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짚·풀이 없었다면 지루했을 것”
“내 인생에 짚·풀이 없었다면 지루했을 것”
  • 이소영 기자
  • 승인 2009.01.29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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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청담동에서 개관, 2001년 종로 명륜동으로 확장·이전해 16년을 지켜오고 있는 ‘짚풀생활사박물관’은 인병선 관장(73)이 약 30년 전부터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전국 농촌을 답사하며 조사·수집·연구해 온 집대성의 결과물이다.

탄탄한 조사와 연구로 ‘짚과 풀’에 있어서만큼은 국립박물관도 따라올 수 없으며, 특히 ‘볏짚’을 주제로 체계적으로 조사·연구해 설립한 세계에서도 유일한 ‘짚·풀’ 전문 박물관.

그녀에게 이곳은 단순한 전시공간이 아니다. 짚과 풀로 만들기 체험을 통해 조상들의 지혜를 배우고 ‘짚과 풀이 현대에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현대인들과 함께 탐구하는 국민들의 문화학교이자 사라져가는 문화를 보존하고 지켜 계승·발전시키고자 하는 연구소인 것이다.

인병선 관장을 만나 그녀에게 짚·풀은 어떤 의미인지, 현대에 그 가치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병선 관장의 프로필을 아무리 봐도 그녀가 시골 출신이라거나 시골에 갔을 법한 단서는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짚·풀과 여자인 그녀는 여간해선 어울리지 않았다. 많고 많은 것 중에 ‘왜’ 짚·풀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나는 도시 출신이고 줄곧 도시에서 살아왔다. 1970년대, 정부가 새마을 사업으로 잘사는 마을 만들겠다고 농촌 개량화를 위해 마을 길 넓히고 초가집을 없애기 시작했다. 농업시대 우리들의 주산업을 담당했던 벼에서 나오는 지푸라기와 풀을 생활에 활용했던 농민들이 지혜가 담긴 것이 사라지려고 했다”며 오래도록 이어온 문화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에서 비롯됐다고 짚·풀과의 인연을 이야기했다.

◆  짚·풀의 문화적 가치 놓치고 있는 현대인 안타까워

그녀는 농업시대에 국가의 발전을 좌지우지 하던 농업을 하면서, 농민들이 지키고 가꾸어온 그 시대의 생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벼의 지푸라기, 풀을 문화의 하나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그때부터 인 관장에게 있어 짚·풀은 농민의 문화라는 측면에서 아주 중요해졌고,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전국 농촌을 다니며 ‘그냥 쓸려나가고 없어져버리고 있는 짚·풀 문화’를 조사·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93년 설립 당시에는 청담동에서 운영하다가 2001년 명륜동으로 이전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인 관장은 박물관을 하려던 생각은 없었다고 운을 뗐다. “30여년을 농촌과 골동상을 돌아다니다보니 버려진 짚·풀 물건들이 너무 많았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으면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모으다보니 37평 아파트에 잠잘 공간까지 없어질 정도로 쌓여있더라”며 그 시절을 회상하는 듯 말했다.

그녀는 그 때의 박물관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말했다. “청담동에서는 2층짜리 건물 한 층을 전세로 빌려서 했다. 45평짜리에 연구실, 전시실, 수장고 등 다 갖추기가 어려웠다. 내 땅에 건물을 지어서 박물관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겼고 내가 좋아하는 곳인 대학로에 터를 잡게 됐다. 체험을 많이 하다 보니 공간이 부족해 앞마당에 있는 한옥을 2007년에 뒤늦게 사서 이제야 박물관으로써의 면모를 갖춘 것 같다”며 뿌듯해했다.

새로운 게 보이면 ‘왜 이렇게 비틀었을까, 무엇에 쓰였을까’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는 인병선 관장.
짚·풀 문화를 조사·채록·수집·연구하기 위해 1978년부터 전국 뿐 아니라 중국, 동남아 등 외국도 조사한 결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단다.

“짚·풀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보편화 된 재료로 가을에 쏟아지는 볏짚을 버리지 않고 생활 전반에 유용하게 이용해왔다. 우리나라의 짚·풀 문화가 다른 나라와 다른 점은 볏짚에서 태어나 볏짚에 싸여 간다고 할 정도로 우리 농민과 아주 밀접한 농민 문화다. 이미 우리 조상들은 짚의 가치를 알고 적절한 용도를 찾아내 써온 것”이라며 그 짚·풀의 문화적인 가치를 놓치고 있는 현대인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 짚·풀은 섬세한 손길과 의미 담겨 모두 ‘명품’

지금도 개발되는 농촌 소식을 들으면 어디든지 달려가지만 “빨리 오지 그랬나, 작년에 태워버렸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약이 오르고, 뭐 하나 건져오면 행복하다는 인병선 관장.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당연하고도 뻔한 대답이 돌아올 걸 알면서도 애착이 가는 전시품을 물었다.
그녀는 “짚·풀이 아니라 다른 물건이었다면 대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짚·풀은 하나하나 누군가의 섬세한 손길과 의미를 담아 만들어졌기 때문에 모든 것이 ‘명품’이다. 엮고 꼬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모든 전시품에 애착이 간다”고 답했다.

하나하나 목적과 의도, 실용성, 예술성을 다 가지고 있으며 실용성이 우선이지만 디자인도 생각하며 만든 우리 조상들 저마다 재치 있는 솜씨는 예술성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같은 걸 만들어도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어 모두 다 특별하다는 말이다.

인 관장은 몇 년 전부터 장애인과 치매노인들을 대상을 짚·풀 공예 놀이를 진행해오고 있다.
또 결혼 이주여성들에게 짚·풀 문화를 소개해 주면서 서로 이해하는 길을 터준 것도 뜻 깊은 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활동은 지난 10월 종로구(구청장 김충용)와 함께 서울시내 거주 노인들을 중심으로 짚·풀 멍석을 깔아 드린 일이다.

‘짚·풀 공예 솜씨겨루기 대회’를 통해 노인들은 옛 기억을 되살려 솜씨를 발휘했다. 마당 멍석에 앉아 지푸라기로 새끼도 꼬고 짚신도 만들며 오랜만에 향수에 젖어드는 기회가 된 대회이자 축제였다.

어린이들에게는 우리 조상의 생활에 대한 슬기로움과 우수성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반응이 너무 좋아서 간곡한 요청으로 결국 성남에서 자비로 행사를 열기도 했다.

2009년에는 짚·풀 관련 행사를 더 많이 열고 싶다는 그녀는 “도록과 전시도 중요하지만 요즘은 문화를 알리는 대국민 차원의 활동이 필요하다. 구로구 등에서도 오라고 하지만 구나 시 등 국가 차원에서 지원해줘야 무료 체험 행사나 축제를 열고 교육 등으로 문화를 알릴 수 있다”며, 문화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지원을 아쉬워했다.

또한 “국립 민속 박물관은 빛내야 할 게 많으니까 빛날 수가 없다. 한 분야에 집중하고 있는 사립 박물관은 오로지 그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아주 전문적이기 때문에 가치가 충분하다”고 사립박물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북돋아줄 것을 당부했다.

◆ 박물관, 짚풀 문화재단 만들어 ‘사회 기증’ 
    우리 문화재 공유해 함께 지키고자하는 마음

‘사립박물관’에 대해 돈 많은 개인의 사치로 바라보는 사회나 정부의 삐뚤어진 시선과 편견에 “왜, 굳이 공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냥 나 좋아서 하는 거면 애써 수집한 걸 안방에 두고 혼자 감상하지, 왜 자기 돈 들여가며 어렵게 박물관을 짓고 적자에 허덕이며 운영하겠나. 평생 걸려 어렵게 수집하고 보존해 온 귀한 문화재를 공유해 함께 지켜 나가고자하는 마음을 왜 몰라주나”며 시민들이 개인이 만든 박물관도 개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니까 우리가 지키고 키워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기를 희망했다.

인병선 관장은 그러기 위해서 공공성, 공익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2003년부터 16년 동안 가꾸어온 자신의 박물관을 최근 비영리공익재단 ‘짚풀문화재단’으로 만들고 감정가 45억원인 개인 소유 건물 2채도 재단에 내놨다.

30여년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모은 수집품들에 대한 사적인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자신의 재산 일부도 사회에 기증해 ‘공공화’ 한 것이다.

박물관에서 나오는 모든 수익은 재단의 소유가 되고 박물관을 안하겠다고 하면 박물관과 재산은 모두 정부에게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국가나 지자체에서 설립하거나 기업에서 설립한 재단도 상당수에 이르지만 순수하게 개인이 법인을 설립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인 관장이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건 ‘박물관의 미래’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을 결산할 때인데 내가 죽더라도 박물관은 여전히 문화시설로써 손색없이 발전시켜서 남기겠다는 것이 나의 집념이고 소망이다. 그래서 재단으로 만들었고 남은 날 동안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다짐했다.

마지막으로 세계적으로도 많은 관람객들이 찾아오는 짚·풀생활사박물관을 좀 더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게 방법을 귀띔해달라고 했다.

그녀는 가장 먼저 짚·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올 것을 부탁하며 “무얼 갖다 놓는다 해도 관심이 없으면 재미가 없다”며 ‘아는 만큼 보인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줬다.

덧붙여 “어린이들은 학교 숙제로 오는 경우가 많은데 체험학습이 많아서 좋아한다. 하지만 체험을 떠나서 누구든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주제가 있으면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관심이 대상이 될 수 있다. 아주 사소한 거지만 많은 걸 가져다 놓고 보면 연구할 게 많다”며 현대인들에게 주제를 가질 것을 당부했다.

“나도 만일 내 인생에서 ‘짚·풀’이라는 주제가 없었다면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었을 것”이라며, 지나온 자신의 삶을 목적이 있기 때문에 즐겁고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서울문화투데이 이소영 기자 syl@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