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균의 배우열전⑤
김은균의 배우열전⑤
  • 김은균 연극평론가
  • 승인 2010.05.28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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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한 영국 신사 풍의 배우 - 박 웅

▲연극 '숲귀신' 중 박웅(오른쪽)
요즈음 연극계가 국립극단 법인화 문제로 시끄럽다. 연극협회 차원에서 소통의 장을 마련한 지난 5월 13일 아르코 3층 다락에서 선생을 만나 뵈었다.

배우협회와 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난 행정가로서 평생 무대만을 지킨 배우로서 선생은 현재의 연극현상은 현장과 행정이 분리가 되는데서 기인된 일이라고 진단하셨다. 그는 초대 배우협회를 비롯하여 3대에 걸쳐서 오늘의 연극배우협회로 만들었고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으로서도 연극을 대학로에서 전국으로 확장시키는데 초석을 다진 바 있다.

“1991년 초예요. 그대 연극배우로서 10년 이상을 꾸준히 한 사람을 모아 보니까 대략 100명 정도가 되는 거예요. TV는 탤런트 노조가 있었고 영화 배우협회 그리고 성우들도 협회가 있었고 개그맨들도 희극인 협회가 있었는데 연극배우는 그런 개념이 약했었습니다. 그래서 1991년 4월15일 문예진흥원 강당에서 창립총회를 하게 된 것이었죠. 제가 나이가 많아 초대회장을 한 것이 그대로 1대 2대 3대 까지 이어오게 된 것이죠.

1997년 배우협회 회장을 하면서 연극협회 이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때가 막 IMF가 터졌을 때라 어느 분야보다도 연극계가 어려울 때였어요. 그래도 정부로부터 지원 받기로 한 공연예술기금 100억을 지원 받는데 온힘을 쏟았고 재직하면서 2억이었던 사랑티켓의 규모를 10억까지 늘렸던 것하며 바탕골소극장과 화수회관 연습실을 연극협회 직속으로 인수한 것하며 연극의 교과목 채택을 위한 기초적인 초석을 다진 것 등  소리 나지 않게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였다고 자부합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문경새재의 작은 마을이었다.

“초등학교는 거기서 다녔고 육이오 사변이 나고 얼마 후에 부산으로 이사를 해서 거기서 중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제가 15세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는 전형적인 저희세대의 삶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빗나갈 수 있는 환경이었는데 남들에게는 절대로 가난한 티를 내지 않았어요. 대신 그때 탈출구로 삼은 것이 영화였습니다.”

이후 고등학교 시절 <원술랑>벽보를 보고 찾아간 곳에서 김춘추장군역할을 맡게 되었고  신문광고에 동아방송 전속성우를 뽑는다는 광고를 보게 되고 1962년 합격을 하게 된다. 이때 동기로는 박정자, 사미자, 전원주, 김무생, 홍계일,이완호,김영식,김수희,장미자씨 등이었고 그 면면만 봐도 화려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동기인 장미자씨와는 평생을 같은 길을 가는 삶의 동반자로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러나 경상도 출신이라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사투리였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제가 지방 출신 이다보니까 경상도 사투리가 많이 배어있었어요.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 부산에서 일할 때에도 표준말을 구사할 수 있었고 특별히 문제를 느끼지는 못했었지요. 그런데 역할의 비중이 커진다든지 아니면 섬세한 연기가 필요한 시점에는 점점 힘들어 지기 시작하더군요. 대본이 나와서 남들은 책읽기를 끝내고 인물분석에 들어가 있을 때 저는 발음이나 억양을 가지고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고통스러웠지만 노력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지요.”

처음에는 안평선씨가 있는 제작극회 단원이었고 이어 극단 자유의 식구로서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하였다. 극단 자유는 일종의 동인제 시스템이었는데 자기의 할 일을 따로 갖고 있으면서 연극할 때 모이는 방식이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라이프스타일에 잘 맞았던 것이다. 그러한 방식이 방송이며 TV 그리고 영화에까지 그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얼마 전 <엄마를 부탁해>를 끝내고 안톤 체홉의 <숲귀신>연장공연을 위해 연습하고 있는 그는 현재 대학로 발전위원회 이사장을 맡아서 연극인들이 마음 놓고 연극할 수 있는 대학로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무대와 현장을 누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