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거장 일랑 이종상 화백을 만나다
시대의 거장 일랑 이종상 화백을 만나다
  • 인터뷰/이은영 편집국장
  • 승인 2010.07.2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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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 넘어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 보물로

 

[서울문화투데이=인터뷰/이은영 편집국장] 이종상 화백은 ‘화백’이라는 말보다 만능인(萬能人)이 더 잘 어울린다. 루브르 박물관 전시를 통해 세계의 찬사를 받았을 만큼 예술적 감각을 지닌 그는 현재 유통 중인 오천원권과 오만원권 화폐의 영정을 그린 유일한 생존 작가다. 게다가 평생을 민족문화의 자생미학을 화두로 역사·철학의 탐구와 미술창작 활동의 공로로 은관문화훈장까지 서훈된 원로화가다. 또한 ‘뛰어난 작품을 만드는 것’을 넘어 4.19 민주화 혁명 때 선봉장에서 민주화에 앞장섰기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받은 국가유공자다.

그는 60년대, 고구려 벽화 연구를 통해 우리의 문화 족보를 찾아 나섰고, 70년대는 화가 최초로 독도 그림을 통해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항했다. 나아가 ‘독도문화심기운동’ 본부장으로 NGO활동의 대부이기도하다. 우리가 ‘하루하루 먹고 사는데 바빠 신경 쓸 틈이 없다’는 핑계로 무관심하게 지켜보는 우리나라의 문화, 역사가 아직도 그 어느 나라보다 견고할 수 있는 것은 그 누구보다 헌신하고 있는 이 화백의 존재감 때문은 아닐까.

◈궁금한 건 못 참았던 예산 소년

그림과 맺게 된 인연이 남다르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께선 원예학을 전공하셨어요. 지금 말하면 바이오 물리학을 하셨다고 할 수 있죠. 밤낮으로 현미경과 씨름하시던 모습이 생각나요. 그런데 사실 이분은 화가가 되고 싶으셨어요. 당시 친하셨던 고암 이응노 선생님이 홍성과 덕산 사이에 계셨어요. 큰 아버지가 계신 곳이기도 하니 예산에서 왕래하시며 교류도 하고 그림도 같이 배우고 하셨어요. 아버지께서 총각 때 찍은 사진을 보면 당신이 직접 그리신 아브라함 링컨 초상화도 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집안에 환쟁이가 나오면 집안 망한다고 만류하셨죠. 아버지께서는 형님께는 사업을 하라고 하셨고, 둘째 아들인 저에겐 당신이 못 이룬 꿈을 이뤄줬으면 하셨어요”

화가의 기대를 안고 태어나셨군요. 어떤 아이였었나요

“우리 집에는 신기한 것이 많았어요. 그 중에 서랍을 열면 하모니카 소리가 나는 것이 있었어요. 그게 너무 궁금해서 어머니께서 화장실에 가신 틈에 몰래 빼보니까, 그 속에 리드(Reed)가 달려있었어요. 풍금처럼 그 진동으로 소리가 났던 거였죠. 몰래 뜯어봤다가 서랍 소리가 달라졌다고 혼나기도 했죠.
하루는 아버지 현미경을 분해했다가 어머니께 야단맞았는데 아버지께서 오시니까 이불을 엎어주시고는 아픈 척 하라고 하셨어요. 아버지께서 이불이 들어 올리셔서 눈 딱 감고 자는 척했죠.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진땀이 나지만 당시 아버지의 손에서 느껴지는 따듯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다음날 아버지께서 부르셨어요. 그런데 예상외로 공구세트를 사 오셔서 제게 주셨어요. 그때 아버지께서 ‘궁금한데 아는 척하는 것, 궁금한데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주 나쁘다. 반드시 알려고 해라. 무언가를 하려면 반드시 거기에 책임을 질 수 있을 때 행하도록 하라’고 하셨죠”

손재주가 상당히 좋으시겠어요

“지금도 기계 쓰는 걸 좋아하고 직접 다 고쳐 써요. 냉장고, 전자렌지, 심지어 자동차까지도 우연만한 고장이면 다 제가 고치죠. 예전에 차가 고장나서 카센터에 갔는데, 넌지시 고장이 난 부분을 가르쳐줬는데도 무조건 전부 교체해야한다는 말만 하더라고요. 결국 제가 고쳐서 지금도 잘 쓰고 있어요”

◈“저는 우리나라 교육법을 어긴 죄인입니다”

 

6.25 발발 당시 초등학생이셨을텐데 그때의 기억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6.25가 발발했죠. 당시엔 경복중학교와 경기중학교 중 어디로 진학해야 하느냐 고민하며 시험을 준비하는 시기였기에 전쟁이 난 게 철없이 마냥 좋았어요. 그 때는 9월 졸업이었는데, 문제는 전쟁 통에 초등학교 졸업을 2개월 반 남겨놓고 피난을 간 거였지요. 대전에 와서 중학교시험을 보려니까 졸업장이 없어서 자격이 안 된다는 거예요. 6.25 동란은 천재지변과 같은 불가항력의 국란임에도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질 않았어요. 1년도 아니고 단 2개월 반인데 말이죠”

결국 중학교 입학은 허용 됐는지요

“당시 속된말로 일류학교는 아니었지만 불교재단에서 운영하는 보문중학교에서 절 받아줬어요. 남들은 뭐라 해도 제겐 일류였던 대전중학교 보다 더 고맙고 위대한 존재였어요. ‘中’자가 박혀있는 모자를 쓰니깐 어머니가 너무 좋아하셨죠. 그런데 뜻밖에도 불상사가 생겼어요. 그때 모 일류 여학교 학생들이 저랑 마주치면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 코를 막고 외면한 채 지나가더라고요. 저한테서 냄새가 나나 싶어 어머니한테 여쭤봤더니 ‘아무 냄새도 안 나는 데 왜 그러냐’ 하시더군요. 세 번째 물었을 땐 어머님이 그제야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아채시고 말없이 눈물을 흘리시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철딱서니 없는 사춘기 여학생들이 좁은 골목길서 저를 마주치면 ‘측간’냄새가 날거라며 미리 코를 막는 시늉을 해보였던 거 였어요. 그 후에 열심히 공부해 뜻은 이뤘으나 그때 받은 상처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어 좋은 교훈이 된답니다. ‘자라나는 젊은이는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걸 말입니다” 

초등학교 졸업을 2개월 앞두고 못하신 것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을 듯 합니다

“제가 서울대학교 교수로 화가로서 최초의 인문계 철학박사이고 모교의 박물관·미술관장을 역임하다가 정년해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까지 됐는데도 저는 아직 초등학교도 졸업 못한 무자격자인 셈입니다. 이런 분들이 아직도 꽤 있는 걸로 압니다. 이분들을 찾아서 명예졸업장이라도 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돈도 안 드는 데 정부 관계자 아무도 고려를 안해주는 거예요. 6.25 전쟁 60돌을 맞아 한번쯤 민족의 공통된 응어리를 찾아 보듬어 줄만한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기념행사보다 더 값진 일이니까요. 각 초·중·고등학교가 자체적으로도 조사해보면 얼마든지 명예졸업장 한 장으로 좋은 졸업생을 찾을 수 있고 동란의 상처도 어느 정도 치유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500년만의 모자상봉, 그 속에 숨은 남모를 고초(苦楚)

 

30대에 오천원권 영정 제작을 맡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는데 어떤 사연이 있는지요

“원래는 이당 김은호 선생님이 맡으셨었다고 들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지셔서 당시에는 표준화작업이 아직 안됐을 때라서 입체로 돼있던 율곡선생 조각상의 7분측면도를 사진 찍어 영국에 보냈었대요. 당시만 해도 국내의 조폐 기술이 미비했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외국인화가와 디자이너들이 자신들의 눈으로 보고 표현해 화폐로 만들어 보낸 율곡 이이의 얼굴이 꼭 외국사람 같았어요. 이미 발권돼 시중에 유포까지 된 상황에서 여론의 비난을 받고는 급히 수거됐죠. 아마 우리나라 역사상 제일 짧은 시간에 단명한 지폐일 거예요. 나중에 들었지만 이당 선생님이 자신을 가끔씩 찾아와 정통초상화 기법을 배워갔던 저를 추천했고, 한국은행이 엄격한 조사와 심사를 거쳐 화폐용 7부 측면 율곡초상 제작을 직접 제의하게 된 거라고 들었어요”

조사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화폐 영정은 그리고 싶다고 해서, 혹은 고위층과 연줄이 있다고 해서 그리게 되는 게 아니에요. 철저하게 화가 개인의 재정, 신용조사를 하는 거죠. 신용불량자, 상습체납, 금치산처분, 부도 등 재정 전과나 금전적 하자가 조금이라도 있거나 있을 가능성이 보이면 절대로 안된다고 해요. 그래서 돈 그린 사람을 만나기가 쉬운 게 아니에요. 예를 들어 만원짜리 지폐의 영정을 그린 사람이 공금을 횡령했다, 외화를 밀반출 했다면 그 돈의 이미지가 함께 실추 될 텐데 누가 쓰겠습니까. 그러면 지폐를 다시 만들어야 하고 엄청난 국고가 낭비되는 거죠. 우선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 중진작가임과 동시에 재정적 하자가 없으면 공개응모가 없이 철저히 조사해 바로 전에 통보만 와요. 처음에 연락이 왔을 때 제가 돈을 그린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었죠. 언감생심, 꿈에도 생각지 못해본 일이니까요. 운보 김기창, 월전 장우성, 현초 이유태 선생님처럼 모두가 한국을 대표하시는 스승의 스승님들이셨으니까요”

화폐 영정을 그리는 기간동안 마음가짐이나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고증까지 다 합치면 1년 정도까지 걸리죠. 정신이 산란하면 안되니까 다른 건 일체 못해요. 제가 그리는 분의 인품을 닮아야하니까 향 피우고 목욕재계하고 조용히 수도자처럼 오직 한가지 일에 전념하죠. 그만큼 힘든데 사람들이 그걸 잘들 몰라요”

 

지금 자신이 직접 그린 돈들이 유통되는 걸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내 살 같아요. 뭐랄까, 딸을 시집보냈는데 나를 못 알아본 체 딴 사람하고 얘기하는 걸 지켜보고 있는 거 같아요. 그런데 가끔 슈퍼에서 꼬깃꼬깃한 오천원권을 내 줄 때가 있어요. 그럴땐 그 자리에서 보란 듯이 손으로 깨끗하게 펴서 반으로 접히지 않는 지갑에 그대로 넣죠. 거기엔 항상 어머니 오만원권이 아들을 기다리고 있어요. 500년 만에 두 분을 해후시켜준 것 같아 기분이 아주 좋아져요”

최근 그리셨던 오만원권 속 신사임당 영정은 원본과 많이 다르다는 지적이 있었는데요

“표준영정은 강릉 오죽헌에 걸려있는 이당 김은호(1892-1979) 선생님이 그린 신사임당 초상을 기준으로 했으나 머리 모양이나 복식은 전문가 고증을 거쳐 많이 바꾸고 얼굴도 약간 7부 측면으로 각도를 틀어서 그린 거예요. 고증없이 그리신 오죽헌의 영정과 다를 수밖에 없지요. 5만 원권 발표 당시 한창 기녀 같다는 등의 별별 개인적 의견들이 난무했었죠. 하지만 전 아주 초연했습니다. 화폐제작의 기술상 초상의 원본하고 화폐 속 그림하고는 많이 달라요. 화폐는 위조지폐 방지의 과학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무채색으로 표현되는데 자꾸 칼라가 있다고 많은 분들이 착각해요. 게다가 화폐를 찍을 때마다 조금씩 인상이 달라지기도 하죠. 한국은행이 원래는 원본을 공개 안하는데 하도 말이 많아서 공개했죠. 공개하고 나니까 서서히 그런 말들이 사라졌죠. 신사임당의 진외가(陳外家·아버지의 외가)인 강릉 최 씨 대종회에서도 ‘원본을 보기도 전에 경솔한 행동을 했다’고 사과까지 했다고 해요. 당연하죠”

선생님이 그리신 신사임당 영정이 표준영정이 되는 건가요

“그건 다른 문제인데요. 표준영정이라도 새로운 역사고증이 밝혀지면 구 표준영정과 구분해 신 표준영정을 제작할 수 있어요. 제가 영정 심의위원회 심의위원이기 때문에 예술성과 역사성 등을 굉장히 면밀히 봐요. 머리모양이나 화장법 등 신분에 따라 다르기도 하죠. 철저한 고증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옛 성현들은 당시 초상이나 사진기록이 없다보니 처음에는 화가의 재량으로 초상을 완성했고, 그 후로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있어 철저한 고증을 거치게 됐어요. 이당 선생님의 영정들은 대부분 표준화작업 이전에 그려진 것을 제도가 생기면서 추인형식으로 표준영정이 된 작품들이 많은 걸로 알아요. 사실 선생님도 화가의 안목과 상상에 의존해 그리신 후에 표준영정이 된거죠. 이번 신사임당 영정만 해도 제가 이번에 고증을 받아보니 머리(가채)모양과 의상 등이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당 선생님이 그린 오죽헌의 신사임당 표준영정은 역사적 사료로 잘 보존하되, 철저한 역사고증 위에 틀린 걸 바로 잡아 새로 제작하는 것이 선생님을 위해서나 후손을 위해서나 옳다고 봅니다. 지금 제가 그린 영정이 출토복식본으로 역사고증을 거쳤으니 정확한 모습이예요. 후에 이를 전신상으로 제작하는 것이 옳을 겁니다. 현재 제가 그린 한국은행 소장본이 아직 표준영정은 아니지만 온 국민이 사용하는 낯익은 모습이니 오죽헌본보다 더 많이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족보 버려둔 채 정체성 못 찾는 국내 미술

 

벽화미술관 건립을 주장하셨는데요. 벽화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요

“우리나라 미술과 문화, 의상 등 모든 패턴을 고구려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현대미술도 벽화에서 시작됐어요. 다시 말하면, 벽화를 많이 가진 민족은 원시시대부터 족보가 있는 문화DNA를 지닌 민족인 셈이죠. 한 예로 일본이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문화를 따라올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벽화가 우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빈약하다는 거예요. 이는 우리보다 후진문화라는 것을 방증하는 일이기도 하거든요. 지금 기술적으로 아무리 발달했어도 요즘 발달한 것이죠. 사람은 족보가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어요. 하지만 이왕이면 약간 못살아도 족보 있는 편이 뼈대 있는 가문의 후예처럼 훨씬 자랑스럽겠죠.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고구려시대의) 벽화를 국민 한 사람당 나눠 가졌을 때 가장 많은 면적을 나눠가질 수 있는 게 우리 뿐이라고 생각해요. 중국도 우리만 못해요. 바꿔 말해 문화의 척도요, 시원이요, 수준을 얘기해주는 벽화를 연구하면 남북한의 동질성 회복, 동북공정, 우리의 현대 미술이 세계로 나아가야 할 방향도 수없이 나오죠”

하지만 현재 국내에서 벽화 관련 연구는 많이 미흡하다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벽화 역사가 유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그 많은 미술대학 어느 곳에도 벽화전공이 없다는 건 슬픈 현실이죠. 그래서 제가 벽화 대학원과 벽화 미술관을 만들어 동북공정에도 통일 이후에 대비하고 싶어요. 벽화유산이 많은 민족답게 미래 미술을 위해서 제가 건강할 때 제 벽화에 대한 지식과 기법, 그리고 미래를 향한 전천후기법들을 전수해줬음 좋겠어요”

여기저기에서 벽화박물관을 유치하고자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진척상황은 어떤지요

“오래전 동북공정에 대비키 위해 북한 초청을 받아 다녀온 후, 고향 예산에서 이종상 미술관 유치를 위해 1만명 서명운동이 일어났어요.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문화서명운동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군민이 몇 되지도 않는데 만 명이나 서명했으니 대단했죠. 하지만 군 재정으로는 그 크고 많은 제 작품을 받아낼 하드웨어를 장만할 수가 없었어요. 지금 이 작업실(평창동)에만도 수많은 작품으로 꽉 찼고, 다른 화실에도 가득 차 있을 정도니까요.
2007년, 대전시립미술관 초대개인전으로 열린 ‘현대미술의 거장-이종상전’을 보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대전시립일랑미술관’ 유치를 위해 6만명 서명운동을 진행, 짧은 시간에 목표달성이 되어 시에 접수했었죠. 그런데 그 전에 고양시와 안성시 등 저와 연관있는 곳에서 여러 번 유치의사를 밝혀왔었어요. 고양시에 제 화실이 있기도 하고, 우리가 통일이 되면 지정학적으로 봤을 때 북한하고 가까우니 독도문제나 중국의 동북공정을 대비한 문화동질성회복에 일조 할 수 있는 중간자 역할을 하기에 좋은 위치죠. 시립일랑미술관의 건물만 지으면 그 몇 배의 가치 있는 수 천여점의 작품은 물론 수 만점의 희귀자료가 기증되기 때문에 비공개적으로 많은 노력들을 해온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화실에 있는 작품들만 보다가 대전시립미술관 전시 때 어마어마한 스케일을 보고는 포기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군부대 한 곳이 이전해 줘야 가능한 미술관 규모’라는 걸 뒤 늦게 안거죠.
그 후에 인천에서도 찾아왔는데 광역시이기도 하고, 통일이 됐을 때 위치상으로 문화적 메카가 될 수 있겠다 싶었죠. 더불어 루브르 까르젤 초대전에서 인천의 병인양요를 테마로 6mX72m 규모의 벽화로 전 세계 127만여 명에게 인천의 개항기 역사를 알린 작품의 고향이기도 하고요. 결국 인천시와 MOU를 체결했는데 시장이 바뀌어서 어떨지 모르겠어요. 합리적이면서 통일 이후의 문화정책까지도 걱정할 수 있는 거시적인 안목을 가진 분이라면 누가 뭐라해도 실천에 옮기겠죠. 제가 공적인 자리에서 시민들에게 약속했듯 저와 같은 역사의식을 가진 곳에서 하드웨어를 만들어준다면 제 모든 작품을 시민의 것으로 돌려드릴 각오가 돼있어요”

아까 2007년 대전에서 대규모의 공공미술관 초대개인전을 여셨다는데요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대전에서 ‘한국현대미술의 거장전’을 했었죠. 당시 50일 만에 6만여 명이 다녀갔어요. 제 바로 전에 있었던 ‘루오-영혼의 자유를 지킨 화가전’보다 하루에 입장한 관객 수가 더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국내작가로선 기적을 이룬 거라고 언론에서 많이 보도했더군요. 또, 당시 카이스트에서 제 작품을 보고 ‘과학과 예술의 만남‘이란 주제로 강의를 부탁하기에 여러 기관에 초대강의도 했었죠. 여기서부터 (이종상 미술관을 대전에 유치하자는) 6만 명 서명운동이 벌어지게 됐죠. 당시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께서 KTV 방송에 저와 함께 출연해 예술과 인문학에 관한 정책 대담을 하시다가 ‘우리나라에서 생존 작가의 미술관 건립을 위한 서명운동은 하나의 문화운동이니 부채질을 해야한다’고 까지 하셨죠”

 

▲1997년 11월~1998년 3월 루브르 까르젤 설치벽화 개인전작품 / 6mx72m / 원형상-마니산

당시 병인양요를 주제로 그린 작품 ‘원형상 97061-마니산’이 큰 호응을 얻었는데요. 루브르 박물관 전시 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높이 6m에 길이가 72m인 벽화인데 그 작품은 1997년 파리 루브르 카루젤 샤를르 5세 지하홀(Fosse Charles V-Carrousel de Louvr)에서 있었던 ‘한국작가 3인전(Trois artistes Coreens)’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그게 우리 자생문화인 창호지를 사용해 뒤쪽에서 조명을 비춰 서양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거죠. 당시 엄청난 관람객들이 찾아왔었어요. 전시 기간이 지나고 다른 작가의 작품은 철수 한 후에도 저는 3번의 앵콜 전시요청을 받았어요. 나중에는 제 작품을 영구 비치해달라고 요구 하면서 거액을 제시했죠. 근데 제가 팔지 않고 그냥 무상으로 줄테니 대신 외규장각도서와 직지심경요체와 교환조건을 제시했죠. 그쪽에서 ‘정치적 문제’라고 난감해하면서 안된다고 하길래 전 ‘문화적 자존심’ 문제라고 딱 잘라 말하고 작품을 도로 가져왔죠. 이게 저의 결벽성이고 제가 지닌 역사의식인가 봐요”

◈독도 그림으로 ‘독도는 우리땅’을 외치다

 

▲2008년 5월 24일 최초 원형 태극기 독도게양식 당시 독도문화심기운동본부대원 및 경비대와 함께

1977년부터 독도를 그리고 계신데 화단의 독도 지킴이가 되신 사연이 있으신지요

“우리 산수를 그렸던 겸재 정선은 진경(眞景) 산수를 위해 이곳저곳 여행을 다녔죠. 하지만 정작 섬이나 해안을 그린 그림은 해금강 외엔 없었어요. 이는 겸재 정선이 우리에게 남겨준 하나의 과제라고 봤죠. 그는 중국을 벗어나 우리나라 산세를 그리며 자생성을 우리 영토에서 찾으라고 방향만 제시했을뿐 완성 한 게 아니었죠. 미완인 진경 산수를 좀 더 발전시켜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1970년대 들어 우리 시대 진경을 그리고 싶어 독도를 중심으로 그리기 시작했어요”

일본에는 독도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아직 없는 건가요

“기본적으로 역사의식을 갖고 독도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최순우 관장님께 상의해 한국이나 일본에 혹시 독도를 그린 작가가 있는지 면밀히 조사해달라고 부탁했죠. 만약 독도 그림 작품이 한 점이라도 있으면 독도를 안간다 했죠. 일단 최고가 되지 않는다면 최초라도 돼야 하지 않겠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은 물론 일본의 그 어떤 그림에서도 독도에 관한 그림은 없었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그리고 있어요. 독도 그림은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 역사 왜곡에 맞설 수 있는 문화적인 파워가 된다고 믿었으니까요”

 

▲독도의기II / 89X89cm / 장지화 / 1982

북한에 사진만으로 독도 그림을 그린 북한 만수대창작사(萬壽臺創作社) 화가 故 선우영 작가와 함께 독도 그림전을 열 계획이 있으셨다 들었습니다. 어떤 사이셨나요

“1999년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비해 김용순 아태평화위원회 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서울대교수 최초로 벽화 연구차 평양을 갔어요. 당시 북한의 영웅작가로 불리는 선우영 작가가 제 영향을 받아서 북한 제1호 독도작가가 됐어요. 남북한이 같이 합작으로 독도를 그리면 그 파급효과가 엄청날 거라며 약속했었는데,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2009년에 나를 따라 많은 독도작품을 남겨놓고 함께 독도가 가자던 꿈을 못 이룬 채 먼저 갔어요. 참 아쉽죠. 민족의 비극입니다”

최근 독도영유권 문제에 대해 일반인들은 적극적인 반면 정부는 조용하다고 생각됩니다

“국회의원들이 표심 때문에 임기만 생각할 뿐 4년 후, 아니 40년, 400년 후를 생각해보지 않는 거같아요. 정치가나 외교관들이나 각자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해야 해요. 참 아쉬운 점이 많아요. 한 예로 예전에 독도우표를 발행하려다가 일본의 눈치 때문에 결국 무산됐었죠. 그에 반해 북한에서는 자기들 소신껏 보란 듯이 여러 가지의 독도우표를 발행했죠. 우리가 하루 속히 통일이 되어야하는 이유가 그겁니다.
전 지금도 횟집에 가면 ‘독도 횟집’으로 개명하라고 권유해요. 매우 싱싱해 보이잖아요. ‘독도 횟집’이라고 간판을 걸어놓은 집이면 무조건 들어가 회도 먹고 같이 사진도 찍고 칭찬을 해주고 나와요”

◈“선과 악 모두 스승 삼으며 늙음보다 낡음 두려워하라”

 

현재 우리나라 예술계의 문제점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지금 보면 예술이 어떤 보존성이나 사회성이 함께 아우르지 못한 채 자꾸 액자의 노예로만 전락하다보니 강한 개성과 독창성만 강조되고 있어요. 말하자면 음악에는 독주와 합주가 있지만 이상하게 미대 정규과목엔 ‘합주’가 없어요. 내 소리를 조금 줄이면서 상대방과 조화를 맞추는 걸 배워본 적이 없어요. 그러다보니 언제나 독불장군이에요. 어떤 한 테마를 가진 전람회를 가 봐도 서로 소리만 꽥꽥지르는 꼴인 거죠. 개성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곳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은 전체 테마에 대해 컨셉은 발견할 수 없고 각자의 개성만 난잡하게 혼재돼 골만 아파요.
현재 우리는 민족의 역사와 자생성도 모른 채 서양 것이 좋다고 흉내나 내고 있어요. 다시 우리는 또 헤매면서 손가락질 당하게 돼요.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게 기본 아닐까요. 우리 족보를 찾아 그 기원을 이해해야 어디로 나가야할 지 나오잖아요. 한국 미학의 자생성을 모르면서 어떻게 처방합니까. 체질조사도 안하고 진찰도 없이 처방전을 내리는 의사를 보셨나요? 근데 우리 화가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약 처방만 하고 있으니 때론 독약이 되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예술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 드립니다

“혹시 학부형들이 아이 앞에서 ‘요즘 선생들 다 썩었다’는 등, 권위에 도전하는 말들을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걸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러다보니 세상이 말세라는 말들이 많이 나오죠. 하지만 소위 말하는 ‘썩은 선생’도 아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선 기막힌 깨우침을 주는 선생이 될 수 있어요. 공자도 ‘선과 악을 둘 다 내 스승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죠. 만약 아주 그림을 못 그리는 스승이나 선배가 있다고 가정해보세요. 그럴 때 남들처럼 흉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수모당하기 싫으면 좀 더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을 품는다면 좋은 스승도 스승이요, 그보다 못한 스승에게도 큰 깨우침을 얻는 거죠. 그런 사람에겐 스승이 두 배로 늘어나는 거고 온천지가 배울 것 투성이가 되겠죠.
두 번 째로 ‘늙음’을 두려워 말고 ‘낡음’을 두려워하면서 살라고 하고 싶어요. 제가 지금 80세를 바라보고 있지만 오히려 저보다 낡은 젊은이들을 아주 가끔씩 만날 때면 ‘낡음’이 얼마나 ‘늙음’보다 비참한가를 알려주는 스승으로 삼지요.
또한, 눈을 감고 꿈을 꾸지 말고, 눈을 부릅뜨고 꿈을 꾸면 반드시 이뤄진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물론 사람의 인생이란 완벽한 마무리가 아닌 미완이기 때문에 겸손함도 잊으면 안되겠죠.
마지막으로 전공이나 돈 버는 것은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해요. 수단과 목적을 잘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돼서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중요시 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결국은 인간스러워지는 거니까요”

 

1938년 충남 예산

서울대학교미술대학 졸업
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과정 졸업(철학박사)
국전 내각수반상·문교부장관상·추천작가·초대작가 심사위원
서울대 미대교수 / 12대 서울대박물관장 / 초대 서울대미술관장
학교법인 경원학원(경원대) 재단 이사
학교법인 이화학원(서울예고) 재단 이사
사단법인 국립국악진흥회 이사장
국립현대미술관회 이사 겸 미술관 운영위원회 부회장
서울시립미술관 운영위원장
독립기념관 자문위원
대한민국체육진흥공단 상임고문
상명대학교 석좌교수 역임 

국내외 초대개인전 23회 /  단체 초대전 640여회
1991<Contemporary Korean Painting>초대출품 (Prostor MuseumZagreb, Yugo)
1997<LouvreCarrousel>, 프랑스文部省 초대개인전 (Louvre Carrousel, Parise)
1988<세계80인의作家전> 초대출품 (Parise, France)
2003<은관문화훈장> 서훈 (대통령)
2004<제1회 안견문화대상> 수상 (안견문화사업회)
2005<제1~2회 Beijing International ArtBiennale>초대출품 (中央미술관, 北京)
2007<2007,ARCO-SPAIN>주빈국 특별전 초대출품 (Madrid, Spain)
2007<한국현대미술거장-이종상전>대전시립미술관초대개인전 (대전시립미술관전관)
2008<원형상-백두대간의염원>(8x81m)옹석벽화제작 (태백산맥문학관 야외벽화)
2009<원형상-순명>(146cm x116cm)장판화 (세계평화미술제, Spain)
2009<자랑스런 한국인대상>수상> (한국언론인협회)
2010<건국포장>국가유공자 수장 (대통령)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서울대학교 명예교수협의회 이사 / 독도문화심기운동본부 본부장 / 정부표준 동상영정심의위원 / 6.25전쟁 60주년기념 준비 위원회 위원 / 삼성문화재단 이사 / 일민문화재단 이사 / 한국조폐공사 자문위원 / 한국벽화연구소 소장 / 한국공항공사 자문위원 / 대한민국해군 제1호 구축함 광개토대왕함 명예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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