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는 정성과 인내 그리고 미(美)의 집합체”
“자수는 정성과 인내 그리고 미(美)의 집합체”
  • 정지선 기자
  • 승인 2010.04.09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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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순 자수명장,30년 외길 자수만을 고집해온 인생살이를 말하다

 

30년이라는 긴 세월, 강산이 세 번 변하는 동안 오로지 한 길만을 고집해온 유희순 자수명장.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수현재를 찾았다. 수현재는 상계동에 위치한 유 명장의 자택이자 공방으로, 20여평 남짓한 그의 작업실이다. 그곳으로 향하는 내내 기자의 마음은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방망이질을 멈추지 않았다. 0.5mm의 한 땀이 모여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지기까지의 정성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정성스런 작업을 오랜 시간 동안 고집스럽게 해온 명장을 만난다는 설렘과 꼼꼼하다 못해 깐깐함이 둘째가라면 서운할 정도 아닐까라는 선입견에서 오는 두려움(?).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기우였음을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유 명장의 30년 외길 자수인생을 만나보자.

 

김태숙, 한상수 선생으로부터 사사

유 명장, 그의 자수인생의 시작점은 어디였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던 그는 한약방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어 학업을 중단했고, 자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정성스레 한 땀 한땀 수를 놓고 있는 유희순 명장

 

“미술에 대한 미련이 저를 자수의 길로 이끌었죠. 1976년 저는 그 당시 10대였어요. 지나는 길에 우연히 자수를 보게 됐는데, 자꾸 눈도 마음도 가더라고요. 자수 작품 전시가 있다기에 찾아갔는데, 그게 동양자수의 대가 고(故) 김태숙 선생의 전시였죠. 이후 문하생으로 들어가 사사를 받기 시작했어요. 한 5년 지났을까. 한상수 선생의 작품을 보고 또 한 번 놀랐죠. 한상수 선생은 그 당시 전통 자수로 유명한 분이셨거든요. 전통 결혼식 때 여인들이 입는 활옷에 수놓아진 꽃을 보는데, 제가 보던 것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더라고요.”

한상수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3~4년간 배우던 그는 1985년 독립(?)한 후, 자수에 대한 본질적인 공부를 위해 방송통신대 중문과에 입학했다. 그의 솜씨가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개인 작업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유 명장, 무아지경에 빠져들다

한창 자수에 열중할 때는 하루 15시간 이상을 작업에 몰두했다는 유 명장은 고된 하루를 보내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다고 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작업하는 게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그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기에 가능했다면서,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눈이 어두워 하지 못한다며 웃어보였다.

“그 때는 수에 정교하고, 섬세한 맛이 있었다면, 지금은 성숙미가 있죠. 그 당시는 수업해 가며 시간이 늘 부족했기 때문에 그렇게 안하고서는 전시출품 날짜를 맞출 수 없었어요. 작업하다보면 무아(無我)의 순간에 도달하기도 하는데. 그런 순간에 놓은 땀은 정말 고르죠.”

 

2005년 부산 APEC 정상회의장 벽면에 놓인 일월오봉도는 유 명장의 걸작 중 하나다.

 

자수 작업과 학업을 병행하면서도 그는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방송통신대를 졸업하고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예술사를 전공하기위해 입학한 것이다. 불교문화를 모르고서는 수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모른다는 생각에 시작한 배움이었다. 그는 1993년 일본 도쿄와 오사카, 요코하마 등 네 개 도시를 순회하며 ‘한국의 전통공예전’ 초대전을 갖기도 했다.

자수는 정성, 그 자체

자수 밖에 모르는 그에게 있어 유일한 취미생활은 ‘유적답사’라고 했다. “수만 놓다보면 시야가 좁아짐을 느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문화유적답사를 다녔죠. 박물관을 다니면서 유물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더라고요. 거기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요.” 결국 유일한 취미생활 마저도 자수의 새로운 아이템을 찾기 위함이 아닌가. 그는 인터뷰 내내 전통 그리고 유물복원에 대해 강조했다. 옛 자수 유물 복원이라는 그 쉽지 않은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천연염색까지 직접한다는 유 명장. 그의 작업실에 은은하게 퍼져있는 향의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유물복원과 후진양성이 요즘 최대 관심사라고 말하는 유 명장

 

“화학염료만으로는 한계가 있죠. 깊은 색을 만들 수 없거니와 유물복원을 위해 천연염색은 꼭 필요한 과정이거든요. 전통이 그대로 살아있는 색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실까지도 직접 염색한다는 그의 정성에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일월오봉도, 108골무 그리고 주악비천상

유 명장에게 자식과도 같은 그의 작품들을 빼놓고서는 그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없을 터, 가장 아끼는 작품 3점만 말해달라는 질문에 난감해하며 입을 열었다. “하나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방한 시 제작한 숄입니다. 숄에 수를 완성하고 여왕의 이름을 수놓았는데, 알파벳이 아니라 한글로 수를 놓았죠. 다른 하나는 2005년 부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의체(APEC) 정상회의장 벽면에 놓인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죠. 가로 624㎝, 세로 348㎝ 크기의 대형 작품이었죠. 15~16명의 제자들과 두 달 동안 작업했는데, 정말 그 때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나머지 하나는 주악비천상으로, 그가 20여 년간 길러온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수를 놓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강원도 상원사 동종에 새겨진 비천상을 수놓은 작품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부처님께 진심으로 공양하고 싶은 마음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했다.

길상문 사층농(법보신문 제공)
주악비천상(법보신문 제공)

 

그가 전통자수 명장으로 선정된 것은 2002년, 그 소식을 듣고 자만에 빠지거나 나태해지려는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 다양한 문양을 수놓아 108개의 골무를 만들었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단 생각에 주악비천상을 제작한 것이다. 자신을 이기기 위해 독하게 마음먹은 그였기에 명장으로서 고집스럽게 외길을 걸어올 수 있지 않았나 싶어 숙연해지기도 했다. 또한, 대한민국 국새의장품에 들어가는 국새내함겹보자기, 국새받침 석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국가공인 자수명장 되다

요즘 그의 최대 관심사는 단연 유물복원. 그리고 후진양성이다. 50대를 맞은 그는 전통자수의 맥이 끊길까 누구보다 걱정이 많았다. 동국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10년 넘도록 후진양성에 힘쓰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처음에는 모든 게 다 아까웠어요. 내가 모은 문양 하나, 도안 하나 아까워 선뜻 내놓지 못했는데……. 이제는 제자들과 전통자수 복원작업을 함께 진행 중이에요. 내년 2월에는 ‘전통자수의 유물복원 원형 및 응용’ 이라는 전시를 가질 계획입니다.”

그는 현재 복원 중인 유물 작품들을 보여 주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갑자기 어머니 이야기를 빼놓았다며,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108골무
유 명장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괘불

 

 

 

 

 

 

 “할머니와 어머니, 두 분 모두 손재주가 좋으셨죠. 제가 자수에 푹 빠져 있을 때 걱정을 많이 하셨던 어머니였는데, 명장으로 선정됐을 때 가장 기뻐하셨어요. 어머니가 70대를 넘기면서도 실을 직접 꼬아 주셨어요. 자수 작업을 하고 남은 천과 실을 이용해 괴불과 베갯모, 골무 500여개를 만들어주기도 했는데, 이제 남은 게 몇 개 되지 않네요.”

인내의 숭고함

유 명장에게 자수는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30년 동안 고집스럽게 외길을 걸어오면서도 스트레스 한 번 받지 않고, 활력이 넘치는 걸까.

“자수틀에 수를 놓고 있으면 그만한 즐거움이 없어요. 그랬기에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겠죠. 자수는 정성과 인내 그리고 아름다움의 집합체에요. 마음만 급하게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바늘 한 땀은 직선이죠. 직선을 곡선으로 만들려면 수십 여의 땀이 필요하고, 그 땀들이 모여 면을 메워갑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그 인내는 또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요. 제게 자수는 거부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동국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강의 중인 유 명장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더라’ 조선시대 문장가 유한준이 남긴 문장 중 하나다. 유 명장은 자수를 사랑했고, 사랑하게 되니 자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그 때 유 명장의 눈에 보인 것은 전과 같지 않은 것이고. 유 명장, 그의 행보가 주목되는 것은 비단 ‘명장’이라는 수식어 때문만은 아니다. 아직도 뜨거운 열정 그리고 전통문화를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그의 태도 때문이다.

인터뷰/정리 정지선 기자 press@sctoday.co.kr

 

유희순

1976년 김태숙 선생 문하 동양자수 입문
1981년 한상수 선생 문하 전통자수 입문
1987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문학과
1993년 일본 4개 도시 순회 한국전통공예초대전
1994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예술사 석사
1998년 동국대학교 사회교육원 교수(현)
2002년 대한민국 자수명장 선정
자수공방 수현재 운영(현)

그의 작품

일월오봉도, 108골무, 주악비천상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