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꼭 '노오란 꽃잎'인가?
왜 꼭 '노오란 꽃잎'인가?
  • 김우종 (전덕성여대 교수, 문학평론가)
  • 승인 2010.05.13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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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시에서는 그런 숫자까지 밝힐 필요는 없다. 그냥 전쟁 속에서 남들은 다 죽었는데 히로히토 혼자만 살아남았다고 하면 된다. 다만 무서리가 내려서 하룻밤 사이에 다른 풀들 다 죽었는데 국화만 혼자서 살아남았다고 하면 가장 적절한 감동적인 은유법이 된다.

일왕 히로히토의 히로시마 시찰 장면을 보면 서정주의 무서리와 국화가 그대로 떠오른다.

그는 원폭이 투하된 후 군복 차림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했었다. 다른 때처럼 금빛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지는 않은 모습이다. 그것이 국민에 대한 예의였을 것이다.

원폭 투하 후 9일 만에 8.15 항복 선언이 있었으니까 군복 차림이면 원폭 투하 후 약 일주일 사이에 찾아간 것이다. 뜨거운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며 불타버린 폐허를 시찰하는 히로히토… 그야말로 국민이 다 죽고 난 공동묘지에 혼자 씩씩하게 살아남은 모습이다. 무서리가 내려서 다른 꽃과 풀잎들이 하루 밤 사이에 다 얼어 죽고 축 늘어진 자리에 혼자 살아 있는 국화와 과연 무엇이 다르랴.

서정주의 상상력은 이런 점에서 참으로 놀랍다.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를 찾아 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믈 것이다.

8.15 항복 선언(실제로는 선언문에는 항복이란 말은 단 한 마디도 없다.) 후 일본의 도쿄만 해상의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문 조인식이 있었을 때 일왕은 체면을 유지하고 그 대신 시게미쓰重光 마모루 외무대신을 보냈다.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상해에서 왼쪽 다리를 잃고 살아남은 외교관이 절뚝거리며 나타났으니 한국인에게는 더욱 감개무량한 장면이다.

그 후 전범 재판이 열리고 A급 전범들은 사형이 시작되었다. 시게미쓰 등 몇몇은 나중에 석방되어 사형을 면했지만 특급 전범자인 일왕은 그런 재판도 안 받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훗날 사형당한 전범들도 야수쿠니 신사에 합사되면서 일본 국내에서도 말썽이 일어났었다.

이때 최고 통수권자였던 일왕은 천황폐하'의 명예를 그대로 유지하며 혼자 살아남았으므로 그는 혼자 살아남은 국화가 된다. 실제로 세상에 알려진 그의 상징표도 국화이고.

맥아더 사령관이 그렇게 일왕만 특별히 재판 없이 살아남게 했다. 다만 일왕은 신의 위치에서 내려와 인간의 위치에서 새로 태어난 것이다.

이런 일왕의 변화는 그가 남들 모두 동사한 자리에서 혼자 요행히 살아남은 국화에 비유 될 수도 있지만 이에 대한 서정주의 인식은 달랐다. 그는 일왕의 변신을 더 멋지고 위대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징기스칸이나 나폴레옹 같은 위대한 지배자, 정복자에게만 허락된 수많은 인명 학살의 결과로서, 비록 항복은 했더라도 더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본 것이다.

나폴레옹이 그렇게 많이 학살과 파괴를 저지르고도 패배한 후에는 살아남아 센트 헬레나 섬에 유배된 것을 여전히 멋진 모습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이와 비슷하다. 그렇지만 그 정신은 아주 다르다.

김동인의 <광화사>에서 화가가 소녀의 목을 졸라 죽였기 때문에 먹물이 눈동자에 찍혀서 명화가 탄생 된 것, 또는 <광염 쏘나타>에서 천재음악가가 살인과 방화들을 함으로써 역사에 남을 명곡이 만들어졌다는 것처럼 이것은 전쟁을 찬미하고 우리 민족을 배반한 악마주의자의 목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ㄹ. 왜 꼭 '노오란 꽃잎'인가?

제4연은 국화의 의미를 더욱 확실하게 전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제1연 제2연에선 그냥 국화꽃이라고만 했다. 그런데 제4연에서는 '노오란 꽃잎'이라고 색깔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