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칠로 한국의 혼을 깨우다
옻칠로 한국의 혼을 깨우다
  • 박기훈 기자
  • 승인 2010.05.28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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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의 영혼에 옻을 입히는 전용복 장인

 

항상 “나는 조선의 옻칠쟁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사는 전용복 장인은 국내에서 옻칠작가로 활동하다 일본의 유서 깊은 연회장 메구로가조엔의 옻칠 작품을 3년에 걸쳐 복원해내며 세계적인 칠예작가로 우뚝 섰다. 가난과 슬픔으로 얼룩진 유년시절을 거치고 난 뒤 우연히 마주친 옻칠의 세계에 매혹되어 전 생애를 옻칠에 바쳐 온 그는 지금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작품 활동과 제자 양성에 힘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거공간에 그의 작품을 새겨 넣어 예술적 감각이 스며있는 주택을 만들어보기 위해 국내에 연구소까지 만들었다. 모든 이들에게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에까지 옻을 입혀주고 싶다는 생각하나로 한시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는 전용복 장인을 만났다.

 

 

우리 것에 무지(無知)한 현실

우리는 옻에 대해 말하면 피부에 옮아 붓는 정도의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뿐, 그 옻을 얻는 방법이나 기타 여러 가지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옻나무는 일반적으로 보통 20년 정도 돼야 온전하게 옻이 나온다. 그 20년간 적당하게 영양을 공급해주고 정성으로 관리를 잘해야 한다. 옻은 보통 6월~10월까지 채취한다.

옻나무에 상처를 내면 순간적으로 자신의 몸을 치유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물체가 옻이다. 그렇다고 매일 상처를 주면 죽어버린다. 5~7일에 한번 상처를 주기 시작해 스무 번 정도 가능하다. 이렇게 채취된 옻의 양은 나무 한 그루에 100cc 정도 된다. 이후 20여년을 또 기다려야 한다.

이렇게 어렵게 뽑아낸 옻은 원래 백갈색이다. 습도를 날려 보내는 정제 과정을 거치면 투명하게 된다. 여기에 색상이 있는 암채(岩彩, 광물질(鑛物質)을 원료(原料)로 하여 만든 채료(彩料)), 혹은 별도의 별도의 안료를 옻에 섞으면 어떤 색도 가능해진다.

아무리 예쁘게 칠해놔도 습도과 온도가 안 맞으면 다른 색이 나온다. 옻칠은 건조의 개념이 아닌 ‘자기 몸의 고체화’ 과정이다. 온도와 습도의 컨트롤을 통한 그 과정이 색을 내는 중요한 핵심이 된다.

전용복 장인은 옻칠이 우리 것이라고 얘기하는 문화인들조차도 이러한 메커니즘을 모르는 것은 부끄럽고 답답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제가 가끔 일본에 있다가 한국에 오면서 작품을 위해 옻을 가져오면 세관에서 ‘당신 옻닭 장사냐’고 묻습니다. 통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심각한 문제는 뒷전으로 미룬 채 정부의 지원에만 불만을 품는 장인들의 안이한 태도에 대해 쓴 소리를 던졌다.

“우리나라 인간문화재급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저 국가에서 돈 많이 안준다는 불만들  뿐입니다. 분명히 얘기하자면, 국가가 장인들에게 ‘인간문화재’라는 관(官)을 주고, 거기에 돈까지 주는 그런 나라는 세계에 거의 없어요. 국가에서 지정하는 아주 우수한 장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고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까지 해주는 데 국민들의 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바로 잡도록 더 노력해야 하는 건 아닌지 궁금합니다”

문화는 향유하는 자의 것

china는 도자기, japan은 옻칠을 의미한다. 첫 글자가 대문자면 한 나라를 뜻하는 고유명사지만, 소문자로 사용될 경우엔 그 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을 말한다. 그러나 아직 korea는 없다.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우려를 금치 못한다.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세계에서 인정해주는 그 무언가가 없다는 현실. 하지만 전용복 장인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물론 그 국가를 상징하는 문화의 존재가 있다는 게 나쁜 것은 아니죠. 근데 우리가 너무 안타까워 할 건 없다고 봐요. 오히려 그 하나에 얽매여서 우리가 가진 수많은 것들이 묻힐 수도 있으니까요”

옻을 일본에 전해 준 이는 우리다. 그러나 이를 문화로 꽃피우고 세계에 널리알린 이는 일본이다. 원래 우리의 것을 빼앗아가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었다며 분노할 수도 있는 일이건만, 전 장인은 “문화는 향유하는 자의 것이지 만든 자의 것이 아니다”고 얘기한다.

“막사발 같은 경우도 우리에겐 개밥 그릇 같은 거였어요. 이런 우리 것의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문화로 향유하면서 국보로 만든 민족이 누굽니까? 옻칠의 경우도 쇼토쿠(聖德)태자가 왕인박사를 모시고 가 백제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절을 만들 때 다 사용했잖아요. 그게 옻칠의 예술적 시작점이기도 하고요.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다 버릴 때 일본은 국가적 보물로 생각한 거지요. 그러니까 ‘그거 우리 건데’ 하고 얘기하는 거는 ‘우리는 참 부끄럽다’와 같은 의미예요”

그렇다. 우리는 다이아몬드 원석이 있음에도 볼품없다고 던져버렸다. 이웃나라는 그 가치를 알고 버려진 것을 주워 재가공해 빛나는 다이아몬드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과연 남을 흉볼 수 있을 것인가.

 

▲조선일보 창간 90주년 전용복 특별 초대전 <만년의 빛- 전용복 칠예전>

 

목숨을 걸면 최고로 돌아온다

전용복 장인의 작품은 일본풍이라는 오해를 많이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서 활동하며 그곳에 거처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나라 사람 흉내 내면 그 사람이 빛을 볼 수 있을까요?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전 일본에서 한국냄새를 냈기 때문에 오늘날 이 자리에 있는 거죠. 물론 누군가가 정말 멋진 걸 만들어내면 그걸 응용안할 이윤 없겠죠. 하지만 현재로서는 일본의 어떤 기법들을 배우고 싶다 생각해 본적은 없어요”

또한 ‘자개만 달려있는, 까만색을 띠는 것’만이 옻칠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린, 아름다운 색들로 이뤄진 것들을 추구하는 것도 이런 오해에 한 몫 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본적으로 우리들이 옻에 대해 그동안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 전 장인은 “저를 포함한 옻을 가지고 작업한 이들의 모든 책임”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이토록 좋은 소재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일침을 놓았다.

“정말 옻칠이라는 건 연구하고 분석하고 노력하면 엄청나게 좋은 소재예요. 이렇게 좋은 소재를 갖고 있으면서도 일부 ‘전통적인 것을 하기에 밥 못 먹고 산다’고 자랑처럼 얘기하는 장인들을 보면 참 부끄러워요. 이런 소재와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렵다고 하는 건 솔직히 엄청 게으르거나 타성에 젖어 앞을 바라보는 눈이 없거나 둘 중 하나예요. 남들은 제게 ‘당신은 했다하면 다 성공한다’고 말해요. 당연하죠. ‘목숨을 걸고’ 하는데 안 될 리 있나요”

그는 일본의 국보적 건물인 메구로가조엔의 복원공사를 맡아서 진행했다. 처음에 주위에선 전부 사기꾼이라 했다고 한다. 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옻칠을 전공한 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3년간의 사투 끝에 보란 듯이 해냈다. 연인원 10만 명이 투입되어야 해낼 수 있다는 방대한 작업량이었다. 무려 10톤의 옻칠이 사용됐다. 그는 일본인들의 놀라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전용복 장인의 작품으로만 채워진, 일본에서 1200평 남짓한 세계 최고의 옻칠미술관인 이와야마 칠예미술관을 혼자 힘으로 7년을 운영했다. 당시 시와의 모든 약속이 다 되어있는 상황에서 시장이 바뀌며 모든 것이 무산돼 철거 위기까지 놓였었다. 결국 그 자신이 운영하겠다고 선언했다. 주위에선 ‘개인이 하면 6개월 안에 문 닫는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러한 우려는 7년이라는 시간 앞에 큰 오산이었음이 증명됐다.

시계만 해도 그렇다. 옻칠을 시계에 붙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의심했을 때 그는 최고가 5,250만엔 짜리를 포함 30개를 다 팔아치웠다. 그것은 그의 말처럼 ‘목숨걸고’ 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의 인재양성에도 문제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옻칠을 가르친 역사가 40년 가까이 된다고 한다. 그렇게 40년을 가르쳤지만 ‘이걸로는 밥 먹고 못산다’며 졸업과 동시에 일반 사회인이 된다고 한다.

“가르칠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이 가르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죠. 옻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수라는 명함 달고 대학에만 안주한 채 가르치는데 제자들이 어떻게 밥을 먹고 사나요. 전 결심을 굳혔어요. 한국에 아카데미 하나 만들어서 진짜 칠장을 만들 생각예요. 저한테 6개월만 배우면 대우받고 밥 먹고 살게 해줄 거예요. 학비만 많이 들어가게 4년이 왜 필요합니까. 부족한 것도 선생이 잘하면 다 가르칠 수 있죠. 액세서리 같은 거 옻칠로 잘 만들면 얼마나 이쁜데요. 오리지널이 아니니까 갖고 싶지도 않고 싫은거죠”

그는 아카데미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옻칠 미술관도 계획하고 있다. 국가에 신세지는 것을 싫어해 자신의 재량껏 준비 중이라는 그는 단순한 장인을 넘어 정치척 목적이 배제된, 진정한 한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를 돕는 1세대가 되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일본에 제 제자들을 비롯해서 팬들이 참 많아요. 몇 십 만명 정도 돼요. 그러다보니 한국 문화도 좀 느낄 수 있는, 우리 전통 무쇠 솥에서 누룽지도 한번 먹어볼 수 있는 그런 문화컨텐츠가 합류된 미술관을 만들고 싶어요”

 

 

진정한 전통을 이어가다

전용복 장인은 이번 조선일보 90주년 초청 전시회에서 우리 고구려 벽화에서 나타난 특징들을 옻칠을 통해 현대적으로 조명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적 기법인 옻칠을 통해 작업한 하나의 상업적 작품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이는 ‘옛것을 그대로인 것을 지키는 것’만이 전통의 보존이라고 생각하며, 한 발짝 더 나아가면 무례라고 치부해버리는 우리의 생각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전용복 장인은 ‘전통은 항상 시대와 함께 변해가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봐도 전통은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쭉 변화해왔어요. 도자기를 한 번 보세요. 삼국시대는 토기, 고려시대는 청자, 조선시대는 백자잖아요. 우리 선조들이 눈앞에 나타낸 역사를 보고도 그걸 못 느끼는 게 너무 안타깝죠. 대체 역사의 언제부터가 전통인지 그 기준을 묻고 싶어요”

자기 자신의 모든 작품 하나 하나가 다 목숨을 걸고 만드는 역작이자 사랑하는 자식들이라는 전용복 장인. 이러한 그의 작품 중 ‘사계산수화’와 ‘느와르’는 세간에서 가장 유명하다.

‘사계산수화’는 길이 2미터가 넘는 패널 11개가 쓰인, 기초칠에만 무려 3개월이 걸린 대작이다. 이 작품은 한국과 일본에서 내려오는 우수한 옻칠 기법들이 총 망라된 소중한 희대의 역작이다. 그 당시 일본식으로 표현해 달라 해서 트러블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 최고의 옻칠작가로 알려진 오가타 코린의 표현 방식으로 해달라는 주문이 있었죠. 저는 그 시대의 산물은 그 시대 것일 뿐, 왜 그것을 모방하고 답습해야 하나며 제가 구상한 대로 하지 못할 바에는 그만두겠다고 했죠”

‘느와르’는 메구로가조엔이 새로 개축하면서 서양의 비즈니스맨들을 위해 만든 프랑스 풍의 바(bar) 공간이다. 그는 이곳의 벽화 천장을 무한한 은하계로 설정하고 신비스러운 느낌을 표현해냈다.

그런데 이 공간을 꾸미는데 같이 작업에 참여한 이가 있다. 바로 그의 아들 현민이다. “내 아들과의 공동작품”이라는 그는 우주에 대해 연상되는 단어를 하나하나 떠올리다 동심이란 단어에 이르는 순간 어떤 영감이 머리를 스쳤다고 한다. 

“제 아들이 두 살 때 말은 다 알아들었어요. 현민이 손에 나전 조각들을 주고는 ‘네 마음대로 여기저기 신나게 뿌리면 별님들이 만들어 질거야’라면서 뿌리라고 했죠. 신나게 뿌리는데 순간 그 작은 나전들이 영롱한 별이 되어 밤하늘에 박히는 기분이랄까요. 우리들은 남을 의식하고 남에게 좀 더 잘 보이려고 하는 것에 지독하게 오염돼 있어요. 하지만 애들은 순수해서 그렇지 않거든요. 그걸 노린 거죠. 결과는 대성공이었어요”

옻을 만나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고 있겠느냐는 다소 상투적인 질문에 그는 “요리사가 되지 않았겠느냐”고 말한다. 요리하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는 그는 실제로 요리면허증도 갖고 있는, 세계적 요리들을 만들어내는 수준급의 실력을 갖고 있다. 그에게 요리는 취미를 뛰어넘어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존재다.

“내 요리를 가족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면 참 행복해요. 가끔 친구들도 우리 집에 와서 같이 먹어주면 참 고맙고요”

포기할 시간에 희망 갖고 최선 다해야

포기할 시간에 희망 갖고 최선 다해야

 

지금의 이런 유명한 존재가 될 줄도 몰랐고,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는 전용복 장인. 그가 태어난 시기(1953)는 우리나라가 정말로 어려웠던 시기다. 그 누가 안 힘든 사람이 있었겠냐만 그는 남들보다 조금 더 어려운 유년시절을 겪어왔다. 큰 형이 결핵성 뇌막염으로 죽은 뒤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가 됐고, 어머니는 신경쇠약증에 걸렸다.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일들을 하며 동생들을 기르고 부모를 수발했으며, 공책 사서 겨우 야학에 다니며 공부했다.

독학으로 예술도 배웠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그림으로 달랬다. 그는 억울해서라도 비뚤어지게 살지 말자고 다짐했다. 덕택에 그 혹독한 시절은 지금의 그를 있게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고 한다. 그는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인생의 후배들에게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라는 진지한 말을 남겼다.

“자기가 뭔가를 갖고 있어야 해요. 학연, 지연과 같은 외형적 형식에 의존하는 시대가 아닌 내면적 자기 실력위주가 빛을 보는 거죠. 세계도 그렇게 변하고 있어요. 이젠 자기 하는 일에 최선 다하고 항상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그 크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뭐든지 이뤄집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 해선 안 되는 행위는 바로 포기입니다”

 

전용복

1953년 부산광역시 출생
1986년 현대미술대상전 대상 수상
1994년 일본 NHK 공로상 수상
1988년 일본 이와테현 미술공방전 특상 수상
1991년 일본 메구로가조엔 미술품 5천여 점 복원 및 제작
2000년 대한민국 신지식인 대통령 표창장 수상
2001년 대통령 표창 수상 기념 개인전 (일본 모리오카)
2000년 경주문화 엑스포에 전통 칠예작품 전시회
2004년 이와데 칠예미술관 개관 및 동관 대표 취임
2005년 APEC 2005 KOREA 문화축전 전용복 칠예작품전 
2007년 이와야마 칠예미술관 관장 취임
2008년 세계 최고급 옻칠 시계 발표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감사패 수여
2010년 주오사카 한국문화원 초대 개인전 ‘만년의 빛’
現전용복 칠예연구소 소장
現일본 이와데현 문화예술진흥심의회 위원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 / 정리 박기훈 기자 / 사진 이영식 객원 사진기자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