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님의 은수저
시아버님의 은수저
  • 유병숙(수필가)
  • 승인 2010.06.09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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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주인 잃은 은수저를 닦는다

서울생.
《한국산문》회원.
한국문인협회회원.
“만 원 드리지요.” 선뜻 돈을 내미는 금은방 사장님. 순간 목이 메었다.

 시집올 때 예물로 해온 시아버님의 은수저 한 벌. 그 날부터 92세로 세상을 떠나시던 날까지 27년 동안 시아버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충직한 동지였다. 그 세월을 견디느라 야윈 모습이 안쓰러웠다. 유품인 시계와 반지, 안경 등을 시숙과 시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니 내게 남은 것이 이 은수저였다.

 은수저로 음식의 독을 찾아내고 사용하는 사람의 건강상태까지 알 수 있다고 한다. 그 효능덕분이었을까. 시아버님은 노환으로 쓰러지시기 전까지 큰 병치레는 없으셨다.

 돌아가신지 어느새 일 년이 다가온다. 그 분 살아생전 한 번도 변한 적 없었던 그것이 까맣게 변색되어 있었다. 사자(死者)의 물건은 금마저 녹이 슨다고 하였던가. 이 녀석도 하루하루 검게 타들어 갔었나보다.

 회한이 밀려왔다. 입적하신 법정스님의 무소유사상이 빛을 발하는 작금. 시아버님의 손길을 남겼던 것이 혹시 욕심은 아니었을까. 미리 마련해 둔 산소도 마다하고 화장하라고, 그저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시아버님 아니셨던가. 이제 그만 이 수저에 걸린 슬픈 마법을 풀어주고 싶어졌다.

 헌데 그 놈의 만 원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무너졌다. 그 동안 나를 믿고 그 수저로만 식사를 하신 시아버님의 음성처럼 크게 들렸다.

 “사장님. 안되겠어요. 그냥 그 은수저 도로 주셔요.” 내 울먹임에 놀란 금은방 사장님은 묵묵히 은수저를 닦기 시작했다. 곱게 비닐에 담아주며 “이대로 보관하면 변색되지 않을 거예요.” 한다. 효자로 소문난 그의 조용한 배려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식도락가였던 시아버님의 식탁은 참으로 까다로웠다. 무엇을 해드려도 칭찬이 돌아오기란 그저 먼 바람이었다. 그러던 그 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단 한 번 “네가 한 갈비찜이냐? 참 맛있구나!” 하셨다. 목이 메어 밥을 먹을 수 없었다. 기쁜 건 지, 슬픈 건 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미세하게 떨리던 시아버님의 손을 지키던 것이 바로 이 은수저였다.

 덥석 추억을 받아 가슴에 꼭 품고 돌아왔다. 수놓은 명주 수저집에 넣어 생전에 좋아하시던 햇빛 밝은 곳에 두었다.

 나는 오늘도 주인 잃은 은수저를 닦으며 시아버님과 대화를 나눈다. 그 분과 같은 믿음을 또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이다음에 며느리랑 손주들이 생기면 같이 앉아서 도란도란 그 분의 은수저 얘기를 하고 싶다. 임금님이 쓰시던 것도 아니요, 몇 백 년 묵은 유물도 아니지만 시아버님의 마음이 담긴 이것보다 값진 은수저는 없을 것이다. 보물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