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동 이발관’에서 ‘효자동 카페’ 시대로...
‘효자동 이발관’에서 ‘효자동 카페’ 시대로...
  • 권대섭 대기자
  • 승인 2009.03.12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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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경무대로 불리던 시절. 경무대가 위치한 효자동에 <효자 이발관>이 있었다. 효자 이발관은 성한모 또는 두부한모라 불리는 순박한 이발사가 주인이었다. 한데 이 이발사는 면도사 겸 보조로 일하던 처녀 김민자를 유혹(?)해 덜컥 임신을 시켜 버렸다. 그렇지만 경무대 지역 주민이라는 자긍심으로 살아가던 성한모 인지라 나라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옳다고 믿었다. 사람들이 3.15 부정선거라 규탄해 마지 않는 1960년 3.15 선거날에도 투표용지를 먹어 버리거나, 야산에 투표함을 묻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임신을 했지만 결혼은 않겠다는 민자를 당시의 ‘사사오입’논리에 빗대어 임신 다섯 달이면 사람 한 명으로 봐야 하니 무조건 낳아야 한다며 설득할 정도였다.

▲ 권대섭 대기자
약 5개월 뒤 1960년 4월 19일, 그는 아들 낙안을 얻는다. 아내 민자의 진통이 격해지고, 리어카에 아내를 실은 성한모가 병원으로 향한다. 길거리엔 부정선거를 철회하라는 데모가 한창인데, 군인들의 발포에 상처를 입은 학생들은 이발사의 하얀 가운을 입은 그를 의사로 착각한다. 순식간에 영웅이 되어버린 성한모. 피로 물들인 애국학생들을 리어카에 함께 싣고 병원으로 간다. 성한모의 아들 낙안이가 태어난 이날을 훗날의 역사는 ‘4.19 혁명’으로 명명한다. 그리고 다시 이듬해 1961년 5월 16일. 군인들을 실은 탱크가 한차례 지나간 후 ‘중고생 삭발령’ 조치가 내려진다. 이발관은 나날이 번창한다. 인근 중고교생 머리 깍기에 바쁜 나날이 흘러갔다...

세월은 다시 흘러 1970년대. 이발사의 아들 낙안이가 어느덧 초등생이 되었다. 청와대 뒷산에 북한 간첩이 나타났고, 간첩 신고는 국민의 의무가 되었다. 이발사 성한모도 간첩신고를 했다. 어느 날 이발관에 찾아온 대통령 경호실장 장혁수에게 중앙정보부 직원을 간첩으로 오인해 신고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그는 ‘신고 정신’를 높이 평가받아 졸지에 모범시민 표창장을 받고, 청와대 이발사로 발탁된다....

권력은 짧고 문화는 길어

이상은 수년 전에 나왔던 <효자동 이발사>라는 영화 내용의 일부다. 인터넷에 소개된 영화의 줄거리를 그대로 옮겼다. 청와대 이발사가 어린 아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중앙정보부 고문실에 끌려가는 뒷 얘기는 다 옮기지 못했다. 청와대 이웃의 대표 격 동네인 효자동과 이발사를 통해 한 시대 분위기를 잘 나타낸 영화였다.

지난 시대의 이념대립과 사회상을 나타낸 ‘영화의 무대’가 되어준 효자동. 그 효자동이 요즘 눈에 띄는 ‘문화 명소’들로 변하고 있다. 통의동, 창성동 등 청와대 인근 동네 전체가 미술관과 박물관, 골동품 점, 멋스런 카페가 즐비한 문화 골목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인사동에서 비싼 임대료에 밀린 문화업소들이 삼청동과 가회동으로 피난(?)했으나 다시 번잡해진 그곳을 떠나 임대료가 싼 효자동 일대로 이동한 결과이다.(이곳의 임대료가 올라가면 다음은 또 어디로 갈 것인가는 추후 문제). 결과적으로 청와대 인근 동네는 온통 문화관광 벨트를 이루며, 권력중심부를 둘러싸게 됐다. 기무사 건물을 국립 미술관으로 활용할 경우 더더욱 그런 형세는 강해 질 예정이다. 경복궁 창덕궁 등과도 잘 어울리는 문화지대가 형성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바야흐로 <효자동 이발관>으로 상징되는 ‘권력 시대’에서 <효자동 카페>로 상징되는 ‘문화 시대’로의 반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묘한 쾌감을 느낀다. 시대의 변화를 갈망하는 역사의 흐름이 만들어 낸 극적 반전이다. 시민의식 수준이 지향하는 문화시대의 도래이기도 하다. 또한 권력마저 흡수하는 문화지대의 전진이기도 하다.

청와대 바깥의 이 같은 변화에 대해 청와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찌 느낄까? 궁금하다.

이념을 넘어 실용을 추구하겠다던 대통령이 온 후 좌우 대립이 격화되고, 남북경색이 심해지니 한반도의 앞날과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해보는 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