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은, 30년 만에 ‘만인보’ 출간
시인 고은, 30년 만에 ‘만인보’ 출간
  • 정지선 기자
  • 승인 2010.04.10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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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가족부터 시작해 저마다 사연 간직한 역사 인물까지 총망라

고은(77) 시인의 연작시편 ‘만인보(萬人譜)’가 9일 총 작품 수 4천1편, 전 30권으로 구상한지 30년 만에 완성됐다.

만인보를 완간한 시인 고은

만인보는 시인이 1980년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으로 육군교도소에 수감 중 구상한 것으로, 1986년 1-3권이 나온 바 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우리 민족의 다양한 얼굴을 그려, 조연급 등장인물만 해도 5천600여 명에 이르는 만인보는 이 때문에 ‘한국 문학사 최대의 연작시’ 외에도 ‘시로 쓴 한민족의 호적부’ 또는 ‘시로 쓴 인물백과사전’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것은 완간을 기념해 기존에 출간된 1-26권을 출간 시기별로 합본, 여기에 신간 27-30권을 더해 총 11권의 양장본이다.

작년 7월 탈고한 시인은 역사적 사실 관계와 인명 등을 다시 점검하면서 4천1편을 손봤다고 밝혔다. 특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5.18 직후 감옥에서 만인보를 구상한 시인은 올해로 30주기를 맞는 그때를 불러내 잔혹했던 장면이나 유가족의 고통 등을 가감 없이 전했고, 뱃속의 태아인 상태로 학살당한 아기가 2030년 5월 50세의 최연소 대통령이 돼 광주를 방문한다는 상상력(2030년 5월)을 펼치기도 했다.

시인은 책머리에 “만인보 25년, 이 바람 치는 여덟 바다에 그물을 펼쳐두었다. 이제 그 그물을 뉘엿뉘엿 걷어올린다”고 적으며, 완간을 기념해 “二十五年與萬人”이라고 적은 붓글씨를 출판사 창비에 함께 보내기도 했다.

만인보 30권

한편, 만인보 1-3권(1986)과 4-6권(1988)은 시인이 “우선 내 어린 시절의 기초 환경으로부터 나아간다”고 밝혔듯이 코흘리개 시인에게 ‘가갸거겨’를 깨우쳐준 ‘머슴 대길이’를 시작으로, 가난했지만 정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7-9권(1989)은 고향을 벗어나 1950년대 가난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만나고 스쳐간 사람들의 이야기다. 7년 후 나온 10-12권(1996)과 13-15권(1997)은 주로 1970년대 사람들을, 다시 7년 뒤에 나온 16-20권(2004)은 식민지 시대를 거쳐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직후 소용돌이에 휩쓸린 다양한 삶을 다뤘다.

또한 21-23권(2006)은 4.19를 배경으로 주축인 학생들과 반대편의 정권 실세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삶을 포착했다. 24-26권(2007)은 고승들의 삶과 행적을 따라 신라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 불교와 고승들의 면모를 보여줬다.

만인보에서 다뤄진 사람들은 시인의 가족, 동네 사람들로부터 시작해 각각의 사연을 간직한 민초와 역사적 인물로, 진보당 당수 조봉암, 빨치산 이현상, 갑신정변의 김옥균, 대동여지도의 김정호, 언론인 겸 정치가 장준하,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사상가 함석헌, 시인 임화 김지하 노천명, 문익환 목사, 차지철,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등 다양하다.

출판사 창비는 지난 9일 프레스센터에서 출간을 기념해 만인보를 논하는 심포지엄을 열었다. 프랑스의 시 전문지 ‘포에지’ 편집위원으로 한국 시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클로드 무샤르는 ‘고은의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배포된 기조 발제에서 “만인보에 실린 시들은 각각 개인으로 존재하는 수많은 한국인들을 소개한다. 거대한 시 기획인 만인보는 또 하나의 방대한 작품인 빅토르 위고의 ‘세기의 전설’을 생각나게 한다”고 말했다.

안선재 서강대 명예교수는 ‘영어권에서의 고은’이라는 주제 발표에서 “이미 출판된 열권의 영문 번역을 포함해 고은의 작품은 지금까지 10개 언어로 36권이 번역됐다. 다른 25권도 준비 중이며, 여기에는 영어 외 5개의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것들도 있다”고 소개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문학평론가 염무웅이 ‘개인사와 민중사의 복합적 대서사’로 기조발제를, 소설가 김형수의 ‘고은, 동참된 존재’,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박사과정 중인 박성현의 ‘문학과 역사의 접점: 사회전기로서의 만인보’ 등을 발제했다.

시인 고은은 1933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18세에 출가해 수도생활을 하던 중 1958년 ‘현대시’와 ‘현대문학’ 등에 추천돼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이래 영미, 독일, 프랑스, 스웨덴을 포함해 20여 개 국어로 시선 및 시선집이 번역됐으며,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스웨덴 시카다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 서울대 기초교육원 초빙교수와 단국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울문화투데이 정지선 기자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