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 김창숙 선생 동상 이전을 촉구한다
심산 김창숙 선생 동상 이전을 촉구한다
  • 한국문화예술경영연구소 소장 최진용
  • 승인 2010.09.08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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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심산 김창숙선생에 관한 글을 읽고 크게 감동을 받은 후 나는 가끔 성균관대학교 교정에 있는 심산 김창숙선생의 동상을 찾곤 한다.

혼자 가는 경우도 있지만 가족, 친구들과 함께 갈 때도 있다. 요즘은 7살 짜리 손녀딸과도 이따금 산책 삼아 그곳을 찾아 가고 있다. 성균관대학교 캠퍼스에 심산 김창숙선생이 동상이 세워진 것은 항일 독립운동가이며 반외세,반독재에 앞장선 위대한 민족 지도자이지만  또한 그가 이 학교 설립자이기 때문이다.

이 동상은 1990년 2월에 세워졌으며 동상의 조각은 최의순(전 서울대 교수), 글씨는 한학자이자 서예가인 고 이가원 박사(전 연세대교수)가 맡았다.

동상 건립비는 교육당국과 성균관대학교 교수, 교직원, 학생의 모금으로 이루어졌으며 기단 높이 3m, 동상 높이 4m가 넘는 거대한 조각상이다. 바른 손은 불끈 주먹을 쥐어 하늘을 찌르고 바른손은 손바닥을 펴 땅을 향하고 있는 한복을 입은 선비의 굳은 의지가 잘 형상화된 동상이다. 이 동상은 포켓공원 형태의 심산 쉼터를 조성하고 그 안에 세워졌다.

그러면 동상건립추지위원회에 밝힌 심산의 쉼터 조성의 의미와 동상건립 취지를 들어보자.


- 심상의 터 조성의 의미
왜곡된 현실에 순응하지도 않았으며 일생을 반외세, 반독재의 꼿꼿함으로 살다간 민족지도자. 일제에 의해 갈갈이 찢긴 성균관을 민족전통대학으로 복원시킨 진정한 선비. 평생토록 타협과 변절을 모르고 살다 가신 심산 선생님의 삶을 본받고자 이 곳을 심산의 터라 명명한다

- 동상 건립 취지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선생은 경북 성주의 유가(儒家) 출신으로 일제로부터의 독립과 통일 민주국가의 건설이라는 민족적 대의(大義)를  실천하고 성균관대학을 재건한 분이다.

애국계몽운동기에 대한협회 성주지부와 성명학교(星明學敎)를 세우고, 3?1운동기에는 파리장서운동을 주동하였다(1차 유림단 사건). 중국 망명 중에도 국내에 잠입하여 유림들로부터 독립운동 및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제2차 유림단 사건), 나석주 의거도 주도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을 지냈고 치열한 행동주의로 일제와 싸웠으나, 일제의 법률을 부인하여 변호사를 거절하고 목숨을 건 옥중 투쟁 끝에 하체불구의 앉은뱅이가 되었다.

해방 후 성균관과 유도회를 개혁해 만들고, 성균관대학의 역사를 회복하여 초대 총장을 역임하였으나, 분단 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여 여러 차례 투옥 되었다. 두 아들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집 한 칸 없이 작고하시니 온 국민이 애도하여 사회장으로 모셨다.

 80평생 불굴(不屈)의 선비정신으로 진보적 유학사상과 민족주의를 일치시킨, 선생의 숭고한 조국애와 교육정신을 기려 펴고자, 1990년 성균인 모두가 힘을 모아 인문사회?자연과학 양 캠퍼스에 이 동상을 세우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 또는 벽옹으로 본관은 의성이며 선조 때 명신 동간 김우옹의 13대 증손이다. 그의 호 벽옹의 벽(?)자는 앉은뱅이 “벽”자이며 옹(翁)은 늙은이 “옹”자로 일제의 혹독한 고문에 의해 하반신 불구가 된 후 붙인 호로 그는 이러한 견딜 수 없는 고초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일제에 항거한 민족지도자였다.

심산 김창숙선생은 그의 나이 26세 때인 1905년 광무 9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 공포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상경하여 조약체결에 앞장 선 을사오적을 목 벨 것과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벌할 것을 호소하는 상소문 매국오적청참소(賣國五賊請斬蔬)를 올렸다가 옥고를 치르는 등 청년시절부터 독립운동에 온 몸을 던진 우국충정의 애국자였다.

해방 후에는 통일 국가의 건설, 반독재 투쟁에 몸바쳤으며 유도회의 결성과 총본부 위원장, 성균관장, 고향 성주에 성명학교의 설립(1903년), 성균관 대학 설립 및 총장(1953년) 등 교육과 유학의 개혁과 발전에 헌신한 이 땅의 진정한 마지막 선비였다. 심산 김창숙은 백범 김구선생,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 회장으로도 활동하며 독립운동가의 높은 뜻을 기리는 현창사업에도 많은 일을 하였다.

나는 늘 심산 김창숙 선생이 격동의 한국근대사에 남긴 큰 업적에 비해 우리국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특히 김구, 신채호 등과 비교할 때 ‘너무 과소평가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 기리는 것은 성균관대학교의 동상과 그의 고향 성주에 작은 기념관과 사적비가 전부다. 최근에 들어서야 서초구 반포동 근린공원에 김창숙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대형 심산기념문화센터가 설립되어 활발히 운영되는등 그의 정신을 재조명하고 기리는 작업과 기념 사업회의 활동이 본격화되고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성균관 대학교 캠퍼스에 있는 심산 김창숙 동상을 찾을 때마다 생각나는 의문이 있다. 위대한 민족지도자이자 이 학교 설립자인 심산 김창숙선생의 동상이 서 있는 곳은 교수회관 옆 학술정보관(중앙도서관) 앞이지만 과연 이 학교의 교수와 교직원, 학생들 중에 ‘캠퍼스의 어디에 심산의 동상이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하는 것이다.

위치를 봐서는 그리 외진 곳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이상하게 사람의 눈에 안 띄는 위치에 숨겨 놓은 듯 자리잡고 있어 큰 관심을 갖지 않고는 발견하기 쉽지 않다. 이렇게 동상이 나무와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듯이 심산의 높은 민족정신과 우리의 위대한 정신적 스승의 가치를 아는 교수나 학생은 또 얼마나 있을까. 이 대학교 졸업한 몇 사람의  지인에게 심산에 대해 물었더니 전혀 모르고 있는 졸업생도 있었다.

정문 옆에 서 있는 대형 종합안내판에도 심산쉼터나 심산 동산에 대한 표시는 없다. 게다가 정문에서 대로를 따라 400여 미터를 걸어 올라가는 어느 곳에도 심산 동산의 위치를 알리는 안내 표지판 하나 없다.

동상은 사후 관리가 되지 않아 크게 훼손되어가고 있다. 동상 상반신은 부식으로 인한 녹색 얼룩으로 보기 흉하게 더럽혀 있다. ‘1년에 한번 만이라고 얼룩을 닦아 주거나 안료를 칠하거나 보존처리를 했다면 이런 꼴 사나운 모습은 안볼 수 있을 텐데’하는 안타까운 생각에 늘 마음이 편치 않다.

필자는 무관심 속에 방치된 심산의 동상을 600주년 기념관의 앞 광장이나 사람들이 눈에 잘 띄는 경영관 앞 잔디광장으로 옮길 것을 성균관대학교에 제안하고 싶다. 그리고 매년 열리는 5월 제향을 보다 뜻 깊고 제대로 하라고 권하고 싶다. 학술심포지엄, 출판사업, 교육사업 등을 통해 그의 높은 정신을 기리고, 그래서 이 땅의 젊은 후학들이 늘 그의 높은 기상과 정신을 흠모하고 그의 동상 앞에는 언제나 꽃 한 송이라도 정성껏 바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것이 심산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며 곧 성균관대학의 정신일 것이다. 이것이 우리 후손들의 의무이자 도리이며 후학들이 해야 할 마땅한 일일 것이다.

심산 김창숙선생의 동상은 성균관대학교의 랜드마크가 되어야 한다. 필자가 동상 이전을 제안하고 촉구하는 것은 단순히 심산 김창숙선생의 동상만을 돋보이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는 성균관대학교의 정신이 살아나는 일이며 캠퍼스의 경관이 확 살아나기 위해서 제안하는 것이다. 심산 김창숙선생 동상이 경영관 앞 잔디광장이나 600주년 기념관 앞 광장으로 이전했을 때 동상도 빛을 발하고 캠퍼스의 건물과 주변 경관이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산 김창숙선생의 동상 이전은 성균관대학 캠퍼스를 한 단계 업그레이된 차별화 전략이며 학교의 핵심 가치에 일체감을 부여하는 일이다.

끝으로 옷깃을 여미며 그의 험난한 삶을 담은 어록 한편과 그의 동상 기단에 새겨진 통일을 염원하는 시 한편을 다시 감상하면서 결연한 그의 의지, 뜨거운 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글을 맺는다.

病夫非是苟求生 豈科經年繫達成
母死兒亡家已覆 妻啼婦哭夢猶驚

병든 몸 구차스레 살려고 안했는데
달성감옥에서 몇 해를 묶여 있구나.
어머니 가시고 아이는 죽으니 집은 망했고,
아내는 흐느끼고 며느리 통곡하니 숨결에도 놀라는구나!

통일을 어느 때에서

평화는 어느 때에
실현 되려는가

통일은 어느 때나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이 정녕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