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목을,나무와 교감하고, 사람과 소통하다
이목을,나무와 교감하고, 사람과 소통하다
  • 박기훈 기자
  • 승인 2010.04.17 1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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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그릇’을 품고 변화하지 않는 작가, 이목을(李木乙) 화백

 

[서울문화투데이=박기훈 기자] 홍지동 주택가에 자리 잡은 이목을 화백의 작업실 입구엔 ‘이목을이가 그림 공부하는 곳’이라는 글씨와 함께 그의 모습을 캐릭터화한 익살스런 그림이 손님을 반긴다. 그의 작업실은 산 속의 통나무집처럼 아늑했다. 그의 말마따나 한번 오면 자고 가고 싶은 충동이 드는 편안한 곳이다. 어둑어둑한 늦은 시간에 찾아 온 기자에게 오느라 수고했다며 손수 저녁을 차려준다. 그는 사람을 좋아하고, 교감을 좋아하고, 소통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림을 그리는 작업도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닌 ‘생명체를 만드는 것’ 이라 생각하는 그는 자신의 작품을 사간 이들에게 ‘우리 딸래미 잘 좀 보살펴 달라’는 아비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정성스레 적어 보내기로도 유명하다. 화가이기보다 선인(仙人)처럼 느껴지는 그 와의 인터뷰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정이 느껴졌다.

 

◆태생(胎生)이 그림장이

기억을 끝까지 앞으로 돌려봐도 그림을 그리던 모습밖에 없다는 이목을 화백은 초등학교 때도 남달랐다. 또래 남자아이들이 대통령이나 장군을 꿈꿀 때 이미 화가를 평생 꿈으로 삼았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부친의 사업 실패로 집안 환경이 급변했죠. 더 이상 집을 바라볼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내 꿈을 위해선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해 인생관을 세우고 적어나갔죠. 그 꿈의 실현이라는 것이 결국 나니까요”

해본 일이 무려 100가지도 넘는 그는 학교보다 일터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 와중에도 그림 그리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동시에 ‘탄생’과 ‘죽음’, ‘그림’이라는 기둥을 세워놓고 어린 시절부터 인생을 마케팅한 한 명의 어른이었다.

 

                                                                                  고요(靜)-48cm*30cm 2001

 

“지금도 그때 마음먹었던 ‘몇 살엔 무엇을 한다’는 그 모양 그대로 살고 있죠. 어떻게 보면 목표점을 두고 따라가는 내 안의 질서겠죠. 사람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접은지 오래됐다고 이러거든요. 그건 다 자기 자신을 덜 사랑해서 그런 거 같아요. 내가 완성이 안 되면 결국 내 존재의 의미가 없는 건데 말이죠”

다른 이들이 ‘잘 되서 뭐하려고 용쓰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가 진짜 잘 돼야 남에게 나눠줄 수 있다. 남이 봤을 때 존재감이 없으면 결국 같이 할 수도 없고 같이 안 해준다”는 그는 지금도 묵묵하게 자신의 철학을 고집하며 화가라는 한 길을 걷고 있다.

이러한 그에게 ‘대체 왜 그림을 왜 그리느냐’는, 다소 상투적인 우문(愚問)을 던졌다.

이에 이 화백은 서슴없이 세 가지 이유를 꼽는다. 첫째는 ‘내가 즐거우니까 이 짓하고 산다’는 것이요, 둘째는 ‘지금의 내 모습은 운명’이란다. 세 번째로 꺼낸 이야기가 그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존중과 교감을 통한 나눔과 소통’이었다. 

 

 

“제가 그림을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자체가 남하고 함께하기 위한 거죠. 세상에 나 혼자 산다는 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거죠. 그림이라는 부분을 한 사람의 개인성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 개인성을 부여해준 조물주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제 생각엔 남들하고 같이 즐기고 같이 나누라고 이런 재능을 부여해준 거 같아요”

이 화백에게 있어 그림은 ‘즐거움’이자 ‘운명적인 사명’이고 ‘조물주의 섭리’라는 세 가지를 다 아우르는 자기 자신의 존재의 이유다.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다는 그가 시원스레 한 마디 한다.

“먹고 살려고 이 짓하면 어리석은 거죠.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웃음)”

◆그림은 한편의 시(詩)

나무 위에 일상적 사물들을 그대로 ‘던져 놓는’ 이목을 화백은 아직도 주위사람들로부터 ‘왜 사람들이 좋아하는, 잘 팔리는 장르의 그림들을 그리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는 “알지만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우리 삶”이라고 한다.

“예술이라는 것은 어떤 지역에서 통하고 잘 팔리고 하는 한계를 넘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과 소통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어떤 전시에서 외국인들이 제 작품을 극찬하면서 많이 사갔어요. 근데 그 이유가 너무 충격적이었죠. ‘너무 한국적이기에 사간다’는 거예요”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은 한편으로 쇄국이자 국수주의다. 이는 다른 이들과 교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하는데 서슴치 않는 이 화백의 관점에서 자신의 뼈를 깎는 예술혼을 담은 이 화백의 그림이 외국인들에게 기념품 취급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예술적 가치가 세계적으로 인정을 못 받고, 예술가가 기능인으로 폄하된 것 같은 허탈감에 작업을 그만해야겠다는 생각까지 진지하게 품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가 ‘세계인과 똑같은 관점에서 사람 얘기를 은유할 수 있는 사물이 뭘까’ 고민하다가 찾은 것이 대추다. 경북 청도 구만산 자락에 있던 그의 작업실 주위는 전부 대추밭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대추를 소재로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산책하면서 대추를 따 먹다가 뭔지 모를 느낌이 팍하고 왔어요. 그 순간 여러 가지가 느껴졌죠. 색깔이 파란 거부터 쭈글쭈글한 거까지 다양한 모습의 대추들을 보면서 인간이 소멸되어가는 삶의 모습들이 보인 거죠. 그 이후론 1년 여간 대추만 계속 그렸어요”

그는 ‘내가 욕심이나 열망을 품지 않았다면 대추가 내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 이라고 말을 이어갔다. 그가 말하는 욕심이나 열망은 하루아침의 순간적 집착의 그것이 아니다. 하나의 그릇 안에 응집된 살아있는 에너지다. 그렇기에 감히 ‘욕심을 삭히라’는 말을 던지기가 부끄러워질 정도다.

이후 이 화백은 대추에서 사과로 매개체를 바꿨다. 일부 평론가들은 그의 고향인 영천에서 사과가 많이 나와서 그런 것이라 속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사과를 그리게 된 건 더 큰 세계와의 소통을 위해서였다.

“대추를 그리니까 동양 사람들은 잘 알지만 외국인들은 잘 모르더라고요. 대추를 은유의 대상을 삼았으면 그 의미가 읽혀져야 하는데 말이죠. 그래서 내 안에 있는 자존감을 잃지 않으면서 모든 이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 대상을 찾다가 사과라는 만국공통어를 발견했죠”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데 까지 절제하고 축약하는 세계가 그림이라며 “시가 그림이고 그림이 시”라고 한다. 즉, 그림은 한 화면 안에 갇혀진 세계 같지만, 작가 자신이 축약해놓은 철학이 보는 이들에게 전달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내 생각들을 정리하는 작업이니 양심적으로 해야죠. 표현은 자유지만 내가 한 것은 남는 거니까요. 때론 사명감에 두렵기도 하죠. 근데 이건 작가가 상대방과 좋은 교감을 하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예요. 내가 힘들다고 아무렇게나 하면 그림 속에서 발산된 기운이 보는 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죠. 제 그림을 보면서 즐거워해야하는데 오히려 아프다거나, 우울해질 수도 있죠”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며 사는 것조차도 조물주가 내린 어떤 의무로 생각하며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기다림은 지배를 이긴다

이목을 화백의 트레이드 마크인 색안경 뒤엔 아픔이 있다. 화가의 생명과 같은 한쪽 눈의 실명이 바로 그것이다. 그림을 10분 이상 그리지 못한다는 그는 병원에서조차 그림 자체를 쉬는 게 좋겠다는 말까지 들었다. 이러한 핸디캡을 껴안고 있으면서도 굳이 초정밀을 요구하는 지금의 작품들을 미련 할 만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게 참 운명적이예요. '오만양식'의 그림을 막 했었는데 하필이면 왜 극사실주의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는 저도 몰라요. 아무것도 모르는 두 남녀가 만나서 연애해서 결혼하는 그런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거죠. 내 마음이 동하고 그쪽이 동했으니까요”

이 화백은 나무라는 자체를 하나의 인격체로 본다. 평론가들이 캔버스 대신 나무를 사용한다고 하지만 그에게 나무는 지배하는 종속의 도구가 아닌 ‘너와 나’의 관계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존중해야 화합이 생기듯 그도 나무를 존중한다. 그러한 의도를 표출하려니 자연스레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린다.

“사실 제 그림을 극사실주의라고 칭하고 싶지않아요. 굳이 이름을 붙이다보니 그렇게 된 거죠. 사실 우리가 지금 ‘~이즘’이라고 하는 것들은 전부 서양의 미술사조예요. 이런 걸 좀 자제해야 되요. 전 그냥 제 얘기를 하면서 어떤 관계성을 그리는 것일 뿐인데 말이죠”

문득 왜 그가 그토록 나무라는 동반자와 함께 그림 인생을 보내는 지 궁금해졌다.

“처음부터 ‘나무에 그림을 그리겠다’는 건 아니었어요. 사람이 불현듯 그리워지는 것처럼 머리에 딱하고 갑자기 떠오르며 제게 다가온 거죠. 이걸 거부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무라는 부분이 왜 이렇게 나한테 다가왔을까 하는 이유가 있을 거란 얘기죠. 결국 제가 궁극적으로 바라던 나름대로 삶의 철학과 맞아떨어진 멋진 매개체가 되었죠. 그림이 잘 팔리는 이유도 됐고요”

 

 

이 화백은 오는 5월 7일까지 용산 비컨개러리에서 열리는 ‘Lee Mokul 1998~2010 Works’는 그에게 있어 하나의 매듭을 짓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1998년부터 2010년까지의 작품들을 통해 얘기하고자 하는 것들이 거의 완성이 다 됐다는 이유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건 신체 일부분의 핸디캡, 구체적으로 한쪽 눈이 원래 실명되었다 보니 자연스레 남은 눈을 너무 많이 사용하게 돼서 힘들어졌어요. 이러한 현상을 역행할 이유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거죠”

이번 전시회 이후부터 다른 화풍의 그림을 그릴 것이라는 이 화백에 대해 주위에선 벌써부터 ‘변화’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사실 그에게 ‘변화’는 없다. 물이 가다가 걸림돌에 걸리면 돌아서 갈 뿐 계속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남들이 보면 변화라고 하겠죠. 시각에 의해 겉만 보니까요. 어떠한 틀에 따라 범주를 규정하는 서양적 관점에서 보면 더 그럴 거 같아요. 남들이 보면 ‘좀 이상하다. 왜 저런 그림을 그렸을까’ 여러 가지 말이 많겠죠. 하지만 하고자 하는 얘기의 근원은 변함이 없죠”

그는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색다른 매개체를 찾아 다녔다. 언제나 그렇듯 ‘욕망의 그릇’ 을 품고 다니던 어느 날, 그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순간적인 스파크와 함께 다음 창작의 모티브를 얻게 된다. 그것은 바로 ‘아이콘’이다.

“아이콘은 축약된 세계죠. 아무리 긴 문장도 이거 하나면 다 통하잖아요. ‘바로 이거다. 이것이 바로 나다’라는 생각이 번뜩 오더라고요. 이걸 하면 내 눈도 덜 피곤하겠죠”

 

 

대상을 찾은 그는 마음속 ‘욕망의 그릇’을 채우기 위해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형식을 찾아다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 무렵 유아용 교재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형마트를 갔는데 아동도서 세일을 하더라고요. 두 세 살짜리를 위한 색칠놀이나 한글공부 교재를 보게 됐죠. 그것들이 이젠 다 제 교과서가 됐어요(웃음)”

그는 자신이 억지로 어떤 것을 지배하겠다거나 혹은 종속시키려 할 때는 반드시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어떠한 이득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동시에 자기 자신이 취하려고 안달내지 않았음에도 ‘언제나 열정과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 우연처럼 필연이 온다’고 강조한다.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러한 철학을 그는 ‘개똥철학’이라 폄하하지만 우리에겐 ‘철학’ 그 자체로 다가온다. 나무도, 대추도, 사과도 그러했으며 유아용 교재도 그러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경험

이목을 화백은 2005년 갑자기 집을 판다. 그 돈으로 미국 뉴욕의 맨해튼으로 훌쩍 떠난다. 그리고 2년이 조금 넘은 2007년 한국으로 돌아온다.

이목을 화백은 “좋게 말하면 유람이고, 어떻게 보면 집 한 채 판돈을 깔끔하게 쓰고 온 거”라며 웃음을 터뜨린다. 그가 미국에 간 것 역시도 그가 억지로 간 것이 아니란다. 자신이 그 세계를 마음에 품고 바라보고 있으니 여러 생각들이 계속 떠올라 자연스레 안 갈 수 없게 됐다고 한다.

 

 

그의 미국행에 대해 양쪽에선 모두 의아해했다. 주변사람들은 ‘왜 굳이 안가도 되는데 왜 가냐’하고, 뉴욕에서도 ‘안와도 되는데 왜 왔냐’고 했다. 둘 다 이유는 같았다. ‘지금 너의 현실은 너무 좋아서 굳이 갈(올) 필요없는데’ 였다. 이 화백은 당시를 떠올렸다. 

“당시 실질적으로 전시도 안하고 그림도 별로 안 그리고 맨날 돌아다녔어요. 대체 뭐하러 갔느냐는 말들이 많았죠. 그때 제가 한 말이 있어요. ‘종을 안에서 울리면 골만 아프고 귀만 찢어진다. 밖에서 울리면 그 소리가 깊고 여운이 있다’”

연애를 하면서 상대방과 같이 보고 겪어가면서 맞춰갈 수 있듯 그는 맨해튼 현지인들을 보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 생활방식을 겪어본 것이다. 충분하게 그쪽 공기를 느끼고 온 것이 그림 공부보다 훨씬 값진 공부였다. 이러한 공부가 되어야 그림도 잘 그려진다는 그는 비싼 수업료를 치룬 만큼 배운 것도 많은 값진 경험이라 했다.

“일부에선 외화낭비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 이상의 큰 걸 얻었어요. 진정한 나눔이란 갖춰져야 가능한 거니까요. 참 잘 갔다 왔어요. 이제는 쓰고 온 거보다 더 많은 외화를 벌어들일 단계만 남았네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