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쥐와 계모의 무지
팥쥐와 계모의 무지
  • 김우종 (전덕성여대 교수, 문학평론가)
  • 승인 2010.04.12 09: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실로 이런 의문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반론을 위한 반론, 또는 변론을 위한 변론보다도 시를 바로 이해하려는 정직성이 있다면 이런 질문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모든 어휘는 사전적 개념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면서 하나의 문장과 문단과 작품 전체 속에서 저마다의 다른 의미를 함께 지니게 된다. '소쩍새'가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과 달리 <국화 옆에서>에서는 그 작 품 전체를 그의 세계로 삼고 거기에 맞는 의미를 지니게 되듯이 '국화'도 작품 전체 속에서 그 것만의 고유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앞에서 인용한 <귀국선>의 대사 중에는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꽃을'이 있다.

무궁화는 대한민국 국화이므로 태극기나 마찬가지로 한국의 대유代喩로 쓰인다. 그렇다고 해서 집집마다 정원에 관상용으로 무궁화를 심었더라도 집집마다 대한민국을 심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무궁화'가 오랜 세월동안 조국을 갈망하던 사람들이 귀국선상에서 <귀국선>이란 제목으로 부른 노랫말 중 하나의 단어라면 그것은 틀림없이 조국을 의미한다.

<국화 옆에 서>의 '국화'도 그렇게 소쩍새와 먹구름과 천둥과 무서리와 거울 앞에 선 누님 등이 총 출연한 무대 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단어다. 그러므로 이 국화가 일왕을 상징한다는 것은 일왕실의 문장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이 시세계 전체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국화에 대한 결론이다.
이것을 다른 작품 속의 국화나 장례식장의 국화등과 다 같은 국화라고 한데 섞어 비빔밥을 만드는 논법은 여간 유치한 것이 아니다.

ㄷ. 팥쥐와 계모의 무지

전라감사全羅監司가 많은 사람들 속에서 콩쥐를 찾아 낸 것은 개울가에서 주운 신발이 콩쥐 발에 꼭 맞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왕자가 유리구두 (사실은 모피 구두)의 주인공을 찾아 낸 것도 잃어버렸던 한 짝이 신데렐라 발에 꼭 맞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한국 중 어느 쪽이 그 옛날에 이 신발짝 스토리를 먼저 쓰고 나중에 훔친 것인지도 궁금하지만 이 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그 신발에 꼭 맞는 주인공이 나왔으면 가짜는 물러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국화 옆에서>의 국화가 일본왕이 아니라는 주장들이 그렇다. 꼭 맞는 신발 임자가 있는데도 이를 부정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며 추잡한 불륜이다. 팥쥐와 그 계모의 탐욕이다.

서정주의 국화는 소쩍새가 봄부터 그렇게 울어대서 피어났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그렇게 작심하고 소쩍새가 울었다는 투다. 그렇다면 우선 이것은 은유적인 표현이다. 실제로 그런 화초는 세상에 없으니까 은유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소쩍새의 은유적 의미를 앞에서 설명했다.

서정주 자신이 그와 같은 시기에 쓴 <귀촉도>에서도 그랬듯이 그것은 전쟁 속에서 억울하게 가엾게 죽어서 멀리 서역만리로 가버린 사람의 구슬픈 울음이며, 한 송이 국화꽃이 그래서 피어난 것이라면 그 은유적 의미는 일본왕 밖에 없다.

그런 전쟁을 15년간 해온 이본의 임금님이 1947년 바로 그 시기에 그렇게 남들 다 죽은 무덤에서 새 얼굴로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태어났다는 것은 서정주의 주관적 해석일 뿐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에 나왔다는 객관적 사실은 꼭 같다. 이렇게 꼭 맞는 신발짝을 부인하려면 다른 신발을 가져오고 반론을 제기하면 될 것이다.

국화는 일왕 히로히토다. 제1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2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렇게 전쟁으로 재생했다면 이것 역시 생명의 존엄성과는 반대다. 전쟁은 사람 죽이기니까.

같은 시기에 같은 서울에 살면서 곧 전쟁터에서 죽게 될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자기 한 목숨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허락된다면 십자가에 매달리겠다고 노래한 시인도 있었는데 서정주는 같은 시기에 그 같은 생명의 집단 학살자들에 가담하더니 해방 뒤까지도 그 미망迷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제4연

ㄱ. 무서리와 원폭 투하

제3연은 마침내 국화꽃의 정체를 저 정확히 밝히기 위해서 일본의 건국 신화를 인용한 부분이다. 그렇지만 논리 전개의 편의상 제4연부터 보자.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제4연)

제4연에는 주제를 위한 주요한 제시어가 두 개 있다. '노오란 네 꽃잎'과 '무서리'다.

이것은 원폭 투하로 세상이 몽땅 죽음의 공동묘지가 된 자리에서 혼자 살아남은 일왕을 나타내는 극적인 마지막 무대를 나타낸다. 그래서 제1연 제2연과 함께 전쟁 스토리의 마지막 대단원 구실을 한다.

무서리는 그 해에 처음 오는 묽은 서리다. 된서리와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작자는 된서리의 뜻으로 쓴 것 같다.

무서리이든 아니든 서리는 영하로 기온이 하강해야 내리는 것이므로 첫 서리가 내리면 다른 꽃들은 다 얼어 죽고 해가 나면 걸레 조각들처럼 축 늘어진다. 끓는 물에 데쳐낸 시금치도 그처럼 축 늘어진다. 국화는 이렇게 다른 꽃들이 모두 추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죽은 뒤에 홀로 싱싱하게 생명을 유지하고 피어 있다는 것 때문에 더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자연의 경우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렸다면 무서리는 노오란 꽃잎이 피어나게 한 원인이다. 그러니까 무서리가 내리지 않았다면 노오란 꽃잎은 피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연 속의 국화는 이렇게 피지는 않는다. 다른 꽃들의 죽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남들이 죽거나 말거나 그와는 상관없이 아름답게 앞마당에도 피고 뒷동산에도 피고 그러다 가버린다. 그런데 이 시의 노오란 국화는 무서리가 내려서 다른 꽃들이 모두 몰사했기 때문에 핀 것이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라고 했으니까 이 국화는 남들이 다 죽어야만 피는 악의 꽃이 아닌가?

혹시 노오란 꽃잎이 피려고 무서리가 내렸다는 것은 국화꽃의 개화를 알리는 징조를 말한 것이지 그 꽃을 피우기 위해서 무서리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나올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 세상에 무서리가 내리고 다른 꽃들이 다 그렇게 몰사를 당해야만 피는 꽃은 없다.

국화는 무서리가 내리기 전부터 피어 있다가 무서리 때문에 남들 다 죽은 자리에 혼자 살아남을 뿐이지 그때 그렇게 남들이 죽은 다음 순서를 기다리다가 피는 꽃이 아니다. 어느 꽃이든 그 꽃들이 아무리 양심이 없더라도 남들이 죽어주기만 기다리다가 피는 경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