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의 벽을 넘은 진정한 자유인, 윤정 윤이상평화재단이사
이념의 벽을 넘은 진정한 자유인, 윤정 윤이상평화재단이사
  • 인터뷰-이은영 발행인, 김충남 경남본부장
  • 승인 2010.03.25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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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55년 만에 살아서 고향인 통영에 오신 것입니다."

도천테마파크(윤이상 기념관) 개관식과 ‘2010 통영국제음악제’ 개막식이 열리는 지난 3월 19일, 윤정(윤이상평화재단)이사는 아버지와 왈츠를 추는 어린소녀 같은 생기가 넘쳐 흘렸다. 심술궂던 날씨는 사라지고 봄 향기 가득한 따사로운 햇빛이 그녀를 인터뷰 내내 비췄다. 이 날은 윤이상 선생은 물론 그의 유일한 딸 윤정 이사에게 있어서도 그간 질곡의 삶에 마침표를 찍는 자리였다. 더불어 윤이상 선생의 음악에 대해, 고결한 정신에 대해, 그가 남긴 유품의 내력과 예술의 혼에 대해 유가족인 딸로부터 전해 듣는 진솔한 자리였다. 인터뷰 내내 그녀는 윤이상 왕국의 공주처럼 우아하며 조신했고 당당했다. 그 누구도 들어가기 힘든 북한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그녀는 한 때 '부자유인'으로서 고통의 세월을 지내왔다. 허나 이제는 이념의 벽을 뛰어넘어 나비처럼 훨훨 나는 세계의 자유인으로서 거듭났다.

윤이상 예술 혼 담긴 유품 보전에 최선 다할 터  

윤이상 테마파크가 문을 열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세계를 돌아다니시면서 작곡에만 열중하셨던 아버지를 위해 제가 조금이라도 이바지 했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에게도 매우 소중한 아버지 유품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여기 통영까지 왔습니다. 개관날인 오늘 어떤 표현으로도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특히 기념관을 만들어준 통영시에도 감사하고요. 무엇보다 많이 찾아와주신 시민들께 가장 고맙고 감사합니다. 앞으로 메모리홀 및 야외광장에 음악뿐만 아니라 연극, 춤, 전시회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들이 들어와 365일 쉬지 않는 문화공유의 장이 됐으면 좋겠어요. 정일근 시인이 개관식에서 낭독한 시처럼 여기는 살아있는 공간이에요. 말 그대로 아버지 유품만 잠깐보고 지나가는 장소가 아닌 살아있는 예술혼이 담긴 문화 공간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관장직 제의도 받으신 것으로 압니다. 테마파크가 어떻게 운영되길 바라시는지.

“아직 받은 적은 없어요. 언젠가 제의가 들어오면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관장이라서 일을 더하고 관장이 아니라서 일을 더 하는 게 아니라, 내 힘이 필요하고 내 도움을 줄 수 있으면 만족해요. 향후 기회가 오면 괜찮은 거겠지만 제가 죽을 때까지 아버지 유품을 잘 보존하면서 조국을 사랑하며 작곡한 예술의 혼을 여러분들에게 널리 이해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여기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여러 면에서 계속 힘을 보탤 것을 약속합니다”

다정다감했던 아버지, 윤이상

전시된 편지 글들을 보면 윤이상 선생님이 가족들에게 자상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로서는 어떠셨나요.

“아버지는 엄격하셨어요. 하지만 딸이라서 그런지 저는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정말 사랑해 주셨죠. 독일에 있었던 어린 시절, TV에 왈츠, 록, 디스코 음악이 나올 때면 아버지랑 같이 손을 잡고 춤을 췄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날은 제가 아버지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드렸는데 웃지 않으셨어요. 아버지가 별로 재미없어 보이시기에 오히려 물었죠. ‘딸이 아버지 웃겨 드리려고 한말인데 재미없으신가봐?’라고(웃음). 그럼 아버지께선 '내가 웃어야 되는 거야?'라고 대답하시며 웃으셨죠.

아버지의 훈육은 엄격하셨어요. 절대 매는 드시지 않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정아 이야기 좀 하자' 고 하셨죠. 아버지 말씀을 듣다 보면 절대 아버지를 못 이겨요. 대화를 하다보면 ‘내가 잘못했구나’를 느끼게 만드셨죠. 지금 생각하면 딸에 대한 애정으로 참 잘하셨다고 생각이 드는데. 그때는 어린 마음에 ‘차라리 한 대 맞는 것이 낫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그 시간이 너무 고역이었거든요(웃음).

힘들거나 슬플 때는 글을 써보라고 하셨어요. 14살 독일에 처음 왔을 때 아버지한테만 글을 보여준 적이 있어요. 작곡도 해서 아버지께 보여드렸고요. 아버지께서 제가 쓴 걸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선생님은 작곡 시 특별한 습관이 있으셨는지.

“아버지는 작곡을 집에서만 했어요. 일정하게 규칙적으로 작곡을 하신 거죠. 아침부터 점심까지 작곡에 몰두하시고, 점심 드시고 오침도 주무시고 오후에 또 작곡하시며 규칙적으로 했어요. 미리 머리와 마음속으로 구상하시고 난 후 오선지에 받아쓰는 방법으로 작곡을 하셨어요”

어릴 때 바라본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윤이상 선생의 여동생 윤동화 여사(왼쪽)와 함께
“아버지가 바쁘시고 작곡과 연주를 계속하시니깐, 어릴 땐 힘들었죠. 마음 놓고 소리도 못 지르고 자유롭게 다니지도 못했고요. 아버지한테 ‘아버지가 건물관리인이었으면 좋겠다’고 투정도 부렸었죠. 독일에서 제가 학교 다닐 때 건물관리인을 하는 아버지를 둔 독일 친구가 있었는데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그 친구 가족은 주말마다 공원에 놀러 다니고 쇼핑도 하러다니니 우리아버지도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 컸었나 봐요. 하지만 아버지가 얼마나 인간적이고 훌륭한 아버지인지. 제가 얼마나 행복하고 축복 받았는가 다시 생각하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어요. 정말 훌륭한 분이셨어요”

가족 간 사랑이 담긴 유품에 애착

가장 애착이 가는 유품은 어떤 걸까요.

“아버지의 시계에요. 저의 어머님이 젊었을 때 아버지 생일 선물로 드린 시계에요. 가정주부였던 어머니는 수입이 없었지만 일 년 내내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서 큰맘 먹고 생일 선물로 그 시계를 선물하셨어요. 물론 다른 시계도 있지만 유독 이 시계가 소중한 이유가 있어요. 아버님이 아프시면서 부터 어머니가 사주신 시계를 찾으시고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그 시계만 차고 다니셨거든요. 그래서 참 많이 가슴으로 다가오는 유품이죠.

또 하나, 아버지 책상위의 램프는 제가 사랑하는 램프에요. 솔직히 내놓을까말까 망설였습니다.(활짝 웃으며) 왜냐하면 아버지가 몇 십 년 동안 그 램프 아래서 작곡을 하셨기 때문이에요. 오래됐으니 엔틱이고 형태가 멋있잖아요”

윤이상 선생님은 태극기를 고이 접어서 가지고 계셨습니다. 보관도 양호합니다. 아버지인 윤이상 선생이 가장 아끼는 유품이라고 할 수 있을지.

“열쇠고리에 고이 접어 매일 지니고 다니셨던 태극기 유품은 정체성을 잊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조국을 정말 사랑한 표상이죠. 요즘 아이들은 10년만 외국에 살아도 모국어를 잘 모르잖아요? 그에 비해 아버지께선 독일에서 지난 40여 년을 살면서(1956년부터 95년 작고 할 때) 하루도 빠짐없이 한국 소식을 접하시며 조국을 잊지 않고 사랑하셨죠.

한번은 아버지께 야단을 크게 맞은 적이 있어요. 제가 한국 신문을 안 읽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죠. 13살의 나이에 독일로 거기 문화에 완전히 둘려 쌓여있었죠. 아버지가 그 때 정말 섭섭하셨나 봐요. 요새는 제가 얼마나 신문을 자주 보는데요(웃음).

이후로는 외국 나가도 한국 방송과 뉴스만 봤습니다. 지금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면, '우리 딸 정아 정말 장하고 괜찮구나' 생각하실 거예요”

▲윤이상 선생 흉상과 함께

음악에 대한 숭고한 뜻 이어받다

자식으로서 아버지와 닮은 점이 있으시다면.

“성격도 많이 닮고, 입맛이 정말 닮았어요. 생선을 정말 좋아했어요. 아쿠아리움 수족관에서조차 생선이 나오면 ‘아버지, 아버지, 생선이다’하며 아버지를 불렀던 기억이 있죠. 그러면 아버지가 가까이 오셔서 같이 보시곤 했어요. 아버지는 생선이라면 다 좋아하셨어요. 회를 정말 좋아하셨고요. 특히 병어와 뽈락을 자주 이야기 했어요. 저의 막내 고모가 독일에 오실 때마다 얼음박스에 생선만 가져왔던 기억이나요. 또 집중력도 아버지와 많이 닮았어요. 어떤 거에 몰입하면 아픈 것도 잊고 식사 시간도 건널 뛸 정도로 집중만 하거든요”

윤 이사의 어렸을 적 꿈은 뭐였는지 궁금합니다.

“독일서 음대를 다니면서 음악, 연극, 그림, 보석공예 등 예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특히 보석공예는 독일 스승도 있었죠. 그런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당신이 남기신 음악 예술의 혼을 전해야 될 사람이 꼭 필요했기에 혼자서 고민 고민을 하다가 결정을 내렸죠. 아버지랑 저랑 감히 그 무게의 깊이를 재어 봤는데, 제가 당장하고 싶던 일은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고 그런 게 아니니깐 나중에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내가 아직 젊고 아버지가 나를 필요로 할 때 아버지 일을 해야 겠다’는 마음이 들어 아버지의 일을 시작하게 됐지요.

그간 보람은 있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죠. 그럼에도 더욱 후회되는 건, 아버지 살아생전에 힘들고 아프실 때 왜 내가 좀 더 일찍 아버지를 도와드리지 못했을까하는 거예요. 좀 더 일찍 결정하고 도와드렸다면 얼마나 아버지께서 더 좋아하셨을까요? 아버지께서 작고하시고 지난 15년간 아버지의 일을 하다보니깐 새삼 느끼게 되요”

오늘까지 힘든 길을 잘 오셨습니다. 앞으로도 더 잘하실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오늘처럼 기쁜 날 서울문화투데이와 인터뷰를 해서 한결 더 기분이 좋아요. 드러내기에는 어려웠던 부분들이 있었기에 그동안 인터뷰는 절대 안했었는데 말이죠.(웃음) 서울문화투데이 독자분들에게도 도천테마파크의 예술혼이 잘 전달됐으면 합니다”

인터뷰 이은영 발행인, 김충남 경남본부장  촬영, 정리 홍경찬 기자 cnk@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