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균의 배우열전⑥
김은균의 배우열전⑥
  • 김은균 연극평론가
  • 승인 2010.06.23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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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老年)에 빛이 나는 배우 - 김길호

 

지난 주 지역 연극사를 취재하러 속초를 다녀오면서 그래도 열심인 향토연극인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항구도시인 속초와 마찬가지로 목포연극 또한 바다와 접해서인지 토속적인 지역을 배경으로 좋은 연극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작고하신 차범석 선생과 더불어 목포연극을 이끌어 오신 이가 바로 김길호 선생이시다.

 

여기에서 조금 더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현해탄에서 윤심덕과 동반 자살한 천재 극작가 김우진과 월북한 성격파 배우 이화삼과 이지적인 배우 최상현 그리고 민욱, 임동진, 이정희와 지금도 고향을  지키고 있는 김창일씨 등이 목포가 배출해낸 연극인이다.

김길호선생이 연극과 인연을 맺은 것은 6?25 사변이 나고 나서 1951년 차범석 선생이 고향인 목표에 낙향을 하여 목포중학에 교편을 잡고 계실 때인데 해군기지에서 3?1절 기념예술제를 열었고 거기에서 배우 할 사람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차 선생님을 찾아갔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연극이라 봤자 짧은 공연이었는데 열렬한 반응을 받고 보니 예정된 기일을 훨씬 넘겨 일주일공연이 보름간 공연을 하게 되면서부터 관객의 반응을 체득하는 방법과 연극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신파극이다 뭐든 구경하기를 좋아했던 선생은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위로 한분 형님은 일본에 갔는데 행방불명이 되셨고 이런 이유 때문인지 방랑기질은 그를 예술의 세계로 이끌게 된다.

선생께서 훗날 아버님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희곡원고뭉치’를 발견하기도 했을 때는 왠지 형용 못할 감정을 느끼셨다는데 선생 역시도 틈틈이 극작을 하여 1964년 경향신문과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매치기>라는 희곡으로 당선이 되었고 1984년에는 <해곡>이 대한민국연극제에 출품되기도 하였다.

선생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게 된 것은 군대제대를 하고 1959년 목포 KBS에 근무를 하게 되면서부터이다. 1958년 예총(藝總)의 전신이랄 수 있는 ‘목포문화협회’가 만들어지고 그 산하에 일본대학 예술학과 출신인 홍순태선생을 중심으로 가칭 ‘목포극회’가 창단이 되었는데 당시 목포 KBS에서는 주1회 라디오로 방송되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선생은 이들을 규합해서 ‘목포극협’을 창립하고 2대회장으로 선임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이때 특이한 사항은 1962년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올렸다는 점인데 당시는 사무엘 베케트가 노벨상을 타기 전이라 이 작품이 알려지기도 전인데도 지역의 한 극단에서 이처럼 난해한 작품을 올렸다는 자체는 짚고 넘어갈만하다.

그리고 1976년 마흔이 넘어 서울로 상경을 하게 된다. 차범석선생의 소개로  최은희씨가 대표로 있는 ‘배우극장’에 출연을 하게 되면서부터 배우극장에서 <천일의 앤> <투우사의 왈츠> 그리고 산하에서 <슬픈 카페의 노래> <제인 에어> <산불> 성좌에서< 뜨거운 양철지붕의 고양이> <세일즈맨의 죽음> <오셀로> 현대극장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잔다르크> 춘추에서 <드라큘라> <겨울호텔의 7번째 테이블> <선사인 보이즈> <맨발의 이사도라> <춘희> <드레서>를 비롯하여 중앙무대에서도 진가를 확인해 나갔다.

또 간혹 TV나 영화도 틈틈이 출연을 하기도 했으며 <가거라 38선>과 <LIFE> <아이다>를 비롯하여 뮤지컬무대에도  서왔었다. 항상 따라다니는 건강에 대한 고민도 있으시지만 의외로 선생은 아직까지 무대를 꾸준히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우선 80이 넘은 연세에 그렇게 호리호리하고 외적으로 멋진 배우가 무대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후배들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것이고 이는 배우들의 자랑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은 한국악극협회에서 하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는 작품으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무대를 지키는 김길호선생은 영원한 현역배우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