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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질(原形質)을 찾다
박다원 작가는 그림을 굉장히 좋아하는 양친 덕분에 언제나 그림 속에 파묻혀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만화책 보듯 세계유명작가들의 작품들을 훑어봤다. 그녀는 저절로 화가로 만들어질 소양들을 갖추며 자랐다.
하지만 그림은 고 3때부터 시작했다. 남들보다 훨씬 늦은 시기의 출발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많은 선생님들이 미술부를 추천했다. 그러다 고 3이 됐을 때 ‘선생님들이 왜 6년 동안 이렇게 미술을 하라 하실까?’ 하는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그 해 5월, 선생님을 따라 처음으로 미술학원을 갔다.
“학원에 처음 갔다가 집에 오는 버스에서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게 다 있네?’하는 생각이 딱 저를 잡더라고요. 이때부터 발목 잡혀서 내 인생 끝난 거예요(웃음)”
이후 영남대 회화과에 진학한 그녀는 졸업하던 해인 1980년 제1회 대구미술대전 금상 수상을 시작으로 각종 상을 휩쓸었다. 28세가 되던 해에는 최연소 목우회 회원이라는 타이틀도 거머쥔다. 이는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는 대단한 기록이다.
당시 박 작가는 지금처럼 추상이 아닌 구상 작품들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구상과 비구상의 접점이 되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채와 함께 조형성 있는 작품들을 했다. 그러다 2000년 초부터 지금의 추상으로 바뀌면서 점점 심화된 작업을 하게 됐다.
“개인적으로 다사다난한 일들을 겪으면서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됐죠. 그러면서 자극이 바뀌었어요. 게다가 당시에 노자, 장자의 책들을 접하면서 마음을 비우는 어떤 계기가 됐어요.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본질에 다다르는 거죠. 그렇게 되니까 저절로 그림의 방향이 바뀌게 됐죠”
어느 날 먹이 무협소설 속의 축지법처럼 갑자기 확 다가오는 기분이 들어 그것을 그대로 캔버스위에 옮기기 시작해 지금의 추상화를 추구하게 된 그녀는 예전의 작품세계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당시엔 굉장히 저 자신한테 충실한 작업이었었죠. 또 그때 작업도 지금하고 전혀 연관이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그때는 두텁게 마티에르(matiere)가 있게 덮어가는 작업이었고, 지금은 한순간의 작업이라는 그 상황만 바뀌었죠. 평생을 통해서 작품 속에 똑같이 점과 선을 중요시 생각하고 작업했었어요”
소통과 교감 속에 꽃피는 에너지
현재 박다원 작가는 갤러리미(강남구 청담동 소재)에서 오는 6월 17일까지 초대전 <Wave-now here>를 선보이고 있다.
“점과 선이라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호흡이자 삶의 여정이기도 하죠. 또, 나이면서 너이고, 우주의 어떤 공간이면서 세포이면서 동시대적인 모든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Wave-now here>라고 표현했어요”
웨이브(Wave)라는 것은 파동이면서 빛이고 에너지다. 그녀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에너지다. 이러한 그녀에게 있어 그림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져봤다. 그녀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영적으로 진화하면서 성장하는 동시에 깨달음을 얻고 경험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거라 생각한다”며 말을 이어갔다.
“그림은 제가 성찰해가는 과정 속에서 나를 들여다보는 어떤 하나의 도구이자 공간이라 생각해요. 내가 점점 발전한다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거죠. 이제는 그림이 저절로 나를 그렇게 만들어 가는 거 같아요. 그림이 나를 좀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면서 본질에 닿게 하고, 그러다 보니까 마음을 비우게 되면서 좀 더 좋은 사람으로 성장도 시키는 거죠”
그녀의 그림을 보는 많은 이들은 그 속에서 에너지를 많이 얻어간다. 그녀는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가서 대학에서 따로 강의하는 교수, 어린 학생들에게 그림을 보여주면서 좋은 에너지가 나온다고 설명하는 선생님, 생각이 복잡할 때 그녀의 그림을 보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활력을 얻는다는 CEO 등을 보며 자신의 생각과 상통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제 그림을 보면서 복잡한 사회에서 마음을 비우고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쉬어갈 수 있는 하나의 호흡인 거죠. 우리가 서로 소통하면서 우주와 교감도 하고, 나의 작은 부분들이 모아져서 에너지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림 그릴 때가 행복한 그녀
자신의 작품 한 점 한 점에 사인 할 때마다 모든 것을 쏟아낸다는 박 작가는 모든 작품들이 다 사랑스러워 어떤 때는 시집보낸 것들이 눈에 아른거릴 정도라고 한다. 그만큼 캔버스에 그녀의 모든 것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캔버스와 마주 보고 수도 없이 대화를 하면서 계속 사색하고, 사유하고, 생각해요. 그렇게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툭하고 던져놓는거죠. 끝내놓고도 바로 세상에 못 내놔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아무것도 안하면서 작품을 계속 쳐다보다가 이제 됐다 싶으면 사인을 하죠. 애를 낳았으면 얼굴 익히는 과정도 필요하니까요. 이러한 보이지 않는 교감이 작품을 또 만들어가는 거 같아요”
그녀는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그려지는 것이다. 행위자체는 그녀가 하지만 오랜 사유 속에 마음이 비워진 상태에서 저절로 아주 편하게 움직인다. 속에 들어있던 내공이 가득 차 넘쳐 나오는 일필휘지의 작업인 셈이다.
“이런 부분들이 결국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다 축적됐다가 어느 순간 때가 됐을 때 작은 파동들이 새순이 올라오듯 툭툭 올라오는 거 같아요”
오랫동안의 사유와 사색의 단계를 거치는 박다원 작가는 평상시 생활자체가 그림을 위한 하나의 작업이다. 화실에 있을 때나 컴퓨터를 하면서 놀 때나 음악을 듣고 딴 일을 하면서도 늘 그림을 생각하는 그녀는 영화를 자주 본다고 한다.
“영화도 많이 볼 땐 혼자서 하루에 3편정도 봐요.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표현하는가’ 등을 엿보면서 세상과 소통을 하는 작업의 한 일환인거죠”
취미가 뭐냐는 질문에 숨쉬기라고 웃으며 대답한다.
“참 재미없게 산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하지만 작가는 그림을 위해 많은 부분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 같아요. 그렇다고 제가 불행한 건 아니죠. 그림을 그리면서 늘 행복하니까요. 게다가 제 그림을 통해 사람들이 위안을 줄 수 있는 가장 큰 봉사도 하고 있으니 언제나 즐거워요”
시간이 지날수록 감각이 확장되고 더 많이 보이고 더 새롭게 들린다는 박다원 작가. 그녀는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초감각적으로 세상의 더 많은 것들을 인지하기에 언제나 행복하다.
뉴욕의 에너지를 느끼고파
브라이스 마던, 사이 툼벌리, 앤디워홀을 좋아한다는 박다원 작가. 그녀에게 스승이란 스치는 모습으로도 많은 걸 느끼게 해주는 작업의 지원군이다.
“나를 가르치셨던 선생님들의 지나가듯 스친 한마디들이 시간이 지나 깨치고 알게 되니 나와 인연 짓는 사람들이 모두 저의 스승이라는 것을 알게 됐죠. 선생님들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저에게 많은 깨우침을 주신 듯해요”
향후 몇 년간 개인전 발표와 함께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아트 대구(Art Daegu) 2010, 상하이 아트페어 등 국내외 아트페어 참여 일정이 잡혀 있는 박다원 작가는 올해 생애처음으로 목표라는 것을 처음으로 세워봤다.
“3년여 정도 더 많은 작업을 통해 내공이 깊어지고 자신감이 충만해져 확실히 준비가 됐을 때 미국 뉴욕에 가서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제가 자신이 있을 때 가면 뭐든지 제대로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사실 그녀는 2001년 뉴욕의 일본계 갤러리인 텐닝갤러리에서 초대를 받았었다. 하지만 당시 9·11 테러가 발생한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던 탓에 기회가 무산됐다.
“아쉬움이 많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라 생각해요. 그때는 그림이 바뀌고 있는 시점이어서 내공이 덜 쌓였었거든요. 오히려 지금이 더 좋은 시점이라고 생각해요. 뉴욕은 모든 에너지를 가진 이들의 총 집합체잖아요. 제가 그림을 그리는 게 에너지의 작업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전 거기가면 신날 거 같아요. 피드백이 바로 되니까요. 많이 기대되요”
그녀는 미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조지 부시 전(前) 미국 대통령과의 인연이 그것이다. 2006년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 일행은 경주를 방문하기로 예정돼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안동으로 행선지를 바꾸게 된다. 아무런 준비도 못한 안동시에서는 증정할 선물을 고민한 끝에 한국적 미감이 있는 추상화 작가를 찾게 됐고, 수소문 끝에 박다원 작가에게 작품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당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린 작품 여섯 점과 20호 짜리 일반 작품 한 점을 드렸어요. 상당히 저한텐 영광이었죠. 작품 활동을 더 열심히 하라는 계시로 받아들였어요”
이처럼 우리나라 추상화의 대표작가로 우뚝 선 그녀가 만일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어쩌면 시집 잘 가서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건 운명인거 같아요. 그림을 안 했으면 내안의 에너지를 어떻게 어떤 식으로 분출했겠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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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 / 정리 박기훈 기자 / 사진 성열한 기자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