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의 민족혼을 그려내는 최예태 화백
통찰의 민족혼을 그려내는 최예태 화백
  • 류화정 기자
  • 승인 2010.03.23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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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자연에 대한 애정, 열정과 새로움으로 태어나다

화업 50년, 최예태 화백이 반겨주는 작업실에서는 오래된 시간의 정적보다는 넘쳐흐르는 생기와 역동성이 전해졌다. 그의 그림은 화실 안에 큰 유리창으로 세계의 기운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노숙한 화백은 익숙한 듯 예쁜 찻잔에 커피를 내왔다. 잔에 담긴 너무나도 이국적인 그림과 화실에서 흘러나오는 샹송은 이 공간을 더욱 독특하게 구성했고, 익숙한 서울 마저 낯선 도시로 만들었다.

◈한국 정물화를 구축하다

최예태 화백. 그가 한국 미술계에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남겼는가에 대한 일련의 과정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국전 4회 수상’의 주인공, 그에게 당시 기분과 상황에 대해 물었다.

“그때는 주로 인물을 모델로 했는데, 상당히 애를 먹이더라고요. 속이 상했죠. 애 안 먹이는 소재를 찾다보니 정물이 됐어요.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배열해서 그것을 꿰뚫기 시작했죠. 교편생활을 시작하면서 미술실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했어요”

그는 당시 국전에서 연 4회 특선을 수상했다. 수상작으로는 76년 <향수의 상징>과 77년 <가보>, 78년 <상고>, 79년 <수 longevity>이다. <향수의 상징>은 해바라기, 복숭아, 포도, 도자기를, <가보>는 우리 옛 무인의 의상, 칼, 투구, 영정을, <상고>는 기물, 과일을,  <수 longevity>는 꿩, 전통그릇 등을 그렸다. 수상작들은 모두 ‘한국적 정물화의 전형’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정물은 “깊이 파고 들어갈 수 있었다”는 그의 고백처럼, 단순한 사실의 재현이 아닌 움직이지 않는 정물을 통해, 꿰뚫어봐야 보이는 깊이의 발견이다. 그 시절 화가들 사이에서 오가던 ‘최예태식 정물화’라는 표현은 통찰을 통한 민족의 혼과 얼을 느낄 수 있는 정물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를 모방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연 4회 정물을 그려 국전에서 수상한 그를 보면서 ‘정물을 그리면 국전 수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해프닝을 만들기도 했다고. 단순한 사실과 단순하지 않은 진실의 차이가 낙선과 특선을 가르는 기준이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던 걸까.

그가 그린 정물들의 표현은 대부분 일상의 범주에 속한 소재들이었고, 그것은 대자연(大自然)도 가리지 않는다.

“화단에 데뷔한 후에 그것만 계속 할 수는 없었어요. 자연은 누구나 다 하는 것이고, 현지 사생도 많이 다니다보니까 산을 그리게 됐죠. 멀리 외국 산도 다녀봤지만 제일 와 닿는 것은 우리 서울 가까이 위치한 도봉산이었어요. 백운대 인수봉을 특히 좋아하게 됐어요. 아무리 봐도 그렇게 드라마틱한 조형물은 자연 밖에 없어요. 구도가 정말 신비로워요. 정말 완벽한 신의 조형물이죠”

최근까지도 주력해 그리는 작품이 ‘산’이다. 그 중에서도 붉은 산을 제일 많이 그렸는데, 그만큼 수용자가 원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처음 붉은 산을 그렸을 당시를 회상하며 “알라스카에 갔었을 당시 석양 때문에 산이 다르게 보였어요. ‘바로 저거다’라고 속으로 외쳤죠. 스케치 해 작품을 해봤더니, 한 의사가 제일 먼저 샀어요. 그때부터 막 그리기 시작했죠. 뭔가 극적인 감동이 오는가 봐요”

산이 가진 파격적인 색들은 자연 뿐만 아니라 자연이라고 할 수 있는 인체(人體)를 대상으로도 행해졌다. 그의 작품 속 여인들이 ‘블루’라는 점에서 그렇다.

“고유색을 거부하고 감상에서 요구되는 빛을 찾으면서 ‘신비로운 색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청동기에서 얻어진 빛을 생각했어요. 청동기의 고색창연한 빛을 여체로 쓰면 어떨까하다가 내놨더니 작품에 대한 반응이 좋았어요.”

본래 가지고 있던 고유색을 탈피하고자하는 그의 모습은 자연이나 인체를 그리는 방식이 재현방식에 머무르지 않는 재창조와 재생산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의 감흥이 충실하게 스며든 강렬한 빛깔은 기존 미술계가 시도하지 못한 과감성과 고유의 방식을 탈피한 것에서 획득한 창조성이다. 미술사학 우도 쿨터만은 ‘예술적 천재에 의해서만 과거가 새롭게 보인다’고 말했다. 그가 재현한 화업 50년의 그림들이 보여주는 방식도 그 새로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업 50년의 세월

전북 김제의 4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화가가 되겠단 꿈은 꾸지 않았어요. 그냥 좋으니까 했는데 칭찬 받으니까, 그게 재밌었죠”

좋아하는 것을 잘 할 수 있었던 것이 최 화백의 운명이 아니었을까. 그가 미대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는 집안에선 반대가 상당했다고 했다. ‘집안에 이런 놈이 없었는데, 이런 놈이 나왔다’며 빨래 장대가지고 형님이 쫓아다닐 정도였다고. 지금 미술계에서 그의 위치를 생각하면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을 정도다. 집안의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했던 그림,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다시 태어나도 내 천직은 이거예요. 딴 거 아무것도 부러운 게 없어요. 작품만 좋은 거 나오면 행복하고요. 아픔이 많고 고통이 많지만 뜻 한 바 이상으로 나타날 때는 엄청난 보람을 느끼죠. 그게 창작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가장 애착이 가는 게 있다면 ‘천호짜리 대작’ 이라고 했다.

“예술의 전당 회고전이었는데, 당시 대작이었죠. 집에서 몇 개월 동안 작업 한 거였는데, 무척 감동적이었어요”

사다리를 타고 올라서 그릴 때 스릴이 넘친다고 말하는 모습이 처음 그림을 시작한 사람의 마음처럼 설레어 보였다.

화백은 작년까지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후진양성에도 평생을 바쳐왔다. 천직으로 알고 중고등학교에서 대학, 대학원 강의까지 한 그이지만 가르치는 일을 해온 그이지만 “그래도 내 작품을 할 때 제일 행복하다”는 그는 정녕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계속 그림을 그리겠지만, 한민족으로 태어나서 민족정서가 묻어나는 그림을 그려야 되지 않을까 싶어 연구와 자료 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최 화백은 작년 문학미디어작가회의의 신인상을 수상하며, 수필가로도 등단했다. 그는 후배들에게 작업하는 과정이나 필요한 것을 기록해서 남겨주기 위해 오늘도 글 쓰는 일을 쉬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

그에겐 올 한해 숙원사업이 하나 있다. 단체다운 단체를 하나 만드는 것이다.

“카마(KAMA,한국현대미술가협회)대표를 맡으면서 얼마 전 발기인 대회도 열었어요. ‘한국현대작가회’를 제대로 운영해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게 가장 큰 바람이랍니다.”

지금까지 천 여작품이 넘는 열정적인 작업을 해 오고 있는 그는 현재 서울문화투데이에 ‘최예태의 그림에세이’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이에 대해 특별히 한 말씀을 부탁드렸다.

“그림을 많이 보고 감상하면서 구체적으로 분석해보세요. 그렇게 감상하다보면 분명 좋은 미래가 기대될 겁니다. 예술이라는 건 카타르시스니까요. 앞으로 만나게 될 제 작품 많이 사랑해주시고 관심 가져주세요.”

최예태 화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의 타고난 열정과 새로움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간 화백이 그렸을 그림들이 작업실 널따란 유리창처럼 파노라마로 그려진다.  그의 그림들은 모두 똑같이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그의 넘치는 사랑 속에서 재해석된 새로운 생명을 우리는 오랜 시간 깊이 생각하고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 /정리 류화정 기자 press@sctoday.co.kr

약력

- 국전 추천작가, 동 초대작가 지정
- 대한민국 미술대전심사위원, 동 운영위원장 피임
- 96회화제 대표
- 프랑스 싸롱도똔느전 초대작가,
- 한중국제미술교류전 단장,
- 아세아 현대여성미술대제전 운영위원장,
- 대한민국 96회화제 대표,
- 미술과비평 아트페어 대회장
- 2007 마니프 한국구상대제전 조직위원장
- 중앙대 원광대 예원예술대 대학원 강의
- 현재 국가 보훈문화예술협회 상임고문
- KAMA 한국현대미술가협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