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비밀 간직한 우리 민화(民畵)의 봉오리 터뜨리다
아름다운 비밀 간직한 우리 민화(民畵)의 봉오리 터뜨리다
  • 박기훈 기자
  • 승인 2010.08.12 10:49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근현대 민화의 창시자’ 파인 송규태(芭人 宋圭台) 화백(파인민화연구소 소장)

[서울문화투데이=박기훈 기자] 민화(民畵)는 과거에 실용을 목적으로 무명인에 의하여 그려졌던 대중적인 실용화를 일컫는다. 우리 민화의 경우 그 아름다움의 비밀을 밝히고 역사적 유래와 미술사적 가치를 찾아내는 연구작업은 불과 40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
민화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일본인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년∼1961년)로, 그는 ‘민속적 회화’라는 의미로 민화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뒤 <공예적 회화>라는 글에서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에 의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을 민화라고 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1959년 <민예>지에 ‘불가사의한 조선민화’와 삽도 설명으로 ‘조선의 민화’에 대해 언급했다. 이후 70년 대초 에밀레박물관 관장이기도 했던 고 조자룡 박사를 비롯 김호연, 김철순 등 민화연구가들에 의해서 많은 논문과 책이 발간됐고,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출간된 대형 화집과 각종 전시도록은 이루 열거하기 힘들 정도가 됐다.
그러나 민화가 지닌 미술사적 가치를 정통 미술사가들은 한국 미술사에서 정식으로 다루거나 연구, 발표하지 않아왔다. 그 이유는 미술사료로서의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화가 지금처럼 대중화가 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고 미술품 복원을 계기로 꾸준히 민화를 그려온 파인 송규태 화백(芭人 宋圭台, 77)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민화 속에 숨은 전통무속신앙

사실 지금도 민화라하면 동양화의 일부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옛날부터 내려온 고분벽화도 결국 민화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이번에 수렵도(狩獵圖)와 호렵도(胡獵圖)를 병풍 열 폭 짜리로 만든 게 있어요. 따지고 보면 이것들 모두 고분벽화에서 나온 것들 이지요”

이외에도 수많은 장생도(長生圖), 책거리, 화조도(花鳥圖), 연화도(蓮花圖), 산신도(山神圖) 등을 그려온 송 화백은 우리 민화의 특징으로 각각의 의미를 담은 기능적 측면을 꼽는다.

▲화조도 / 40*120*8폭

“모란같은 경우는 옛날부터 좋은 일을 상징해 경사스러운 날에는 모란꽃을 그린 병풍을 준비했죠. 책거리 그림 같은 경우엔 사랑방 같은 곳에 걸어놓고 선비의 정신을 느꼈고요. 이 외에도 화조도 등은 안방에, 일종의 부적같은 역할을 하는 작호도(鵲虎圖, 까치와 호랑이)의 경우엔 거실에 놔뒀었죠”

더불어 우리의 전통신앙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면 이무기가 용이 되기 전에 물에서 튀어 오르는 민화 같은 경우는 과거 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의미해 걸어놓기도 했어요. 무속신앙이라는 게 사실 우리의 전통신앙이고, 우리 전통 민화와 잘 맞아 떨어지죠”

◈‘서궐도’의 찬사, ‘몽유도원도’로 이어

송규태 화백은 올해 희수(喜壽, 77세)를 맞아 오는 9월 1일부터 7일까지 인사동 경인갤러리에서 5개의 전시실을 모두 사용하는 대규모 개인전을 갖는다. 4개의 전시실에서는 송 화백이 소장으로 있는 파인민화연구소에서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의 작품이, 1개의 전시실에서 그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서궐도 / 400*130cm

2005년에 열렸던 개인전 ‘붓으로 지은 서궐이여’(2005년 10월 12일~18일, 인사동 공 갤러리)에서 ‘서궐도(西闕圖)’를 복원해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았다면,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다.

“이번 개인전에서 부분 부분을 열배 이상으로 확대해서 여덟 폭짜리 병풍으로 만든 것을 선보일 예정이에요”

이번 그의 개인전은 특별한 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출판기념회도 같이 한다는 것이다.

“민화 제작법 등 그동안 강의해온 것들을 좀 더 체계적으로 다듬어 책으로 내놓게 됐지요”

한 가지 의아한 것은, 그의 이번 개인전이 1994년(운현궁 미술관)과 2005년에 이어 세 번째 열리는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 민화를 대표하는 독보적인 대가라면 수 십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을 법 한데 말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간단했다.

“개인전을 하고 싶어도 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죠. 제 작품의 소장을 원하는 분들의 그림도 그려야 하고, 고 미술품 복원도 해야 하니까요”

◈평생의 필력으로 경희궁을 다시 짓다

송규태 화백이 최고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바로 고미술품 복원이다. 그는 50여 년간 1만 여점의 고미술품을 복원해냈다. 고려대 박물관에 걸린 ‘동궐도(東闕圖)’도 그중에 하나다.

“고려대 박물관 학예사가 말하길 ‘고려대 교수들도 몇 번 봤던 사람이 아닌 이상 국보 240호인 진품으로 아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고 하더군요. 계속 이런 해프닝이 벌어지니까 나중에는 2003년에 새로 복원한 작품이라고 명시해놨어요(웃음)”

송 화백은 문득 ‘서궐도’ 복원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동궐도’의 경우엔 원본을 참고하면서 잘 복원할 수 있었죠. 반면 서궐도의 경우엔 남아있는 자료가 경희궁 내 전각 배치의 개략적 위치 개요가 흑백 먹선으로만 기록된 ‘서궐도안(西闕圖案)’ 밖에 없었어요. 다행이 원본이 존재했던 동궐도를 복원했던 경험을 살려 색채나 모양들을 참고하면서 복원했죠. 쉽게 말해 스케치만 있는 것에 살을 입혀 복원했었어요”

평생의 필력을 다 쏟아 부어 그림으로나마 경희궁을 다시 지은 최초의 사람인 송 화백은 고분벽화 복원에도 앞장섰다.

▲경기감영도 / 37*140*12폭

“많은 고미술품 복원 중 고분벽화들을 재연한 게 기억에 남는다”는 그는 독립기념관의 ‘고구려 무용총 고분벽화’, ‘부여 능산리 동화총고분벽화’, ‘풍기 순흥 백제 고분벽화’ 등을 복원했으며, 황해도 안악의 ‘고구려 안악 3호 고분벽화(잠실 롯데월드 민속관 소장)’의 경우엔 복원료 4,000만원에 재현해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근래에 와서 유명한 기관들에 대작(大作)들을 많이 해줬지만, 그거는 그냥 ‘그림을 그렸다’ 정도로 별로 중요치 않다고 생각해요. 제일 중요하고 보람을 느끼는 건 사라지면 다시 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문화재들을 복원하는 데 있죠”

◈우리 민화의 대중화에 앞장서다

송규태 화백이 민화의 대중화를 위해 2000년도에 설립한 파인민화연구소는 그의 호인 파인을 따서 만든, 민화에 대한 각종 자료와 함께 후진들을 양성하는 민화전문기관이다.

“제 고향이 경북 군위군 의홍면 파전동이거든요. 그래서 처음엔 호를 파전(芭田)이라 했어요. 그런데 주위에서 부침개 파전이라고 불리니까 전(田) 대신에 인재 인(人)을 사용해서 파인(芭人)으로 변경했죠(웃음)”
송 화백은 연구소를 하기 전인 1990년대 초부터 연세대와 동국대에서 평생교육원 차원으로 민화를 가르쳐왔다. 그러다 2000년도에 남천 송수남(南天 宋秀南) 교수로부터 홍대 교육원의 민화반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이것이 연구소를 설립하게 된 계기가 된다.

“한 사람도 아닌 여러 사람들이 방학 때 집에서도 꼭 좀 배우고 싶다고 계속 요청했어요. 그렇게 시작한 것이 연구소가 된 거죠”

파인민화연구소는 고정적으로 배우는 사람, 새로오는 사람들을 합해 1년에 2, 30명씩 꾸준히 제자들이 배출되고 있다. 현재 200여 명의 제자 중 4, 5년 정도 배운 8, 90명 정도의 제자가 이번에 열리는 전시회에 참여한다.

“요즘 젊은 층이 민화에 관심이 많다고 하지만 20대는 없고, 30대나 40대들이 많죠. 30대도 얼마 없어요. 젊은이들이 우리 고유의 민화에 관심을 좀 더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죠”

◈정부의 적극적 관심이 필요한 때

송규태 화백에게 있어 그림은 ‘나의 분신’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던 그는 중학교때도 탁월한 실력을 뽐냈다. 그러다 6.25가 발발하는 바람에 군대에 4~5년간 입대해있던 그는 이 일로 결국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집안이 어려워졌기에 막내였던 그는 어떤 것을 해야겠다는 욕망조차 없었다.

그러다 서울 강북구 삼양동 판자촌에서 당시 한 동네에 같이 살던 운정 정완섭(云丁 鄭完燮) 화백에게 그림을 배우면서 미술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누구나 그렇듯 그도 처음에는 먹고 살기 위한 생계의 수단으로 그림을 시작했지만, 이젠 옛날 것을 어떻게 해서든 잘 복원해 내겠다는 이념만 머릿속에 가득할 뿐이다.

“앞으로 계속 더 복원의 꿈을 이뤄가고 싶어요. 새롭거나 특수한 것이 있다면 있으면 복원은 물론 뭔가를 더 첨가해서 재창조를 하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앞으로 후배들이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우리 민화를 연구해 우리 민화가 더욱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그는 현재 우리나라 인간문화재 항목에 민화가 없다는 것을 아쉬워했다.

“현재 불화(佛畵)나 단청(丹靑)은 인간문화재가 있는 반면에 민화는 없어요. 그래서 ‘동궐도’, ‘서궐도’, ‘경기감영도(서울 롯데월드 박물관 소장)’ 등을 그려온 경험을 살려 현재 궁중화로 신청해놨어요. 자연적인 민화의 발전에 기여해 자손 대대로 민화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려면 인간문화재가 돼야 해요”

자신의 명예보다 우리 민화를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노력하는 송규태 화백. 그는 마지막으로 정부차원에서 우리 민화에 관심을 가져주길 촉구했다.

“사실 민화에 대해서 정부가 좀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어요. 민화 인간문화재를 만들겠다고 말만 하면서 미뤄온 지 십년이 넘었어요. 요즘 엄청나게 한국화에 대해 조명이 이뤄지고 있자나요? 그러면서 민화는 오히려 외국에서 더 알아주고 있는 실정이죠. 계속 등한시 하지 말고 앞으로 민화에 대한 정부차원에서의 관심과 지원이 이뤄지길 바랄 뿐이에요”

파인 송규태(芭人 宋圭台)

작품소장
1973년 호암미술관 십장생
1974년 한국민속촌 10폭병풍
1976년 주한미대사관저 해전도8폭 병풍
1983년 김포국제공항 귀빈실 십장생
1988년 서울 롯데월드 박물관 경기감영도
1989년 총무처 (의전용) 십장생 (10폭)
1991년 청와대 춘추관 화조 4점
1992년 청와대 백악실 (연화도, 천도도)
1992년 주한미 부대사관저 (책거리 병풍)
1997년 국가정보원 (십장생 병풍, 연화도 병풍)
1998년 경기도 박물관 화성 능행도 (8폭 병풍)
1999년 서울 중구청 (십장생 병풍)
2002년 서울 역사박물관 (창덕궁 인정전 일월오약도 재현)
2004년 고려대학교박물관 동궐도 모사복원
2004년 모로코 모하메드 6세 왕궁 (십장생 병풍)
2004년 튀니지나 공화국 대통령궁 (모란도 병풍)
2004년 알제리 대통령궁 (책거리 병풍)
2005년 캘리포니아 어바인시청 (십장생)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디자인 교육원 강사/가회박물관 민화아카데미 소장/한국 민화 작가회 고문/파인민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