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은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였다
안중근은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였다
  • 박기훈 기자
  • 승인 2010.04.07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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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평화론’은 한중일 3국 공존·번양의 열쇠

우리는 안중근 의사하면 흔히 ‘조선침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죽인 영웅’ 정도로 인식한다. 최근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우리 곁에 바싹 다가온 안중근 이지만, 그 역시 6발의 총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는 중대한 민족적 과오가 아닐 수 없다. 오늘, ‘동양평화론’을 고찰해보면서 의사나 장군이 아닌 동양평화를 주창한 사상가로서의 안중근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동양평화론’, 그 숭고한 의미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은 옥중에서 저술한 미완성 작품 ‘동양평화론’을 통해 제기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어렵지만 그가 고등법원장에게 동양평화사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청취서와 재판 공술 등의 자료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일본 학계에선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유엔보다 10년 앞선 구상"이라고 까지 평가한다

그가 저술하고자 한 ‘동양평화론’의 구성은 서문(序文)에 이어 본론(本論)격인 전감(前鑑),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실제로 집필된 것은 서문과 전감뿐이었고, 전감마저도 내용상 미완성으로 제목만 정해 놓은 채 끝을 맺지 못하고 사형을 당하게 됐다.

안 의사는 그의 자전(自傳)을 기술한 후, 히라이시(平石) 고등법원장에게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기위해 얼마간의 형 집행 연기를 요청했다. 이에 몇 개월이 소요되어도 좋다는 승낙을 받아 공소를 포기하고 집필을 추진했으나, 일제가 10여일이 지난 후 약속을 지키지 않고 형을 집행했기에 초례된 비극이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통해 동양 민족의 단합을 강조했다. 동양 민족은 문학에만 힘쓰고 한 치의 땅도 침입해 빼앗지 않는데 반해 서양민족은 도덕을 잃고 무력과 경쟁을 일삼는 침략적인 세력으로 봤다. 러일전쟁(1904~1905) 때까지 안중근은 ‘일본맹주론’을 펴기도 했다.

당시 경시청 신문을 통해 “동으로 뻗는 동양세력의 침략에 대응해 동양은 일본을 맹주(盟主)로 하고 조선, 청국과 정립(鼎立)하여 평화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백년대계를 그르칠 것”이라 말한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황인종이 백인종에게 승리했다"며 기뻐했다. 그러면서 조선과 청나라가 일본을 도운 것은 일본천황의 선전 포고문에 ‘대한독립과 동양평화’를 공고히 한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침략을 위장하는 거짓 평화론을 내세워 한국지배와 대륙침략을 노골화하면서 동양평화를 깨뜨렸다고 내용을 이어간다. ‘동양인종의 일치단결로 서양 세력을 막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이 오히려 이웃나라와의 우의를 끊고 서양세력에게 어부지리를 제공하고 있다’면서 그러면서 일본이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을 계속한다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같은 인종에게 욕을 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의 ‘동양평화론’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전감(前鑑)’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과거 사실을 통해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는 정도에서 미완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그와 고등법원장과의 면담록인 ‘청취서’와 법정진술을 통해 그의 동양평화사상을 살펴볼 수 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의 핵심은 한·청·일 동양 3국은 세계에서 형제국과 같으니 각국의 독립이 보장된 상태에서 서로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각국이 서로 침략하지 않고 독립을 견지하면서 단결해 서구세력의 침입을 막을 때 참다운 동양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그의 법정 진술의 한 부분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검찰관: 피고가 말하는 동양평화란 어떤 의미인가?
안중근: 모두가 자주 독립할 수 있는 것이 평화이다. 
검찰관: 그렇다면 그 중 한 나라라도 자주독립하지 못하면 동양평화라고 말 할 수 없다는 말인가?
안중근: 그렇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지배하에 있는 동양의 중심지이며 항구도시인 뤼순(旅順)을 일단 청국에 돌려주고 그곳을 영세중립지로 만들어 개방해 각국 대표에 의한 상설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결단에 세계가 신뢰하게 되어 한·청·일이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봤다.

◈‘동양평화론’에 녹아있는 안중근 의사의 개화사상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지배하에 있는 동양의 중심지이며 항구도시인 뤼순(旅順)을 일단 청국에 돌려주고 그곳을 영세중립지로 만들어 각국 대표에 의한 상설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세계의 신뢰를 얻게 되어 한·청·일이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고 봤다.

▲순국 직전 안중근 의사의 모습. 죽음 앞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또한 뤼순에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하여 회원을 모집하고 회원 한 명당 회비를 1원씩 모금하면 동양 3국의 수억 인구가 가입할 것이며, 이때 걷힌 회비로 은행을 설립하고 각국의 공용화폐를 발행하여 금융·경제면에서 공동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각국의 중요한 지역에 ‘평화회’의 지부와 은행 지점을 개설하게 되면 금융은 원만해지고 재정은 완전해질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영세중립지 뤼순을 서구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본군함 5, 6척만을 정박시켜 놓음으로써 청나라에게 돌려줬다는 명분과 여전히 일본을 지키는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실리를 둘 다 챙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위의 내용들을 비롯 ▲3국의 청년들로 군단을 편성하여 최소한 2개 국어로 교육시켜 평화군을 양성할 것(우방 또는 형제의 관념이 높아지도록 지도해 동양평화의 모범으로 정착) ▲일본의 지도 아래 한·청 두 나라의 상공업을 발전시켜 공동으로 경제발전에 노력할 것(만주철도 문제로 파생되고 있는 분쟁의 무의미화) ▲한·청·일 세 나라 황제가 국제적으로 신임을 얻기 위하여 합동으로 로마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을 것 등 총 일곱 가지 항목을 시행토록 주창한 안중근 의사는 ‘일본은 한국과 청나라에서 행한 침략만행을 반성하여 ‘일출노소(日出露消)’의 단계에서 ‘일냉일이(日冷日異)’단계에 들어서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동양평화사상 형성의 배경

1894년 갑오년 동학당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던 때, 안중근 의사 부친인 안태훈의 개화사상에 대한 관심은 안중근 의사가 동학군 진압에 앞장서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다.

황해도 동학농민군 원용일 휘하의 2만 여명이 봉기했을 때, 안중근 의사는 그의 부친과 더불어 70명의 포수와 인근의 민병들을 조직해 당시 해주감사 정현석을 도와 농민군에 대승을 거두어 수십 기의 총기와 천여포대의 군량미를 전리품으로 얻게 된다.

그러나 이 군량미 사용을 계기로 안중근 의사 집안은 천주교를 수용하게 된다. 농민군으로부터 노획한 쌀 천여 포대는 탁지부 대신 어윤중과 전 선혜청 당상 민영준의 농장에서 추수한 것을 동학 농민군이 탈취한 것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10일 뤼순감옥 면회실에서 두 동생인 정근, 공근과 함께 빌렘(한국명 홍석구)신부와 이야기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

농민군이 진압된 후 이들은 “안태훈이 병정 수천 명을 기르며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모함을 하면서까지 쌀을 되찾으려 했다. 다급해진 안태훈은 서울의 천주교당에 피신하게 되고, 이곳에서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안중근 의사는 19세 때인 1897년 1월 빌렘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아 세례명을 도마라 하였고, 천주교 사상을 통해서 근대 민권의식을 성숙시켜 나간다.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의 교리를 통해 인간은 가장 존엄하고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고 민권 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는 민권투쟁의 과정에서 정부를 개혁하여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들을 쓸어버리고, 당당한 문명 독립국을 이루어 민권의 자유를 얻으려는 개혁의지를 불태우게 되었다.

이러한 개화사상은 그의 근대군 의식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가 권세를 이용해 서민을 억압한 장교를 향해 “대개 군인이라는 것은 국가의 중임을 맡은 것이다. 충의의 마음을 배양하여 외적을 방어하고 강토를 지키며 인민을 보호하는 것이 당당한 군인의 직분인데”라고 꾸짖은 내용을 자서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황제나 왕을 위한 군인이 아닌 2천만 국민을 위한 군인이라는 개화된 시각을 보이고 있다.

그는 친구의 억울함을 위하려다 오히려 한성부 검사가 감옥에 가두겠다고 윽박지르자 ‘죄 없는 법적용은 없다’는 죄형법정주의에 입각한 주장을 하면서 정부의 개혁을 통한 문명독립국을 갈망하기도 했다.

국내에서의 교육사업과 사회확장의 중요성을 주장하기도 한 그는 ‘삼합의’라는 채탄회사를 차려 재정적 기반을 위한 실업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모든 것에서 그의 무실역행의 개화사상을 엿볼 수 있다.

‘동양평화사상’은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개화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상이 그대로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 바로 ‘동양평화론’이다.

◈하얼빈의 총성만 기억할 것인가

일반적으로 안중근 의사하면 떠오르는 것은 ‘대한국인(大韓國人)’이라는 글자와 함께 손도장이 찍힌 혈서이다. 비단 안중근 관련 행사 때 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그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이외에도 안중근 의사의 호칭을 ‘장군’으로 바꿔야 하느냐 마느냐의 논란, 아직까지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에 대한 촉구, 일본의 독도 영토 주장에 맞서는 안중근 의사 티셔츠의 등장, 수많은 추모 행사 및 각종 전시와 책들의 범람 등 지금 우리나라는 안중근 의사 열풍이다.

그러나 안중근의사의 국제정치 인식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상체계인 ‘동양평화론’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오히려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이웃나라에서 더 인정하고 알아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 지난 26일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추념식에서 안응모 안중근 의사 숭모회 이사장이 동양평화론을 낭독하며 그 의미를 되새겼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하다가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맞은 만주철도이사는 “가슴이 아프지만, 안중근이야말로 내가 만난사람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기록이 있고, 이토 히로부미를 ‘근대일본의 가장 존경받는 정치가’로 평가하는 일본인들도 안중근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은 안중근 의사가 마지막 사형 전 날까지 집필한 ‘동양평화론’에서 찾을 수 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미완성 원고로서 상세한 결론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역사’, ‘만국역사’ 등을 탐독하고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미국의 ‘공립신보’ 등을 열독하면서 얻은 탁월한 국제정세감각과 해박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한국과 동양제국의 평화를 위해 일본과 동북아 제3국가에 충고하려 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는 지금까지도 잘 풀리지 않는 ‘동북아의 평화공존’이라는 난제에 대한 남다른 비전(Vision)과 신념을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던 1909년 당시는 동북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도 동북아시아는 미국이 진행 중인 병력 재배치, 중국의 경제성장,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을 통한 군사대국화 논의 등으로 구한말과 비슷한 혼란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 한반도 주변 정세는 안중근 의사 생존 당시와 본질적으로 같은 맥락에 있으며, 강대국들에 대한 우리의 대응자세나 대외정책 역시 비슷한 궤적을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동북아의 평화와 경제협력 문제와 연계해볼 때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에 대한 재조명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안중근은 더 이상 침략의 원흉을 사살한 단순한 ‘의사’가 아니다. 그는 철저한 평화주의자였고 자신의 투쟁 이론을 ‘동양평화론’으로 정립할 만큼 투철한 사상가였다.

◈안중근에게서 칸트를 보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일본 학계에서는 독일 비판철학의 대가인 칸트와 안중근 의사의 사상을 비교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안중근은 의사이자 장군이기 이전에 동양을 대표하는 사상가였다

철학자 마키노 에이지(牧野英二, 호세이(法政)대 교수)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칸트의 ‘영구평화론’의 유사성에 주목한 데 이어, 헌법학자인 사사가와 노리가쓰(笹川紀勝, 메이지(明治)대 교수)가 두 사람의 사상을 법학적 측면에서 검토하고 나선 것이다.

일본 칸트협회 회장이기도 한 마키노 에이지 교수는 작년 10월 안중근과 칸트 평화론의 유사성을 주장하면서 두 사람은 모두 무력에 의해서는 진정한 평화의 실현이 불가능하고, 평화의 실현을 위해서는 국가가 도덕적인 인간을 육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사사가와 노리가쓰 교수는 일본인들이 안중근을 이해할 수 있는 통로로 칸트를 주목하면서  칸트가 내세운 ‘영구평화론’의 핵심요소인 ‘공화제’, ‘평화’, ‘폭군’, ‘참주’를 안중근 사상과 비교분석한다.

칸트는 전쟁 방지를 위해 국가 간 ‘평화연맹’을 창설하자고 제안했는데, 안중근 의사 역시 ‘모든 국가가 자주독립을 실현하는 것이 평화’라는 것을 통해 전쟁 방지의 작용을 한다고 평가한다. 특히 안중근이 군사적·재정적 권력을 갖는 ‘평화회’를 조직하고 뤼순을 거점으로 삼으려 한 것은 칸트의 평화연맹보다 진일보한 구상으로 현재의 유럽연합(EU)과 가깝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일본 학계의 주장은 한국 학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태진 안중근 하얼빈학회 공동회장(서울대 명예교수)는 “일본 학자들의 안중근 연구는 국내에선 보지 못한, 새롭고 보편적인 시각을 보여준 하나의 자극제였다”고 말하면서 “국내에서도 이전과 달리 폭넓은 시각에서 안중근을 이해하는 연구가 나와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 신자로서 선교사를 통해 신지식도 많이 받아들였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접했을 가능성도 상당히 크다”고 제시하면서 “당시 많은 사람이 읽던 중국 근대사상가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해 칸트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우리가 안중근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영웅으로 기억하면서 유해 발굴에만 집중하고 있을 때, 이미 이웃나라에서는 이러한 시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동양평화론’을 주창한 보편적 사상가로 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은 국권 회복과 동양평화를 위해 투쟁한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상징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 상징성에 매달려 그것만을 배우면서 기억하는 것은 지난 역사의 울분을 삭히는 일종의 마스터베이션일 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100년 앞을 내다 본 사상가로써의 정신이다.

이는 ‘한반도 중립화’와 동북아 지역경제협력체 구성을 위한 모색하고, 나아가 한·중·일 세 나라가 점진적으로 지역의 경제협력 체제를 강화해 세계화 시대 속에서 삼국이 공존·번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열쇠로 우리 곁에 항상 숨 쉬고 있을 것이다.

서울문화투데이 박기훈 기자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