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충무로야사]슬픈 카페의 노래 '영화인과 카페들'
[연재 충무로야사]슬픈 카페의 노래 '영화인과 카페들'
  • 이진모 /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 승인 2010.08.26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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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낮달처럼 새하얀 얼굴에 페이소스한 음색을 통기타 선율에 실어 이 노래를 부르던 가수 박인희양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이젠 이 노랫말처럼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명동백작들로 불리던 '목마와 숙녀'의 전설적인 시인 박인환. 소설가 이봉구, 시인이자 영화감독이었던 이봉래, 시나리오 작가이자 작곡 작사가 였던 이진섭, 등이 매일 상주하다시피 했던 저 유명한 ‘은성주점’. 문인, 예술인, 정치인, 하다못해 주먹깨나쓰는 건달들까지 드나들었던 ‘동방살롱’, ‘목동다방’ 음악 감상실이었던 ‘돌체’, ‘뒤씨네’ 등 1950년대부터 명동 한복판에 자리했던 명소들이 시대변화에 따라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60년대 70년대로 접어들면서 다방이나 주점 음악 감상실 등이 있던 자리에 어느새 우후죽순처럼 카페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박인환의 시 '세월가면'처럼 일세를 풍미했던 저 유명한 예술인, 문인, 정치가들도 어느새 전설과 신화의 어두운 기억저편으로 사라지고 그들이 호형호제하며 시를 낭송하고 의기투합하며 고성방가로 시대의 암울함을 토로했던 그 곳에 장발과 미니스커트의 젊은 대학생들이 밀려들었다. 업소가 바뀌면서 사람도 바뀌고 사람이 바뀌면서 문화도 서서히 변해갔다.

박인희와 이필원이 부르던 ‘그리운 사람끼리’ 등 감미롭던 노래에 오버랩되어 김민기의 ‘아침이슬’이며 송창식의 ‘고래사냥’등 운동권 성향의 저항의식이 내재되어있는 노래들이 ‘학사주점’, ‘마음과 마음’이니 하는 카페에서 마치 데모대의 함성이나 절규처럼 터져나왔다. 지금의 유네스코회관 옆 골목에서 충무로1가 사보이 호텔 쪽으로 좁은 골목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중간쯤에 카페 ‘오비스캐빈’과 ‘마음과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옆길로 조금 휘어져 들어가 사보이 호텔 후문 쪽 에 카페 ‘화이어 버드’가 있었다. 카페 안에서는 1950년부터 폭발적으로 전 세계를 뒤흔들던 폴 앵커의 ‘다이아나’, ‘크레이지 러브’ 에니멀스의 ‘하우스 오브 라이징 선’ 톰 존스의 ‘딜라일라’, ‘아이 캔 스탑 러빙 유’등이 터져 나왔다.

영화인들이 다니던 카페의 대체적인 연혁에서 좀 더 구체적인 비하인드 스토리로 오버랩 시켜 보자. 명동 ‘화이어 버드’를 비롯해 신촌 ‘겨울 나그네’, ‘가을’, ‘태’, ‘으악새’, ‘섬’, ‘시나위’ 인사동 ‘탑골’ 압구정동의 ‘허리우드’, ‘필하모니’, ‘팝 런던’, ‘자유인’ 등 어두웠던 시대에 사랑과 낭만으로 주마등처럼 명멸했다가 어두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그 숱한 전설들을...

‘은성주점’이니 ‘학사주점’, ‘오비스캐빈’ 등에 대해선 이미 여러번 거론했고 카페 ‘화이어 버드’는 영화인과 아주 밀접한 내력을 가지고 있는 카페였기에 당시 이곳을 드나 들었던 영화인들과 카페의 후일담을 기억하고 있는 분들을 위해 몇가지 기술해 보려고 한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이 카페의 Y마담이 아직도 서울 모 지역에서 카페를 경영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명동시절에서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당당한 미모와 경영능력으로 성업 중 이라는 사실이다. 지배인도 그때 그 지배인 그대로 이며 젊은 시절 그녀의 카페 단골들이 지금은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들이 되어 이곳에 드나들고 있다.

그들은 한때 역사의 중요한 자리에 있었던 예술가와 대학교수, 정치인들이다. 자주 가는 편은 아니지만 필자도 가끔 그들과 합류하여 이곳에서 추억처럼 망중한을 즐긴다. 당시의 Y마담은 아마도 영화배우 지망생 이었을 것이다. 늘씬한 몸매나 어딘지 모르게 남자들의 성적 본능을 자극시키는 날카롭지만 가끔 뇌쇄적인 눈웃음으로 이를 커버하는 미모가 쉽게 그런 추측을 느끼게 한다.

필자가 그곳에 처음 간 것은 영화감독 고영남과 함께 였다. 이미 작고한지 십여년 가까이 되는 고영남도 역시 처음엔 영화배우 지망생이었다. 고교시절과 대학시절 배구선수 였다는 그는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가 그런 사실을 공감케 했다. 게다가 연극연기로 훈련된 달변이 여성들의 매력포인트였던 고영남과 Y양의 러브스토리는 그들이 열망하던 분야와 환경 속 에서 쉽게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더구나 Y양의 아버지는 당시 문화예술계의 내노라는 실력자였다. 필자의 선배 시나리오작가이자 의사 였으며 만능 스포츠맨 이었고 미스코리아 심사 의원장 등 각종 영화제 심사 의원장, 콩클대회 심사 의원장 등 막강한 문화 권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러니 카페 화이어 버드는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룰수밖에 없었다. 미스코리아 지망생, 영화배우 지망생, 가수 지망생 등 늘씬하고 잘생긴 선남선녀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어 좁은 공간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입장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리, 한상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