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발원지인 민족성지 ‘봉황각’
3·1운동 발원지인 민족성지 ‘봉황각’
  • 이의진 기자
  • 승인 2009.02.26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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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이끌 지도자 양성 위해 설립

“봉황각이 어떤 곳인지 아세요?”
“봉황각이요?....글세....유명한 중국집인가?...”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대부분 중국집정도로 생각하는 웃지못할 일이 생긴다.

"조국광복은 내가 한다"고 굳은 결심을 하고 조국독립과 민중계몽을 위해 노력했던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서 3.1운동을 총지휘한 의암 손병희 선생은 잘 알고 있으면서 선생님이 지은 독립운동의 역사적 산실이 됐던 ‘봉황각(鳳凰閣)’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우리나라가 1919년 3월1일을 기점으로 일어난 범민족항일독립운동인 3?1운동이 올해로 90주년을 맞는다.

봉황각은 1969년 9월 서울시 유형문화재 2호로 지정됐으며 해마다 3월1일에는 기미3.1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의암 손병희선생을 기리기 위해 강북구청 주관으로 '봉황각 독립운동 재현행사'가 열리고 있다.  돌아오는 3.1절을 맞아 재현행사도 보고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봉황각에 대해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산 교육장으로 아이들도 데리고 함께 가보자. 

                  ‘봉황과 같은 큰 인물을 길러내겠다’는 의미
               3.1운동 9년 준비, 민족대표 33인 중 15명 배출

‘봉황각(鳳凰閣)’은 1912년 6월 19일 의암 손병희선생이 천도교 신앙의 뿌리를 튼튼하게 하고 보국안민의 교리에 따라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 일제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 항일독립운동을 이끌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곳이다.

▲ 손병희 선생이 조국광복을 위해 세운 3·1독립운동의 발상지인 우이동 봉황각 전경

봉황각은 우이동 버스종점에서 도선사입구 쪽으로 올라가면 좌측으로 나오는 천도교종학대학원 건물 뒤에 있다. 봉황각 뒤에는 봉황각과 동시에 지어졌다고 하는 ‘ㄱ’자 평면의 살림채가 있으며 봉황각과 담으로 분리돼 있다.

봉황각은 동남향으로 자리 잡았고 봉황각 왼편의 살림채 역시 좌향을 했다. 봉황각이 건립되었을 당시 봉황각 오른편 아래 우이동 버스종점 주변에 12동의 건물이 더 있었다고 하는데 3․1운동 후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고 한다.

봉황각을 포함한 건물의 숫자가 13인 것은 천도교의 신앙방법 중의 하나인 ‘13자 주문’과 통한다. 봉황각 앞의 붉은 벽돌 건물(별관)은 원래 종로구 경운동 88번지에서 1922년에 지어진 ‘천도교중앙총부’ 건물로 1969년에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중앙총부 건물과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천도교중앙대교당은 전국 천도교인들이 모은 성금으로 지어졌으며, 또한 성금 대부분은 3.1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됐다.

봉황각을 세운 손병희선생은 고종 19년(1882) 동학(東學)에 입교했고, 2년 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수제자가 되었다. 을사조약을 찬동한 친일분자인 이용구(李容九) 등과 결별하고,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대 교주로 취임했다.

▲ 삼일운동의 주역으로 봉황각을 지은 의암 손병희 선생의 초상화
1911년 봄, 나라 잃은 설움에서 의암 손병희선생과 비운의 황세손 의친왕 이강공이 우이동 계곡에서 밀담을 나누고, 그해 8월 의친왕이 천도교에 입교했으며 다음해인 1912년에 봉황각이 세워지게 됐다.

건물 이름 '봉황각'은 최제우의 시문에 자주 나오는 '봉황'이란 낱말을 땄다.

‘봉황이 깃들어 사는 집’이라는 뜻으로 봉황과 같은 큰 인물을 길러 내겠다는 손병희선생의 뜻이 잘 나타나 있다.

흰 바탕에 푸른색으로 쓴 ‘봉황각’ 현판은 오세창(吳世昌)의 글씨인데, '鳳'자는 중국 당나라 명필 안진경(安眞卿)의 서체를, '凰'자는 당나라 명필 회소(懷素)의 서체를, '閣'자는 송나라 명필 미불의 서체를 본뜬 것이다

손병희선생은 3·1운동을 이곳에서 구상, 1912년부터 3년간 전국의 교역자들을 일곱 차례로 나누어 49일씩 연성수련(육신은 일시적 객체요 정신은 영원한 주체임을 깨달아 인간의 근본을 찾고 주체성과 자주성을 확립하는 정신개벽 훈련)을 통해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등 집단교육을 실시했다.

이 교육을 받고 나간 교역자는 총 4백83명으로 이들이 훗날 3·1운동 때 각 지역의 지도자로 성장해 구국운동의 최선봉에 섰으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5명이 이곳에서 배출됐다.

1918년 12월 1일에는 종로구 경운동에 천도교 대교당 기공식을 봉행하고 교인 매 호당 10원 이상씩의 건축 모금을 실시한다는 명분으로 독립운동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조성했다.

▲ 봉황각 실내 모습

특히 3.1운동을 앞두고 1919년 1월 5일~ 2월 25일까지 49일 동안은 전 교인이 참가한 가운데 '나라를 위한 특별기도'를 봉행했다.

그리고 1919년 1월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 최린에게 3.1독립운동의 삼대 기본원칙인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를 지시하고 3.1운동의 대표자로 총지휘에 나섰다.

이처럼 식민지 억압이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세계 인류사를 바꾸어 놓은 3.1운동을 이곳에서 9년간 준비한 봉황각은, 세계 인류평화의 성지이며 전당인 것이다. 이에 감동한 시성 타고르는 인류 역사의 새 길을 밝혀준 한국에 '동방의 빛'이라 하여 예찬의 노래를 바친 것이다

봉황각은 '弓乙(궁을)'자형으로 평면이 구성된 총 7칸 규모의 한식 2층 목조건물인데 '弓乙'자형의 몸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고, 왼쪽 머리를 구성하는 부분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인데, 오른쪽 모서리 한 칸은 몸채 왼쪽 모서리와 겹쳐 있다.

건물 평면을 '弓乙'자형으로 한 것은 천도교의 핵심사상 중의 하나인 '궁을사상'을 반영한 것. ‘궁을’은 천도교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하늘에서 받은 명부의 모양으로 우주 만물의 순환 작용과 활동을 형상화 한 것이다.

몸채는 한가운데에 정면 2칸의 대청을 두고 오른쪽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누마루가, 왼쪽에 전퇴를 둔 정면 2칸의 방이 배치돼 있으며, 정면 가운데 칸 처마 아래에는 '鳳凰閣(봉황각)' 현판이 걸려 있다. 기단은 두벌대의 장대석 기단을 두었고, 그 위에 사각형의 초석을 두어 사각기둥을 세웠다.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을 했다.

▲ 손병희 선생의 묘역

이 건물은 얼른 보기에는 민가풍의 건물로 보이나 격식은 궁궐의 부속건물 양식이 가미되어 있다.

봉황각 바로 옆 서편 안채의 부족건물은 봉황각과 함께 지어진 것으로 일제 패망이후에는 손병희 선생의 부인 수의당(守義堂) 주옥경(朱玉卿)여사가 살았다.

천도교에서는 1958년 1월부터 이곳을 의창수도원(義彰修道院)으로 활용하고 있다.

봉황각에서 마주보이는 전면 약 50m 되는 산언덕에는 손병희선생의 묘가 있으며 독립선언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서울문화투데이   이의진 기자 luckyuj@sctoday.c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