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그 소중함을 모르고 지낼 것인가
궁궐, 그 소중함을 모르고 지낼 것인가
  • 정지선 기자
  • 승인 2010.04.22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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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과 창경궁 연계관람 · 5대 궁 통합관람 5월 1일부터

[서울문화투데이=정지선 기자] 살다보면 가까이있어 그 소중함을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 문화재들이 생각보다 많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서울 시내 소재한 궁궐을 들 수 있다. 1년 내내 한국인보다 외국인의 발걸음이 오히려 끊이지 않는 그곳. 더 슬픈 사실은 우리가 소중함을 모르고 지낼 뿐 아니라 잘 모른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5대 궁이 어디냐고 묻는 아들의 갑작스런 질문에 아빠는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 손가락을 하나씩 구부려가며 설명한다. 그런데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급기야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 상황이 낯설게만 느껴지는가? 아닐 것이다. 의외로 5대 궁을 제대로 알고있는 이가 드물다는 현실이 씁쓸할 뿐이다. 이에 본지에서는 5월 1일부터 시행되는 궁궐 관람제도 개선사항을 소개하고, 이와 더불어 궁궐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자 한다.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오는 5월 1일부터 종묘의 제한관람, 서울 소재 5대 궁궐인 경복궁을 비롯해 창덕궁과 창경궁, 덕수궁, 종묘의 통합관람, 창덕궁과 창경궁의 연계관람 등을 골자로 한 궁궐 관람제도를 시행한다.

종묘는 기존의 자유관람제를 제한관람제로 변경, 해설사의 전문해설을 들으며 종묘의 공간적인 특성을 느낄 수 있도록 개선된다. 이는 종묘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신성한 공간이자  제례 공간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공간의 특성을 제대로 알고 관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종묘의 제한관람제 시행 배경에 대해 문화재청은 “종묘 관람객 중에서 전문적인 해설을 원하는 관람객의 수요가 늘었을 뿐 아니라 종묘 앞 광장의 무질서를 예방하고, 세계유산의 품격에 어울리는 관람제도를 정착시키기위해 기획됐다”고 설명했다.

제한관람제로 바뀌면서 종묘는 09시부터 16시까지 매시간 20분과 17시(일몰시간 관계로 3월부터 9월까지 운영), 하루 9회(국어 해설) 관람가능하다. 단, 토요일은 자유관람을 실시한다.

관람동선은 두가지로 나뉜다. 제1동선은 정문-공민왕 신당-망묘루-항대청(제기 관람)-재궁-정전-영녕전-약공청(영상물 시청)-정문이며, 제2동선 정문-재궁-정전-영녕전-약공청(영상물 시청)-항대청(제기 관람)-망묘루-공민왕 신당-정문이다. 한편, 궁궐관람제도 시행으로 현행 연결 육교를 통해 종묘(창경궁)입장권으로 창경궁(종묘) 관람이 가능했던 것과는 달리 육교를 패쇄, 육교를 통한 관람이 불가하다.

한 개의 관람권으로 5대 궁을 모두 관람할 수 있는 통합관람권 제도가 도입된다. 5대 궁 통합관람권을 구매, 소지한 관람객은 5대 궁궐 공개지역 전체를 관람할 수 있으며, 관람권 가격은 1만원이다. 각 궁 매표소에서 구매 가능하고, 유효기간은 구입일로부터 1개월이다. 문화재청은 5대 궁 통합관람권의 도입으로 관람객들이 각 궁의 특징을 비교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궐(東闕)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반영, 두 개의 궁궐 사이에 매표소를 설치해 통합 연계 관람이 가능하다. 기존에는 각각의 매표소에서 관람권을 구입한 후 입장이 가능했지만 이제 함양문을 통해 창덕궁과 창경궁 간 출입이 가능해진다. 창덕궁 개방 권역(후원 권역 제외)은 그간 꾸준히 제기돼오던 국내외 관람객의 자유 관람에 대한 수요를 반영해 자유관람제를 실시한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통합 관람 배경은 역사적인 의미에서 찾을 수도 있지만 문화재청은 현실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일반적으로 창경궁에 비해 창덕궁에 관람객이 많이 몰리는 편이다. 창덕궁의 경우, 한 타임에 1천여명의 관람객이 몰린 적도 있었다. 창덕궁으로 관람객이 몰리는 이유는 정확하진 않지만 후원에 비원이 있고, 그 경관이 좋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창덕궁 자유관람은 현행 시간관람제에서 자유관람제로 변경, 정해진 시간에 안내해설이 제공된다. 후원권역은 해설사를 동반한 시간관람제를 실시, 1회 최대 관람인원은 100명으로 제한되며, 경로우대 및 단체할인은 없다.      

후원권역만 관람은 불가하다. 창덕궁 후원 권역 제한관람제 유지 배경에 대해 문화재청은 “창덕궁 후원권역은 문화재 훼손 우려 등 세심한 주의가 필요해 현행 제한관람제를 유지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궁궐 전각은 하루 5회, 후원은 하루 9회(국어 해설) 관람할 수 있다. 궁궐 전각 관람동선은  돈화문-궐내각사-인정전-선정전-희정당-대조선-성정각-낙선재로 60분 소요, 후원 관람동선은 함양문-연경당-의두합-부용지-애련지-관람지-옥류천-다래나무-돈화문으로 120분 소요된다.

문화재청은 그동안 관람제도 개선을 준비하면서 궁궐 내 안전관리요원을 확충하고, 자동소화설비 및 경비시스템 구축 등 안전기반 구축에 힘써왔다. 문화재청은 “궁궐 대부분이 목조건축물이라 화재에 취약하다. 관람제도 개선과 함께 자동소화설비와 경비시스템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작년에 예산을 확보했다”며, “현재 5대궁에 자동소화설비를 모두 마친 상태이며, 창덕궁은 주변 정리와 함께 4월 말까지 마무리 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담 위로 우뚝 솟은 집, 궁(穹)

5대 궁궐을 알기에 앞서 궁궐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아는 게 먼저일 터, 중국 문헌「석명(釋名)」에 ‘궁(宮)은 궁(穹)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궁(穹)은 담 위로 우뚝 솟은 집이라는 뜻으로, 나라 안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궁과 관련된 용어를 보면, 궁궐(宮闕), 궁전(宮殿), 궁실(宮室), 궁가(宮家), 대궐(大闕) 등이 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친 말로, ‘궁’이 왕과 신하가 함께 정무를 보고 거처하는 곳이라면, ‘궐’은 그 궁을 지키는 궁성과 성루, 성문을 가리킨다. 궁전은 궁궐 안에 있는 전각(殿閣)을 의미한다.

이제 궁궐의 역사를 중심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종묘를 돌아보자.

원래 경복궁 터는 따로 있었다?

경복궁은 종로구 세종로에 위치한 조선시대 정궐(正闕)로, 1963년 사적 제117호로 지정됐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와 그 지지자들이 개경(開京)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漢陽城)으로 옮기면서 신도(新都) 경영을 착수했고, 이와 동시에 궁궐 조성을 시작됐다.

1394년(태조 3년) 9월 신궐조성도감을 두고, 심덕부와 김주, 이염, 이직 등을 판사에 임명해 실무를 담당하게 해 북한산에 터를 잡았다.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의 이궁 터를 마음에 뒀으나 새 왕조가 뻗어나갈 기세를 수용하기에 너무 좁다는 의견을 수용, 남쪽에 자리잡은 것이다. 그 해 10월, 태조는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12월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山川神)에게 고사했다. 이튿날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 낙성을 보게 됐다.

명칭은 <시경>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따내 ‘경복궁’이라 이름지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 소실됐으나 1867년(고종 4년) 흥선대원군이 재건했다. 한일강제병합 후 정면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세워졌으나 1996년 그 건물이 철거됐고,  1995년 강녕전, 1999년 자선당, 2001년 흥례문(홍례문)이 복원돼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창덕궁, 용케 살아남다

창덕궁은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로, 사적 제122호이다. 태종(太宗)이 즉위한 후 1404년(태종 4년) 한성 향교동에 이궁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완공, 창덕궁이라 명명했다. 이후 계속해서 인정전, 선정전, 빈경당, 정월전, 옥화당 등 전당을 건립했고, 1412년 돈화문을 세워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웠다.

창덕궁 역시 임진왜란으로 소실됐다가 1607년(선조 40년)에 복구를 시작해 1610년(광해군 2년)에 중건이 거의 끝났다. 시련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623년 3월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 1647년(인조 25년)에 이르러서야 복구가 완료됐다.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있었으나 그 와중에도 여러 건물이 비교적 잘 보존돼있으며,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모진 수모 겪은 창경궁

창경궁은 창덕궁과 같이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 1963년 사적 제123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궁궐이다. 1484년(성종 15년) 당시 생존했던 세조·덕종·예종, 세 왕후의 거처를 마련코자 옛 수강궁 터에 명정전, 문정전, 수녕전, 경춘전, 통명전, 양화당, 사성각 등을 지었다.

그러나 창경궁도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각이 모두 손실됐고, 1616년(광해군 8년)에 재건했다. 이후 발생한 몇 차례의 화재로 내전이 화염에 휩싸였고, 임진왜란 후에 재건된 명정전을 비롯해 명정문, 정문 홍화문 등의 외전과 1834년(순조 34년) 재건한 숭문당, 함인전, 경춘전, 양화당, 영춘헌 등의 내전이 남아있다.

창경궁의 배치는 동쪽 한가운데 ‘凸’자 모양으로 불룩하게 나온 중심부분에 홍화문, 그 문을 들어서면 옥천교, 건너면 명정문과 좌우 행랑채가 있다. 이 문을 지나면 뜰이, 직선상으로 볼 때 명정전이 있다. 순종이 즉위한 이후 창경궁은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되는데, 1909년(순종 3년) 일제는 궁 안의 전각들을 헐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했다. 또한 궁원을 일본식으로 변모시켰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1911년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으며,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산맥을 절단해 도로를 설치했다. 궁 안에는 그들이 좋아하는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1924년부터는 밤 벚꽃놀이를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정부는 ‘창경궁 복원 계획’을 세워 복원을 시작, 1983년 12월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다시 찾았다. 1984년부터는 동물원과 식물원 시설을 포함한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기 시작했고, 벚꽃나무를 소나무, 느티나무 등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진행해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창경원과 창경궁을 헷갈려하고, 심지어는 같은 궁임까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데는 이런 슬픈 사연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덕수궁은 불길한 궁?

▲덕수궁 중화전

덕수궁은 중구 정동에 위치한 조선시대 궁궐이다. 사적 제124호로, 1963년 지정됐다. 덕수궁이란 이름은 조선시대부터 존재해오던 이름이었다. 태조의 소어궁을 정종이 개성에 건립, 이를 덕수궁이라 명한데서 비롯됐다. 이후 태종이 서울로 재환도, 지금의 창경궁 부근에 궁을 세운 것 역시 덕수궁이라 했다.

지금의 덕수궁은 원래 세조의 큰손자 월산대군의 개인저택으로, 세조의 큰아들 도원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18세에 죽어 세자빈 한씨가 출궁하자 나라에서 지어준 집이다. 세자빈 한씨는 두 아들과 함께 살다가 둘째아들 자을산군이 왕으로 등극하면서 같이 입궐했고, 월산대군만 남게 됐다. 월산대군이 죽고 100여년이 지나 임진왜란이 발생, 의주로 난을 피했던 선조가 덕수궁을 행궁으로 정하고, 정릉동행궁이라 했다. 그러나 협소한 경내로 인해 계림군의 집을 행궁에 포함시켰고, 궁궐 내 각 관청을 궐문 밖에 인접해뒀다가 점점 확대, 임시 궁성을 형성했다.

선조는 승하할 때까지 이곳에서 내외정무를 보았으며, 광해군도 서청에서 즉위했다. 광해군은 1611년(광해군 3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이 행궁을 경운궁이라 불렀다. 광해군은 창덕궁에 거처하다 2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는 창덕궁에 거처하던 노산군과 연산군이 그 곳에서 폐위돼 불길한 궁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덕수궁은 역사와 함께 일희일비해왔다.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이 승리, 1905년 10월 일본의 압력으로 을사보호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됐으며, 그 와중에 중화전의 재건이 진행됐으나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듬해 4월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을 수리, 이름을 대한문으로 고쳤다. 1907년 7월 일제의 횡포로 고종이 퇴위, 태자 순종이 즉위하고 경운궁을 덕수궁이라 부르게 됐다. 시간이 흘러 고종이 승하하면서 덕수궁도 궁궐로서의 수명을 마쳤다.

6·25전쟁 전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석조전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이후 덕수궁은 정문인 대한문이 여러 차례 밀려나는 등 많은 변화를 겪었다. 현재는 대한문과 정전인 중화전을 비롯해 침전인 함녕전, 준명당, 즉조당, 덕수궁 내 유일한 2층 건물의 석어당, 석조전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집합소, 종묘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가의 사당이다. 종로구 훈정동에 위치해있으며, 1963년 사적 제125호로 지정됐다. 원래는 태묘라고 부르기도 한다. 종묘 정전 19실(室)에는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 신주를,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및 의민황태자의 신주를 모셨다.

▲종묘 정전

1394년(태조 2년) 한양으로 천도할 당시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동쪽에 종묘의 영건을 시작해 다음해 9월 1차 완공, 1546년(명종 1년)까지 계속됐다. 4개 궁과 마찬가지로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됐다가 광해군이 즉위되던 해 중건됐다.

정전의 남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공신당, 서쪽으로 칠사당, 바로 정전을 만날 수 있다. 정전의 서문으로 나가면 영녕전의 동문과 이어지고, 영녕전의 북동쪽으로 제기고가 있다. 정전의 북동쪽에는 전사청이, 남동쪽에 재실이 있다. 종묘는 1995년 해인사 장경판전과 석굴암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도심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4개 궁과 종묘, 버스를 타고 오가며 매일 보면서도 우리는 잘 몰랐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역사와 그 맥을 함께해온 궁궐은 그 무엇보다 가치있는 문화유산이다. 알고 보면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한다. 역사 속에서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던 왕을 비롯해 중신들이 정무를 논하고, 하루를 보내던 그곳을 찾아 걷고, 자세히 들여다보길. 창살문양이나 돌담까지도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 나름대로 멋을 느낄 수 있을테니 말이다.

자료협조 문화재청
도움말 문화재청 궁능문화재과 정성조 사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