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보존가치를 말하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보존가치를 말하다
  • 류화정 기자
  • 승인 2010.03.12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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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의 혼과 얼을 되새기며 세계 속에 민족정신의 위상을 알리는 보고(寶庫)

 올해는 한일 강제병합 100년의 해이다. 우리의 역사 교육이 책의 문장과 문단으로 읽혀지고 있을 때, 이곳은 독립 운동가들의 피와 땀이 서린 채 외로이 증거하고 있었다. 역사 교육이 점점 축소되고 소홀해지는 시점에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역사의 현장이요, 교육의 현장이다. 100주년의 해를 맞아, 독립의 뜻을 차마 이루고 가지 못한 애국지사의 염원과 ‘정신’을 되새겨보자.

한해 평균 55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며 이미 유명 여행 사이트와 잡지에 소개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는 서대문형무소는 1998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개관하면서 올해로 12주년이 됐고, 1908년 형무소로 문을 연지는 102년이 된다.

지금까지 수차례 그 명패가 바뀐 것을 추적하다보면 격변했던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알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역사물이자 건축물이다. 1908년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열어, 일제의 탄압이 가속화 되면서 독립운동이 거세지자,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체포됐다. 수용인원의 증가로 마포 공덕동에 또 다른 감옥소가 생기면서 1912년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후 감옥제도가 형무제도로 바뀌고 1923년 ‘서대문형무소’가 된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대한민국 교도소인 ‘서울형무소’로 그 이름이 바뀌고, 1961년 형무제도가 현대화 되면서 ‘서울교도소’가 된다. 이때부터 현대적인 교정제도가 들어서게 된다. 1967년도부터 미결수들의 구치소 개념의 ‘서울구치소’로 바뀌고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이 되면서 개발논리에 의해 없어질 위기를 맞는다.

당시 독립운동 후손과 서대문 구청이 ‘역사적 교훈’으로 남겨야 한다며 허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들어 반대하면서 지켜낸 것이 현재 남아있는 옥사들이다. 이후 운영에 대해 고민하다가 1992년 서울시에 의해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하게 된다. 시에 의해 내부가 거의 방치 상태로 있자, 서대문구에서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 박물관으로 사용하면서 지금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됐다.

현재 원형 복원 사업이 활발히 추진 중으로 중앙사, 12옥사(체험실). 공작사, 한센병사, 순국선열추모비, 사형장과 시구문, 유관순 지하옥사, 담장과 망루 등의 관람으로 구성 돼 있다. 이미 경관은 원형을 회복했고 보완과 청사도 그 작업을 마쳤다.

▲사형장 '통곡의 나무'

▲옥사 안 임시 구금실과 일본 순사(전시물)

 

 

 

 

 

 

 

 

 

 

 

초기 취사장과 격리 운동장이었던 격벽장의 원래 위치를 파악, ‘발견을 위한 발굴이 아닌 발굴을 위한 발견’을 통해 현재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다. 또한 여성 독립 운동가들의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게 될 ‘유관순 지하 옥사’도 내년 복원 계획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옥사 내의 임시구금실과 고문실은 방문객들이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과 전시물로 구성 돼 있으며, 공작사는 항일항쟁 체험 영상을 통해 애국지사의 육성이 담긴 증언을 들을 수 있다. 사형장은 ‘통곡의 나무’에 관한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1923년에 만들어질 당시 두 그루의 나무를 심었는데 밖에 나무는 크고 울창하게 자란 반면 안에 있는 나무는 사형수들의 한이 서려 잘 자라지 못 했다는 속설이다.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억울함을 생각할 때 괜히 전해지는 설만은 아닐 것이다. 이곳은 1988년 사적 제324호로 지정 돼 있어 한 공간, 한 공간이 문화재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대문형무소의 보존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일제의 잔재라 해도 그것 자체가 갖는 존재(存在)보다 당위성(當爲性)을 우선 생각해야 한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이전 되었을 당시, 이곳이 개발의 논리에 의해 허물어지기 시작했던 것도 일제 만행의 현장이자 민족의 치욕의 공간이라는 이유에서 비롯됐다.

이곳의 보존 당위성은 실제 독립운동을 했던 김구, 손병희, 유관순, 안창호, 여윤형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있던 현장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잔재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피로 얼룩진, 말하자면 우리 민족의 성지이자 독립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현장이라고 할 수가 있다. 

▲대형 태극기가 걸린 옥사 벽

이곳을 찾는 방문객 중 약 5~6만이 외국인이다. 일본인의 비율이 가장 높은 편이고 미국, 중국, 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오고 있다. 대략 사이트를 통해 이곳의 기본지식을 알고 오며, 전문 도슨트(3개 국어)에 의해서 현장에서 보다 자세히 배울 수 있다. 외국인들도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의 기상을 느낄 수 있는 곳, 근현대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곳, 형무소 원형이 있는 곳이라며 각국에서 찾아오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자성의 목소리를 갖게 한다.

어떤 이들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를 다녀온 감상을 전하며 ‘잘 해놓았더라’고 비교의 말을 하기도 한다. 아우슈비츠는 감옥소가 아닌 수용소로서 감금과 통제를 위한 시스템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성격과 운영취지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돈해서 하는 말이지만 감옥소든 수용소든 부러워할 문화유산이 아닌 되새기며 교훈으로 삼아야 할 문화유산이라는 점은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나무가 하나도 없잖아요? 원래는 굉장히 많았어요. 92년 독립공원 조성할 때, 경관을 다 버려놓았어요”

관장으로 불리기엔 다소 젊은 듯한 서대문형무소 박경목 관장(40세)이 2008년부터 내년까지 추진하는 가장 큰 사업의 일환은 1930년대를 기점으로 한 당시 원형 복원이다. 이미 재작년부터 2년여에 걸쳐 큰 공사를 마쳐놓은 상태였고 부분적으로 나머지 사업들이 추진 되고 있었다.

곳곳에 행해지고 있는 공사들은 모두 원형 복원을 위한 것으로, 터무니 없는 명목으로 깨고 부수는 공사들과 질적으로 달랐다. 그러니 공사가 지연된다고 하더라도 눈 흘겨 볼 게 아니라 보다 원형에 가까워지는 신중함의 시간이라고 생각해야 옳은 것이다.

“일제가 침략한 사실, 식민지로 운영하면서 대중을 통제하고 감시한 사실, 우리는 교과서에서만 배웠지 눈으로 볼 수 있는 건축물은 거의 없죠. 이곳은 네거티브 문화유산의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일제의 침략 사실을 단적으로 증언하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에요. 뿐만 아니라 방사형 근대식 감옥이 전 세계적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건축적인 의미도 있어요”

박경목 관장은 이곳이 전 세계의 역사문화의 명소로 알려져 전 세계 사람들이 방문하고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자 전 직원의 소명이라고 전했다.

“그 바탕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꼭 알아야 해요. 이곳을 운영하는 것은 과거의 아픈 사실을 알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독립 운동가들이 어떤 일을 했는가를 아는 것이죠. 우리의 기상을 느끼는 장소로서 우리 선조들과 민족의 기상, 독립정신을 배운다는 정신이 바탕이 돼야 해요”

이곳은 문화재라 난방 시설을 할 수 없다. 관람객들도 불편하겠지만 한 번 원형에 손을 대면 복구하기가 힘들다는 점에서 마땅히 불편함은 감수해야 하는 곳이다. 최근 가족 단위의 방문객이 늘고 있는 것에 대해 긍정적이라는 말을 전했다. 전에 아이들이 오면 떠들고 뛰어다녔지만 요즘은 메모하며 적극 참여한다는 것이다.

“현장 보고서를 쓰면서 적극 참여하고 있어요. 메모하는 아이들로 혼잡하다는 민원도 있을 정도로요. 우리 학생들이 그런 부분에서는 의식이 성장한 것 같아요”

한편으론 너무 개방적이고 밝은 모습에 대해 어른들이 언짢은 내색을 하기도 한단다.

“일단 밝은 마음으로, 많은 분들이 올 수 있게 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예요. 어린 아이들 같은 경우는 우리가 일본에게 침략을 당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만 느껴도 만족해요. 그럼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아이들은 그런 걸 느끼고 돌아가요. 어른들 경우에는 옛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죠. 그것만 느껴도 박물관 운영을 하는 것에 대해 성공적이라고 생각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오기를 바라죠”

올해 8월이면 전시물들이 전면 교체되면서 새로워진다. 98년 개관이후 지금까지 전시물들이 10년이 넘게 사용됐다. 그동안 전시기법도 발전했고 축적된 자료와 유물들로 새로 채워질 예정이다. 

“전면 리모델링하면서 내원은 당시 원형대로 가되, 보이는 건 원형을 체험할 수 있고 실제 내용면에서는 첨단 기기들을 사용해서 관람객이 보다 더 1930년대로 근접할 수 있도록 전시를 기획하고 있어요”

박경목 관장은 행정 일은 물론 역사 전공자로서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었다.

“아쉬운 게 서대문형무소에 관한 학계 연구가 거의 없어요. 일부 책과 논문은 있지만 거의 시작 단계인데, 신문을 보는 사람 중에 근대 전공자가 있다면 논문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근대사, 일제, 수감된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는 있지만 이곳에 대한 연구는 없어요. 일제가 이곳을 왜 만들고 어떻게 운영했고 어떤 목적으로 시스템화하고 식민통치에는 어떤 영향을 줬는지, 그런 연구는 많이 부족해서 다른 분들도 활발하게 참여해줬으면 좋겠어요”

이제부터라도 서대문형무소에 대한 결과물이 많이 나와서 (이곳이) 대중화될 필요성이 있지 않나 싶다. 우리 마저 외면하는 우리의 역사가 아닌 우리가 바로 알고 바로 볼 때, 독립운동가들의 기상과 얼이 세계 속에 전해져 세계적인 역사물로서도 당위성을 가지게 될 것을 기대해 본다.

서울문화투데이 류화정 기자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