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 그루누이의 향수'와 국화향
'살인자 그루누이의 향수'와 국화향
  • 김우종 (전덕성여대 교수, 문학평론가)
  • 승인 2010.04.23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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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리이든 아니든 서리는 영하로 기온이 하강해야 내리는 것이므로 첫 서리가 내리면 다른 꽃들은 다 얼어 죽고 해가 나면 걸레 조각들처럼 축 늘어진다. 끓는 물에 데쳐낸 시금치도 그처럼 축 늘어진다. 국화는 이렇게 다른 꽃들이 모두 추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죽은 뒤에 홀로 싱싱하게 생명을 유지하고 피어 있다는 것 때문에 더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자연의 경우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렸다면 무서리는 노오란 꽃잎이 피어나게 한 원인이다. 그러니까 무서리가 내리지 않았다면 노오란 꽃잎은 피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연 속의 국화는 이렇게 피지는 않는다. 다른 꽃들의 죽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남들이 죽거나 말거나 그와는 상관없이 아름답게 앞마당에도 피고 뒷동산에도 피고 그러다 가버린다. 그런데 이 시의 노오란 국화는 무서리가 내려서 다른 꽃들이 모두 몰사했기 때문에 핀 것이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라고 했으니까 이 국화는 남들이 다 죽어야만 피는 악의 꽃이 아닌가?

혹시 노오란 꽃잎이 피려고 무서리가 내렸다는 것은 국화꽃의 개화를 알리는 징조를 말한 것이지 그 꽃을 피우기 위해서 무서리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나올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 세상에 무서리가 내리고 다른 꽃들이 다 그렇게 몰사를 당해야만 피는 꽃은 없다.

국화는 무서리가 내리기 전부터 피어 있다가 무서리 때문에 남들 다 죽은 자리에 혼자 살아남을 뿐이지 그때 그렇게 남들이 죽은 다음 순서를 기다리다가 피는 꽃이 아니다. 어느 꽃이든 그 꽃들이 아무리 양심이 없더라도 남들이 죽어주기만 기다리다가 피는 경우는 없다.

ㄴ. '살인자 그루누이의 향수'와 국화향

이런 의미에서 제3연도 제1연 제2연과 함께 너무도 정확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전체 주제가 전쟁의 이미지로 모아지고 그런 죽음의 피와 눈물과 원한과 가족들의 슬픔을 마심으로써 아름다운 새 생명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 새 생명은 물론 일왕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로 만들어진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영화가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아름다운 여자들을 납치하여 찜통 속에 넣고 이를 원료로 해서 진짜 명품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체포되어 10만명이 모인 광장에서 처형을 가다리게 되지만 군중은 모두 그가 뿌린 향수에 취해서 서로 껴안고 달콤한 사랑에 도취한다.

서정주가 피어나게 한 아름다운 국화는 이와 같으면서도 그 범죄는 그 정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어나게 하기 위해 필요로 했던 제조 과정은 전 인류의 몰살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한 한 송이의 국화는 최고의 위대한 아름다움이며 그런 예술을 위해서는 그따위 하찮은 벌레들은 아무리 죽여도 좋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국민 절대 다수는 그 향수에 취한 탓인지 제조과정에 숨겨진 작자의 악마정신을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그루누이가 살인죄로 광장의 처형대에 올려졌는데도 달콤한 향수에 취하여 부끄러움 모르는 사라의 행위만 즐기듯이 <국화 옆에서>의 국화 향기에만 취해서 그 베일 밑에 숨겨진 악마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국화 옆에서>이야기는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가 된다.

ㄷ.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무서리

'무서리'는 단 한방으로 14만명의 생명을 죽인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말한다.

그것은 1945년 8월 6일 아침이었다. 이 날 미군의 B 29폭격기는 히로시마의 오타 강 위쪽 6000미터 고공에서 원폭을 투하했고 인구 약 40만명 중 25프로가 그날로 즉사했다. 폭풍과 함께 지열이 6000도로 상승하고 온 세상이 순식간에 날아가 벼렸으며 방사선 낙진으로 그 후에도 사람들이 계속 죽었다.

폭탄은 원자다시 나가사키에도 투하되었다. 두 차례의 원폭 투하의 피해자들 중에는 물론 징용으로 동원된 사람들을 비롯한 한국인들도 많았다. 한국인 피폭자 약 7만명 중 4만명 정도가 죽었다고 한다. 그 후 2만여명이 귀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