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그립고, 그립고, 그립다
엄마가 그립고, 그립고, 그립다
  • 정지선 기자
  • 승인 2010.03.17 1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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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왜 처음부터 엄마였다고 생각했을까”

작가 신경숙의 공전 히트작,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연극으로 제작해 공연한 지 한 달 하고도 보름을 넘기고 있는 이 시점에도 관객들은 여전히 <엄마를 부탁해>를 찾고 있다. 연일 매진 사례를 기록하고 있는 연극 <엄마를 부탁해>의 매력은 누가 뭐래도 소재의 힘, 바로 ‘엄마’다.

사진에서만큼은 가족들 모두 환하게 웃고 있다.

“엄마” 하고 허공에 부르면 왠지 목구멍으로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누구에게나 엄마는 늘 곁에 있어 소중함을 잊고 지내는 존재다. 문제는 엄마의 부재로부터 시작된다. 특히, 전혀 엄마의 부재에 대해 생각지도 못한 시점의 발생하는 문제 말이다.

엄마를 잃어버렸다?

회색빛이 감도는 무대, 지하철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내린다. 극은 박소녀 여사, 즉 엄마를 서울역에서 잃어버리고 가족들이 전단지를 만들어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무릎을 ‘탁’하고 치게 만드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극을 시작한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엄마를 찾아주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액수의 사례금을 제시해야 적당한 것인지에 대한 가족들의 대화는 이렇다.

얼마를 적을까? 백만원?
그건 너무 적어. 삼백만원?
그것도 적은 것 같은데? 그럼 오백만원?

엄마를 잃어버리고 할 수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가족들.

참 씁쓸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가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례금을 제시하겠으니 연락 달라는 전단지를 만들어 행인들에게 나눠주는 일과 사례금에 눈이 멀어 걸려오는 전화를 반신반의하며 찾아다니는 일, 그것도 아니면 엄마가 집 찾아 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일 뿐이다. 엄마를 잃어버린 일에 대해 서로 자신의 탓이 아니라며 으르렁대는 일 역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장남과 엄마 VS 장녀와 엄마

무대가 시골집으로 바뀌면서 극의 흐름도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족들이 저마다 기억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참 억척스럽고, 든든했다. 얼굴도 서로 보지 못한 채 결혼해 정도 없이 살던 엄마에게 장남은 남편과 같은 존재였다. 다 싫다며 집도 버리고 나선 엄마를 돌아오게 한 사람 역시 장남이 아닌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잘생겼다며 자랑스러워하던 아들은 엄마의 넘치는 사랑으로 행복했던 만큼 부담스럽기도 했다. “네가 잘돼야 동생들도 잘되는 것”이라며, 그의 어깨에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운 것도 사실이니까. 그게 못내 미안해 “애미 걱정은 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엄마의 모습이 비단 극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기에 더욱 마음이 쓰였다.

돌아서기 무섭게 후회할 말을 내뱉는 큰 딸과 못내 서운한 엄마.

엄마는 까막눈이었다. 평생을 깜깜하게 산 자신의 삶이 원망스러워 딸만큼은 절대 그렇게 키우지 않겠다는 엄마는 결국 딸을 작가로 만들었다.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큰 오빠와 더부살이를 하며 힘겹게 된 작가의 생활을 엄마는 자랑스러워하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손수 기른 곡식들과 담근 고추장을 비롯해 건강식까지 챙기는 엄마에게 말하는 순간 후회하면서도 서운한 말을 내뱉는 큰 딸. 엄마는 큰 딸에게 언젠가 가장 작은 나라에 가거든 장미묵주를 사달라는 부탁을 한다. 알고 보니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엄마는 왜 장미묵주를 사달라고 했을까. 혹시 자신을 언제까지나 기억해달라는 메시지를 남긴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존재 역시 언제, 어디서나 머물고 있으니 말이다. 물리적으로 옆에 있는 순간에도 혹은 아닌 순간까지도.

발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극 대사 중에 큰 딸이 말하길, “엄마도 나처럼 어렸을 적이 있었을까” 했더니 엄마가 말한다. “그럼. 그렇고말고. 엄마는 그런 시절이 없었을까봐” 다시 딸이 말하길, “나는 엄마는 그냥 처음부터 엄마인 것 같아서, 그냥 그랬던 것 같아서요.”

엄마의 부재를 통해서야 엄마의 존재를 느낀다. 내가 그렇고, 우리가 그렇고, 세상의 모든 자식들이 그렇다. 사는 게 무에 그리 바쁜지 한 달에 한 번 안부전화를 드리기가 어려운 이 시대의 못난 자식들. 먼저 전화해도 될 것을 혹시라도 자식들 걱정 할까봐 그게 더 걱정이라 수화기를 들었다 놓기를 수차례 반복하는 이 시대의 외로운 엄마들. “못났어도 내 새끼가 젤이여”하며, 투박하고 거친 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는 엄마. 당신들이 있어 못난 우리는 그래도 꿋꿋하게 살아감을 잊지 마시라.

서울문화투데이 정지선 기자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