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사색 속에서 잉태되는 자연의 감동
오랜 사색 속에서 잉태되는 자연의 감동
  • 박기훈 기자
  • 승인 2010.05.10 1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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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마티스(Matisse)’, 김영희(金英姬) 화백을 만나다

[서울문화투데이=박기훈 기자] 김영희 화백(81)은 그림 속에 파묻혀 산다. 그녀에게 그림은 단순히 손가락 자극이 아니다. 앉으나 서나 풀을 뜯으나 걸어 다니나 누구를 만나고 있으나 그 순간순간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몇 달에 하나, 혹은 일 년에 한 작품이 나오더라도 얼마나 머리와 가슴으로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느냐의 집념이다. 작품 숫자에 집착하고 열광하는 오늘날의 세태를 뛰어넘는 진정한 예술가 김영희 화백을 그녀의 자택에서 만나고 왔다.

◆인고(忍苦)의 시간이 명작을 만든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문학, 철학, 예술 등 많은 것에 관심을 갖고 즐겼다는 김영희 화백은 그때 당시부터 그림을 그렸다. 2인용 밥상에 큰 청자나 백자를 놓고 수채화를 밤새 그려 부모님을 깜짝 놀라게 한 적도 있다는 그녀는 여러 분야에 재능있는 아이였다.

“어릴 때는 손으로 하는 건 못하는 게 없었죠. 의복을 만들거나 수선하기도 했었어요”

이후 화가의 길로 들어서 20여년 활동을 하던 그녀는 좀 더 많은 공부를 위해 일본과 영국 등지로 유학을 떠난다. 특히, 일본에선 57살이 되던 해 학교를 위해 건너가 살았던 4년을 포함해 지금까지 25년을 왕래하며 많은 활동을 했다. 백두산을 그린 그림으로 일본 현대 미술전에서 대상을 타기도 한 그녀는 일본 미술계에서 이미 유명인사다.

이외에도 대만, 중국 등 세계각지를 돌며 그림을 선보인 그녀의 작품이 과연 얼마나 될까 사뭇 궁금해 물어보니 뜻밖의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림이 너무 많아 천여 장의 작품을 태웠다는 것이다.

▲김영희 화백 집 한 편에 놓인 수많은 작품들

“화실에서 이쪽으로 이사 올 때도 많이 태웠고. 여기서 작년에 200장 쯤 더 태웠죠. 전 제 마음에 안 들면 그림에 사인 절대 안 해요. 그래서 손질해야 될 작품들이 천 장은 족히 있는데 이 나이에 언제 다 하겠어요. 장인이 가마터에서 도자기 깨듯이 태우는 거죠”  

‘아까운데 주변에 나눠주지 그러냐’는 얘기에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미완성된 것을 주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말로 일축하는 김 화백은 그림을 그릴 때 ‘한 번에 다 못 그리는’ 독특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

대상을 찾아가는 것도 그냥 ‘스윽 가서 싹하고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금강산을 그리기 위해 다섯 번이나 산행 길에 오르기도 했으며, 백두산을 그리기 위해 두 대의 트럭에 캔버스를 싣고 가기도 했다.

심지어 그동안 나온 마이산의 그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직접 그려보고 싶다는 마음에 초행길을 나서서 그 질감을 느껴보기도 했다. 그렇게 그림 그릴 대상을 스케치 하고 집으로 가져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일 년여의 공을 들여 작품을 완성한다.

▲김영희 화백 집 거실 벽에 붙어있는 마이산 그림

“자꾸 해체해나가면서 내 나름의 사색이 들어간 주관적인 그림을 그리죠. 비록 자연을 그리고 있지만 제 딴에는 복잡하게 구도를 잡고요. 그러니 제 그림은 순 사실이 아니죠. 구상(具象)의 경향을 따르고 있지만 반 구상에 속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시간을 많이 들여 작업할 때의 그 모습만 보면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 오랜 시간을 거쳐 정리되어 나온 작품은 다른 이들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작품이 돼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해주기 마련이다. 이토록 훌륭한 작품들을 그리는 그녀이건만, 지금까지 해온 것은 습작에 불과한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지금부터 10년이라는 세월만 확실히 보장된다면 뭔가 해야 되지 않겠냐는 생각을 매일 하면서 시간이 부족한 것을 아쉬워해요. 뭐랄까, 뭔가 팍 터지고 희열을 느낄 수 있는, 내 마음에 쏙드는 그림이 아직 안 나왔어요. 내 머리 속에 그 뭔가가 있는데 나오지 않았다는 느낌이랄까요? 그림에 대한 부분에서 지금도 많이 아쉬워요”

◆우리나라 화단(畫壇)을 논하다

일본에서 평론가들의 호평뿐만 아니라 각종 상들을 휩쓸며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김영희 화백. 어떤 점이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혹자는 김 화백의 그림이 일본풍은 아닐까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일본의 색을 띠는 조형미 넘치는 작품은 하지 않는다. 언제나 우리나라, 우리 것을 주제로 한다.

“어떤 것을 그리던 항상 우리나라를 주제로 하고 우리 것을 세계화 시켜야 해요. 제가 지금 유화를 하지만, 그렇다고 서양의 유명한 옛날 작품들을 따라 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우리만의 철학이 필요해요”

그녀는 일본에 있을 당시 많은 전시를 보고 미술관을 돌아다녔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림을 잘 그리고 세계적이라고 평한다.

이제는 외국 어디를 가도 미술 실력이 떨어지지 않는 우리화가들이 우리나라 걸 가져가서 자랑해야 할 때이다. 물론 서양엔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들이 존재하지만 그건 그들이 살았던 당시의 것일 뿐, 현대에 있어선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미적 안목과 솜씨는 인정받을 만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화단의 문제점은 없는 것일까? 그녀는 “요즘 우리나라엔 화가가 너무 많다”고 지적하면서 문화센터 이야기를 꺼냈다.

“화가들이 밥 먹고 살려고 문화센터에서 사람들 가르치다가 돈 맛을 알게 되서 아예 그 자리에 눌러앉게 되고, 문화센터에서 그림 배운 소위 돈 좀 있고 후광 있는 사람들이 전시회 한 두 번하고 하면 다 화가로 인정받고 그렇더라고요”

예술적 능력 개발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며 배를 굶주려가면서까지 자신이 하고픈 그림하면서 죽도록 고생한 사람들은 돈이 없어 화가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혹은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연구도 하지 않은 채 돈 있는 자들의 실력양성에만 매달리며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인재들이 많다는 사실은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같이 나이 많은 이들은 그렇다 쳐도, 세계의 미술사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젊은 화가들이 자기 공부를 안 해서 매일 그 자리에 머무는 걸 보면 참 슬프죠. 고생한 사람들이 뒷전인 우리 미술계를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이 불편해요”

그녀는 우리나라의 전시회 문화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던졌다. 우리나란 세계에서 전시회 관련 비용이 제일 많이 들어가는 나라 중에 하나라고 한다. 이는 엽서만한 간단한 책자를 나눠주는 외국의 일반 전시회 모습에 비춰볼 때 물자 낭비이다.

김 화백은 “우리나라는 화가들이 힘들어 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말을 이어갔다.

“화랑 빌려야하고, 준비하는 것도 힘들고, 오픈기념식에 파티도 너무 많아요. 전 그런 게 싫어요. 우리나라 화가들이 발전하려면 돈을 많이 아껴야 해요. 팜플렛도 많이 하고 뿌리고 하는 것도 하나의 폐단이라고 봐요”

◆실력과 겸손을 두루 갖춘 진정한 예술인

김영희 화백에겐 같은 길을 걷는 딸이 있다. 산업디자인 쪽으로 외도를 하다 순수예술로 돌아와 누드 크로키로 주목받고 있는 예술가 김아원씨다. 김 화백에게 딸 자랑을 부탁하자 ‘처음에는 천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더라’고 농담을 건넨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아닌 화가의 입장에서 볼 때 ‘특별한 인재’라고 말을 이어갔다.

▲누드 크로키 예술가 김아원

“인체를 표현하는 게 다른 화가들보다 조금 달라요. 제가 본 중에 크로키를 저렇게 재밌고 특이하고 단단하게 그리는 사람을 못 봤어요. 남들 10장도 못 그릴 때 60장씩 그리기도 하는 속필이기도 하고 포인트를 잡는 것도 재미있더라고요”

김영희 화백에게 ‘모녀전을 준비해보는 것은 어떠냐’며 앞으로의 전시계획을 묻자 “내놓을 만한 게 없다”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전시회를 하려면 정말로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자타가 공인이 하는 기가 막힌 그림이 백 점 중에 단 한 점이라도 있어야하는데 아직 제 마음에 딱 드는, 남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 없다고 생각해요”

김 화백 정도의 위치에 서있는 화가라면 초대전에 관련한 소식이 자주 들리는 것이 당연지사겠지만, 그녀는 초대전을 별로 안 좋아한다며 손을 내저었다.

“요새 초대전들은 그 목적이나 초대하는 주체들이 장사를 위해 하는 것들이 많더라고요. 물론, 진짜 제 그림을 알아줘서 초대하는 거면 다르겠지만요. 전 누가 와서 ‘당신 그림을 갖고 싶다’ 이러면 몰라도 제 그림을 팔아보려고 화랑에 기웃거리거나 남에게 절 해본적도 없어요. 할 줄도 모르고요”

지금껏 살면서 스무 번 정도 초대전을 한 것도 많이 한 것이라며 “우리 나이 또래면 머리길고 빼빼마른 사람 정도로 저를 알겠죠”라는 겸손함으로 예술인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는 김영희 화백. 이러한 그녀가 스승 없이 혼자 독학으로 그림을 일궈왔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내 그림에 손가락 하나 갖다 댄 사람이 없다”는 그녀는 지금은 고인이 된 신영헌씨를 비롯해 유영태, 전혁림, 김환기 화백의 그림을 좋아한다고 했다.

“외국작가들 같은 경우엔 고흐도 좋아하고 보나르도 좋아하고 뭉크도 좋아해요. 특히 마티스를 좋아하고요. 예전에 한 평론가가 저보고 한국의 마티스라고 평한 적도 있었어요(웃음)”

어릴 때부터 책을 엄청 많이 읽어 “만약 그림을 하지 않았다면 문학인이 됐을 것”이라고 까지 얘기하는 김영희 화백은 항상 머리에 글이 떠올라 시간만 허락된다면 수필을 쓰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언젠가 오랜 시간의 예술혼이 담긴 그림과 함께 멋진 글이 어우러진 시화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그 날을 한 번 상상해본다.

김영희 화백 프로필

1930년 경남 진주 生
경남여고 졸업
일본 동경 동양미술학교 졸업
일본 외무부장관상, 일본 현대 미술전 대상, 일본 미술 출판상 외 다수수상
개인전 20여회
그룹전 330회 이상 출품
현 한국미술협회 회원, 상형전 회원, 대한민국 아트미래국제전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