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의 벽을 넘은 진정한 자유인, 윤정 윤이상평화재단이사
이념의 벽을 넘은 진정한 자유인, 윤정 윤이상평화재단이사
  • 인터뷰-이은영 발행인 ,김충남 경남본부장
  • 승인 2010.03.22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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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55년만에 살아서 고향인 통영에 오신것입니다.'

도천테마파크(윤이상 기념관) 개관식과 2010 통영국제음악제 개막식이 열리는 지난 3월 19일 이날 윤 정(윤이상평화재단)이사는 어릴 적 아버지와 딸이 왈츠를 추는 소녀같은 생기가 넘쳐 흘렸다. 음율에 맞춘듯 한층 더 발랄하고 활기 넘치는 환한 미소를 머금은 오늘의 윤이상 딸,주인공이었다. 밝아오는 여명처럼 심술궂던 날씨는 사라지고 봄 향기 가득한 따사로운 햇빛이 그녀를 인터뷰 내내 비췄다. 이 날은 윤이상 선생은 물론 그의 유일 한 딸 윤 정 이사에게 있어서도 그간의 질곡의 삶에 마침표를 찍는 자리였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질문은 이제 더 이상 할 필요도 없고,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얘기는 묻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당연한 배려이고 예의라 생각했다. 정치적으로 더 이상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그곳에 운집한 많은 이들의 바람처럼 전 세계가 추앙하는 음악가로서 윤이상을 평가하고 거장의 딸로서 윤 정 이사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윤이상 선생의 음악에 대해, 고결한 정신에 대해 그가 남긴 유품의 내력과 예술의 혼을 유가족인 딸로부터 전해듣는 진솔한 자리였다. 인터뷰 내내 그녀는 윤이상 왕국의 공주처럼 우아했고 겸손하고 조심스럽지만 당당한 기품이있었다. 여전히 윤이상 선생은 살아있고 오늘의 통영국제음악제를 이끌어가는 근간이자 힘인 것이다. 그 누구도 들어가기 힘든 북한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인 그녀는 한 때는 '부자유인'으로서 고통의 세월을 지나왔지만 이제는 이념의 벽을 뛰어넘어 나비처럼 훨훨 나는 세계의 자유인으로서 거듭났다.

 

윤이상 예술 혼 담긴 유품 보전에 최선 다할 터

▲ 이제 윤 정 이사는 이념의 벽을 뛰어넘어 세계의 자유인으로서 나비처럼 날고 싶었다.

  -윤이상 테마파크가 문을 열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아버지는 세계를 돌아다니시면서 작곡에만 열중하셨고 아버지가 작고한 후 지난 15년 동안의 결실이 오늘 도천테마파크 개관으로 아버지를 위해 제가 조금이라도 이바지했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 유품은 저에게도 꼭 소중하니깐 하나도 버리지 않고 오늘 여기 통영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개관날이 어떤 표현으로도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특히  통영시에서 기념관을 만들어줘서 고맙죠. 이렇게 많이 찾아와 줘서 시민들에게 제일 고맙고 감사합니다. 보시는 것처럼 학생들이 좋아해요. 문화 프로그램이 음악만 아니라 메모리홀과 야외광장에 연극,춤,전시회등 다양한 문화가 들어와서 공유의 장이 됐으면 좋겠어요. 365일 문화 공간 말입니다. 정일근 시인이 개관식서 낭독한 시처럼 여기는 살아있는 공간이다, 죽지 않고 살아있는 공간이다. 이 분이 하신 이야기대로  앞으로 아버지 유품만 잠깐보고 지나가는 장소가 아닌 살아있는 예술 혼이 담긴  살아있는 문화적인 공간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고, 여기서 다양하게 아이들이 와서 놀 수 있는 여러 문화 행사가 있으면 좋겠어요.

-관장직 제의도 받으신 것으로 아는데 테마파크가 어떻게 운영되길 바라시나요?
 아직은 아니에요. 언제 한번 제의가 들어오면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지금은 뚜렷하게 관장 직함은 아닌거죠. 관장이라서 일을 더하고 관장이 아니라서 일은 더 안하는 게 아니다. 내 힘이 필요하고 내 도움을 줄 수 있으면 만족한다. 향 후 기회가 오면 괜찮은 거지만 제가 죽을 때까지 아버지 유품을 잘 보존하고 조국을 사랑하며 작곡한 예술의 혼을 여러분들에게 널리 이해시키는게 내 운명이에요. 여기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여러 면에서 계속 힘을 보탤 것을 약속합니다.

▲ 윤이상 그가 남긴 유품과 내력과 예술의 혼을 유가족인 딸이 전해주는 진솔한 삶의 대화를 나눴다. 윤정 이사를 안고있는 윤이상 선생의 모습이 뒤로 보인다.

 ◆윤 정 이사, 딸에게 다정다감한 아버지 윤이상 

-전시된 편지 글들을 보면 윤이상 선생님이 가족들에게 자상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로서는 어떠셨는지요?
 아버지는 엄격하셨어요. 하지만 딸이라서 그런지 저는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정말 사랑해 주셨죠. 독일서 어렸을 때 아버지랑 손을 잡고 춤을 췄던 기억, TV에 왈츠,록,디스코 음악이 나올 때 집에서 아버지랑 같이 췄던 그 기억이 납니다. 어느날은 아버지가 웃으시라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드렸는데 웃지 않으셨어요. 아버지가 별로 재미없어 보이시기에 오히려 물었죠? 딸이 아버지 웃겨 드리려고 한말인데 재미없으신가봐?(웃음) 그럼 아버지가 대답하곤 했죠 '정아 내가 웃어야 되는 거야?'하고 아버지가 웃으셨죠. 그리고 아버지의 훈육은 엄격하셨어요. 절대 매는 드시지 않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정아 이야기좀 하자' 고 말씀하셨죠. 아버지 말씀을 듣다 보면 절대 아버지를 못 이겨요. 대화로써 제가 잘못했구나 느끼게 만드셨죠. 지금 생각하면 딸에 대한 애정으로 참 잘하셨다고 생각이 드는데. 그때는 어린 마음에 차라리 한 대 맞는 것이 낫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그 시간이 너무 고역이었거든요(웃음).

 또 하나는 힘들고 슬플 때 글을 써보라고 하셨어요. '정아, 힘들거나 슬플 때 글을 써봐라 정아' 이렇게 말씀하셨죠. 14살 독일에 처음 왔을때 아버지한테만 글을 보여준 적이 있어요 작곡도 해서 아버지께 보여드렸고요. 아버지가 제가 쓴걸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모습이 생생해요.

▲ 윤이상 선생 실물에 흡사한 흉상과 그 옆에 선 윤 정 이사.
 -선생님은 작곡하실 때 특별한 습관이 있으셨는지요? 어릴 때 바라본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합니다.
 아버지는 작곡을 집에서만 했어요. 일정하게 규칙적으로 작곡을 하신거죠. 아침부터 점심까지 작곡에 몰두하시고, 점심 드시고 오침도 주무시고 오후에 또 작곡하시며 규칙적으로 했어요. 미리 머리와 마음속으로 구상하시고 난 후 오선지에 받아쓰는 방법으로 작곡을 하셨어요. 아버지가 바쁘시고 작곡과 연주를 계속하시니깐, 어릴 땐 힘들었죠. 마음 놓고 소리도 못 지르고 자유롭게 다니지 못했고요.  아버지한테 이런 투정도 부렸죠. 아버지가 건물관리인이었으면 좋겠다구요. 독일에서 제가 학교다닐때  건물관리인을 하는 아버지를 둔 독일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어요. 그 친구 가족은 주말마다 공원에 놀러 다니고 쇼핑도 하러다니니 우리아버지도 그랬으면 하는 바램이 컸었나봐요. 하지만 어느 날 아버지가 얼마나 인간적이고 훌륭한 아버지인지. 제가 얼마나 행복하고 축복받았는가 다시 생각하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죠. 정말 훌륭한 분이셨어요. 

 가족간 사랑이 담긴 유품에 애착 

-윤 정 이사가 가장 애착 가는 유품은?

▲ 윤이상 선생님이 조국을 사랑한 증표이자 정체성을 잃지 않게 만들어준 생전에 항상 가지고 다녔던 태극기와 어머님이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 선물한 생일 선물 시계(가운데,시계가 4시 30분을 가르키고 있다. 윤이상 선생님이 돌아가신 시간에 멈춰진 것.)

 아버지의 시계. 아버지 작곡하던 서재를 그대로 재현한 곳 통영항 사진 앞에 보이는 둥근 도금시계가 있어요. 저의 어머님이 젊었을 때 드린 아버지 생일 선물이었어요.
그냥 생일선물이 아니죠. 가정주부였던 어머니는 수입이 없었지만 일 년 내내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서 큰맘 먹고 생일 선물로 그 시계를 선물했어요. 물론 다른 시계도 있었지만 왜 유독 소중하냐면 아버님이 아프시면서부터 어머니가 사주신 시계를 찾았어요. 그 때부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그 시계만 차고 다니셨어요. 그래서 참 많이 가슴으로 다가오는 유품이죠.

 또 하나, 아버지 책상위에 램프는 제가 사랑하는 램프에요. 솔직히 내놓을까말까 망설였습니다.(활짝 웃으며) 왜냐하면 아버지가 몇 십 년 동안 그 램프 아래서 작곡을 하셨기 때문이에요. 오래됐으니 엔틱이고 형태가 멋있잖아요.

▲ 도천테마파크내 전시된 윤이상 전신동상(통영 출신 심문섭 조각가 작품)
-윤이상 선생님은 태극기를 고이 접어서 가지고 계셨는데? 보관도 양호하다. 아버지인 윤이상 선생이 가장 아끼는 유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열쇠고리에 고이 접어 매일 지니고 다니셨던 태극기 유품은, 태극기 그 자체는 정체성을 잊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조국을 정말 사랑한 표상이죠.
요즘 아이들은 10년만 외국에 살아도 모국어를 잘 모르는데 독일에서 40여 년 살면(1956년부터 95년 작고 할때까지)서, 지난 40여 년 동안 한국에 잠시 있을 때 외국에서 살았으면서 한시도 한국을 안 잊어버리고 하루 종일 한국 뉴스 보시고 라디오 매일 들으시고 그리워하고 사랑한 조국이죠.
한번은 그 당시에 아버지께 제가 야단을 크게 맞은 적 있어요. 이유는 제가 한국 신문을 안 읽는다고 혼을 내셨죠. 근데 어린 나이 13살에 독일에 가서 외국인인줄 착각할 정도로 거기 문화에 둘려 쌓여있었죠. 아버지가 그 때 정말 섭섭하셨나봐요. 요사이는 제가 얼마나 신문을 자주 보는데요(웃음)
이후로 외국 나가도 아버지 살아계실때 한국 방송과 뉴스만 봤습니다. 지금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면, '우리 딸 정아 정말 장하고 괜찮구나' 생각하실거에요.

 아버지, 음악에 대한 숭고한 뜻을 이어받다.

 -자식으로서 아버지와 가장 닮은 점은 어떤 것일까요?

▲ 윤 정 이사의 고모이자 윤이상 선생의 막내 여동생인 윤동화 여사. 윤 여사는 윤이상 선생이 가장 좋아한 생선을 독일로 가져가곤 했다.

성격도 많이 닮고,  입맛이 정말 닮았어요
생선을 정말 좋아했어요. 아쿠아리움 수족관에서조차 생선이 나오면 '아버지 아버지~ 생선이다'하고 아버지를 불렀던 기억이 있죠. 그러면 아버지가 가까이 오셔서 같이 보시곤 했어요. 아버지는 생선이라면 다 좋아했어요. 회를 정말 좋아했고요. 특히 병어와 뽈락을 자주 이야기 했어요. 저의 막내 고모가 독일에 오실 때마다 얼음박스에 생선만 가져왔던 기억이 있어요. 또 집중력도 아버지와 많이 닮았어요. 어떤 거에 몰입하면 아픈 것도 잊고 식사 시간도 건널 뛸 정도로 집중하거든요.

 -윤 이사의 어렸을 적 꿈은 뭐였는지 궁금하다. 
 독일서 음대를 다녔죠. 음악,연극,그림,보석공예등 예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보석공예는 특히 독일 스승도 있었죠.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후 아버지가 남긴 음악 예술의 혼을 전해야 될 사람이 꼭 필요한데 혼자서 고민 고민을 하다가 결정을 내렸죠.
아버지랑 저랑 감히 그 무게의 깊이를 재어 봤는데, 제가 하고 싶은 일은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고 그런 게 아니니깐 제 꿈은 나이가 많아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제가 젊고 아버지가 저를 필요로 할때 아버지일을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제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움직일 동력이 충분하다 됐을 때 아버지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간 보람은 있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후회되는 건, 아버지 살아 생전에 힘들고 아프실 때 왜 내가 더 일찍 아버지를 도와주지 못했을까.  좀 더 일찍 결정하고 도와드렸다면 얼마나 아버지가 더 좋아했을 겁니다. 아버지 작고하시고 지난 15년간 아버지 일을 하다보니깐 알게 되고 느끼게 되네요.

 오늘까지 힘든 길을 잘 오셨는데 앞으로도 더  잘 하실 수 있겠죠?
오늘처럼 기쁜날 서울문화투데이와 인터뷰를 해서 한결 더 기분이 좋아요. 드러내기에는 어려웠던 부분이 분명히 있었죠. 저는 인터뷰를 절대 안했었죠. 서울문화투데이 독자들에게도 도천테마파크의 예술 혼이 잘 전달됐으면 해요.

▲ 윤정 이사(윤이상평화재단,윤이상 선생의 딸)는 도천테마파크 개관식날 질곡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듯 그날의 주인공답게 생기있고 활력이 넘친 거장의 딸이었다.

 인터뷰 이은영 발행인, 김충남 경남본부장, 촬영/정리 홍경찬 기자 cnk@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