가했던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유니버설발레단 창단 40주년 기념공연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코리아 이모션-정’(2월), 로미오와 줄리엣(5월), 더 발레리나(5월~6월), 라 바야데르(9월), 네 작품을 각각 모던 발레, 드라마 발레, 신고전주의 발레, 정통 클래식발레로 분류할 수 있다. 창단 이후 국내외공연을 통해 쌓아 올린 다양하고 풍부한 레퍼토리가 있기에 가능했던 연간기획이다. 내가 모두 리뷰를 썼던 공연들을 지켜보면서 루비(Ruby)로 상징되는 40주년의 의미가 50주년의 금(Gold)과 60주년의 금강석(Diamond)처럼 더욱 고귀하고 단단한 보석으로 성장해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