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 잃은 우리나라 문화유산 현주소 파헤치다(下)
갈 곳 잃은 우리나라 문화유산 현주소 파헤치다(下)
  • 박기훈 기자
  • 승인 2010.09.30 08: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재계의 대안(對案)있는 안티(Anti),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서울문화투데이=박기훈 기자] 우리나라는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나라 중 하나다. 그 속에 꽃피운 찬란한 문화는 우리가 대한민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개발로 인해 사라지고 파괴되어 가는 수많은 문화재들을 보면서 ‘과연 우리 역사를 남들에게 떳떳이 내세울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이 와중에 정부나 기업의 도움 하나 없이 순수한 민간단체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는 한 가닥 희망의 빛이다. 주변의 그 어떤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고 논리 정연하게 문화재 보호를 주장하는 우리나라 역사의 파수꾼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과 함께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여러 주제들에 대해 심도있는 이야기를 나눴다.

#“원래 우리거니 영구임대 해주세요”

얼마 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에게 빼앗겼던 외규장각 도서들을 영구 임대방식으로 돌려받겠다는 정부의 입장이 발표되자, 수많은 시민들이 ‘우리 것을 돌려받는데 무슨 임대냐’며 반대의 목소리를 외치고 있다.

병인양요(丙寅洋擾)는 조선 고종 3년인 병인년(1866)에 프랑스 극동 함대의 로즈(Rose) 제독과 대원군이 보낸 이경하의 군대가 충돌한 사건이다. 대원군이 병인년 정초부터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해 남종삼(南鍾三), 정의배(丁義培) 등 한국인 천주교도 8,000여 명을 학살한 것이 시발점이 됐다.

그해 10월, 프랑스의 로즈 제독은 순양전함(巡洋戰艦) ‘게리에르’를 포함한 총 함대 7척과 60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부평부(富平府) 물치도(勿淄島)에 나타났다. 이후 우리나라 군대에게 인명피해 및 손실을 입고부터 민가·군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포격을 가했으며, 이러한 만행은 황해도 연안(延安)에까지 미쳤다.

조선 고종 12년(1875), 일본이 군함 운요호를 출동시켜 한강으로 들어와 강화도 수병과 충돌했던 운요호사건 때 많은 문화재들이 수탈당했다고는 하지만, 병인양요는 19세기에 들어와 공식적으로 군대를 동원해 문화재를 약탈해 간 최초의 사건이다.

“선교사들이 처형당했다고 해서 군대가 들어온 것은 말이 안 되죠. 당시 우리나라 국법이 ‘서학(西學)을 하지말라’였는데, 선교사들은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목숨을 걸고 포교활동을 펼친 겁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온 거죠. 게다가 선교의 의미를 논하기 전에 본질적인 문제가 하나 있어요. 프랑스 본국 의회의 승인조차 받지 않은 무단이탈이었던 거죠”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극동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한 것은 1866년 병인년 10월 16일이었다. 당시 강화도에는 왕실의 전적(典籍)을 보관하는 두 개의 사고(史庫)가 있었다. 하나는 강화성 내 강화부에 있던 외규장각(外奎章閣)이고, 다른 하나는 정족산성(鼎足山城) 내 전등사 부근에 있던 장사각(藏史閣)과 그 별고인 선원보각(璿源譜閣)이었다.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화려하고 신비한 서책에 눈독을 들인 로즈 제독은 장교들로 위원회를 구성해 나름대로 목록을 작성했다. 큰 가철서(假綴書) 3백권, 작은 가철서 9권, 흰색 나무상자 3개에 들어 있는 작은 책 31권 등의 전리품 목록이 만들어졌고, 실물은 고스란히 군함에 실렸다.

이후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 그해 11월 11일 강화도에서 철수한다.

“도서뿐만 아니라 지도 1점, 평면천체도 1점, 족자 7개, 한문이 적혀 있는 회색 대리석판 3개, 투구가 붙어 있는 갑옷 3벌, 가면 1개 등 여러 문화재를 약탈해갔죠. 거기에 국가비상사태 시 사용하려고 모아놓은 은괴나 금괴도 있어요. 이건 지금 이자 쳐서 받아도 시원치 못해요”

본국으로 돌아간 로즈제독은 무단이탈에 대한 처벌을 면하고자 약탈품 대부분을 황립도서관(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하고, 남은 일부로 선물잔치까지 벌였다고 전해진다. 분명 전시 약탈품이므로 조건 없이 반환해야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절대 그냥은 못준다고 버티고 있는 셈이다.

“이거는 분명 빼앗아간 거죠. 근데 이걸 돌려달라고 하니까 임대니 뭐니 운운하는 것은 말이 안되죠. 영구임대도 정부에서 그렇게 협상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알게 됐죠. (예전 TGV 고속철 협상 때 주기로 했던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렇게 알고 있는 분들이 계신데, 외교부에선 그런 말 한 적도 없다고 했어요. 지금 외규장각 도서문제는 (MB가) 장난치는 거예요. 형님외교의 성과 정도죠”

#박병선, 프랑스인? 한국인?

현재 프랑스는 ‘한국은 아직 문화재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관리 능력이 뛰어나지 않으므로 외규장각 도서를 보존할 자격이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외규장각 도서 반환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에 대해 황평우 소장은 억지 주장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지난 5월 17일 프랑스 대사관 앞에서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위한 1인 시위에 나섰던 황평우 소장의 모습

“프랑스는 그렇게 연구를 잘했나요? 한문도 잘 몰라서 중국책으로 분류 했었잖아요. 보존처리 능력은 우리도 누구보다 잘 해요. 현재 우리나라에 세계 5대 박물관이 있을 정도예요. 몇 년 전에 국립도서관 사서가 고서 팔아먹다가 걸린 나라가 프랑스예요”

그는 외규장각 도서를 얘기하며 재불(在佛) 학자로 유명한 박병선 박사에 대해 언급했다. 박병선 박사는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직원으로서 세계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의 존재를 알린 ‘직지 대모(代母)’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황 소장은 ‘박병선 박사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며 충격적인 사실을 고백했다.

“박병선씨가 올 초에 사료수집 차 한국 와서 직장암에 걸렸을 때 많은 분들이 성금을 모아서 전해줄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분이죠. 그런데 그 분은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대해서 소송하는 게 불만이래요”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은 지난 2월 웅진코웨이와 암 투병 중인 박 박사의 치료와 연구를 위해 상·하반기 각각 5천만 원씩의 기금을 마련하기로 협약했다. 분명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위한 비용이라 생각되지만, 현실은 달랐다.

“우리가 그동안 외규장각 도서 반환 소송비용 모으기 위해 별 짓을 다했는데 기업체에서 단 1원도 안주더군요. 그래서 어차피 외규장각 도서 반환 연구비용이니까 소송비용 좀 도와 달라고 통화를 했어요. 그랬더니 웅진코웨이에서 기금 담당하는 과장 분한테 메일이 왔는데 뭐라고 왔는지 아세요? ‘박병선씨가 외규장각 도서 아직까진 한국에 돌아오면 안 된다고 하시는 데요’ 이렇게 써져있었어요. 그 메일 그대로 보관하고 있어요. 박병선씨는 프랑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나라 보관능력이 아직 안된다’면서 반환을 원하지 않고 있어요. 전 그래서 그분을 한국인이 아닌 프랑스인이라고 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해요. 한국을 무시하는 그 사람을 지금 언론에서 너무 포장하고 있어요. 속된 말로 ‘박병선씨까지 까버리면 우리 정체성에 문제가 생긴다’는 거죠”

현재 박 박사는 외규장각 도서 다수가 프랑스에 있다는 사실을 알린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 외규장각 도서를 찾게 된 원인은 자신의 은사이자 역사학자였던 故 이병도(李丙燾, 1896~1989) 교수의 부탁 때문이었다.

“제가 친일 행적과 외규장각 도서는 서로 별개의 문제니까 알릴 건 정확하게 알리자고 의견을 제시했어요. 그 후부터 문화재청에서 발간하는 잡지에서 글이 나오고, 조선일보나 이런 데서는 아예 공개적으로 알리기 시작했죠. 전 이병도 교수가 외규장각 도서를 찾는데 공헌했다는 사실을 숨길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공(功)과 오(誤)에 대해서는 정확히 하자고 하고 싶어요. 지금 문제는 외규장각 도서 찾는데 공헌했다는 사실만을 앞세우면서 친일행적을 덮어버리려는 게 문제예요. 그래야 지금 문화재청장(이건무, 이병도의 손자)에 관한 사람들의 쓴 소리도 잦아들 테고, 그 당위성도 살아날 테니 말이죠”

#시민단체 밥상위에 숟가락만 얹어먹나?

을사늑약과 헤이그 특사 파견 등 구한말 역사 현장이었던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이 원형 복원돼 일반에 개방됐다. 문화재청이 중명전 내부를 역사현장체험공간인 상설전시관과 교육공간으로 조성해 한일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지난 8월 29일 시민들에게 공개한 것이다.

▲지난 8월 26일 덕수궁 중명전 복원 일반 공개를 앞두고 언론에 먼저 공개하고 있는 모습

사실, 중명전 복원은 몇 해 전부터 황평우 소장이 부르짖었다. 하지만 당시엔 차가운 반응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4~5년 전부터 중명전 보존해야한다고 길길이 날뛰었었죠. 하지만 단 한명도 관심 기울여주질 않더군요. 이게 원래 서울시 문화재였어요. 이미 중명전 마당은 유료주차장으로 변했고 개인사무실로 사용된 흔적이 곳곳에 나뒹굴면서 관리상태가 엉망 그 자체였었죠. 그래서 40몇 억을 들여서 보수공사하려 했다가  MB가 청계천 복원한다고 그 돈을 삭감해 버렸죠.  가슴에 손을 얻고 반성해야 돼요.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정동극장 단원들 숙소 만든다고 중명전을 사버렸어요. 결국 MB는 안한다고 손 뗀거죠”

지난 2005년, 중명전의 리모델링 방식을 두고 문화관광부와 시민사회가 마찰을 빚은 바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중명전을 친일파 행적에 관한 기록을 전시하는 ‘일제침략역사사료관’으로 설립하자고 주장한 반면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예술체험관’ 등을 짓겠다고 맞섰다.

당시 열린 ‘근대문화유산(중명전을 중심으로) 보존과 활용 어떻게 할 것인가’ 토론회 발제를 맡은 황 소장은 “중명전과 같이 역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 유물이라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며 “현재 역사적, 건축사적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나 사료를 전시하고 연구하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마찰이 계속되던 무렵인 2006년 구 서울역사가 철도공사에서 문화재청으로 관리권한이 넘어가게 됐고, 후에 문화체육관광부와 문화재청은 구 서울역사와 중명전의 관리권을 서로 바꿔 중명전의 관리권이 문화재청으로 넘어오게 된다.

결과론적으로 문화재청이 중명전을 역사의 전시관으로 복원하게 됐다. 하지만 정작 보존운동을 주장할 때 콧방귀를 뀌고 있던 사람들이 ‘우리가 모든 걸 다했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

“솔직히 감사장 같은 거 바라지도 않아요. 시민운동이라는 것이 그런 걸 바라는 건 아니니까요. 복원 중간에 자문 한 번도 안 받으러 오더군요. 완공하고 나서는 한 번 와서 보라고 초대장 한 장 정도는 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게다가 행사 인사말을 듣는데 모두들 자기들이 잘했다고 자화자찬인 거예요. 보존을 그렇게 부르짖을 때 무시하기만 하던 사람들이 말이죠. 이런 사람들이 무슨 문화재 관리를 한단 말입니까?”

황 소장은 얼마 전 많은 시민들의 주목을 받았던 광화문 복원에 대해선 “아직은 공사 중이니까 더 두고 봐야한다”며 간단하지만 의미심장한 한 마디로 결론내렸다.

“원래 대문을 젤 나중에 하는 거예요. 우리가 집지을 때 안에 공사 하나도 안한 상태에서  ‘집 다 지었다’고 사람들 부르나요? 문으로 보면 완공일지 모르겠지만 광화문 전체로 볼 땐 MB의 보여주기식 날림 준공식이죠. 정치력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이런 곳이 우리나라예요”

#Epilogue : 확고한 신념과 끝없는 노력이 오늘을 만들다

요즘 문화재 환수운동이 각지에서 우후죽순(雨後竹筍)으로 일어나고 있다. 일종의 ‘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다. 조절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역사를 찾자는 것이 많으면 좋지, 없어선 안 된다. 하지만, 많은 지원을 받으며 언론에 자주 노출되는, 이른바 입신(立身)을 위한 ‘보여주기 쇼’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다.

“약탈문화재 환수 운동은 성과가 눈에 딱 보이고, 사람들은 ‘와! 애국자다’ 그러죠. 하지만 더 나아가 국내에 있는 문화재 보호 운동을 하는 동시에 정말 남들이 가기 싫어하면서 하기 싫어하는 운동을 하면서 빼앗긴 문화재에 관심을 가져야죠. 어려운 길은 가지도 않으면서 약탈 문화재 환수 운동처럼 자기선전에만 몰두하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아주 경멸해요”

현재 황평우 소장은 현재 그가 강의나 토론, 회의를 나가거나 기고하는 원고비로 이끌어 한국문화정책연구소를 이끌어 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문화유산들을 지켜내는 일을 한다하면 많은 이들은 ‘개인 독지가들, 혹은 문화재청이나 기타 관련 정부단체에서 후원을 받으면서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 하지만 그런 생각은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밥을 얻어먹어도 3만 원 이상은 절대 안 먹다는 그는 그 어떤 청탁이나 회유에도 굽힘없이 문화재와 관련한 일이라면 방대한 자료와 논리로 부조리에 맞서고 있다. “욕심이 지나치면 깡패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그는 그 누구보다 문화재 보존을 위해 열심히 공부해왔다.

“문화유산시민운동이 쉬운 게 아니에요. 문화재가 고고학, 전통건축, 무형문화재, 천연기념물, 공예 등등 이 분야가 어마어마해요. 거기에 박물관 있죠, 보존처리 알아야 하죠, 근데 이거 이렇게 배우는 사람이 없어요. 저는 정말 스스로 노력했어요. 역사는 원래 좋아했고, 우리나라 한옥에 대해서 4년간 선생님들 따라다니면서 배웠어요. 그런데 ‘전공도 아닌 놈이 뭘 아느냐’는 말들을 듣고는 2005년에 고고미술사로 편입했죠. 한옥공부하기 전인 90년대에는 낮에 학술 심포지엄 같은 거 있으면 다 쫓아다녔고, 저녁엔 종류별로 좋은 강의들을 많이 들으러 다녔어요. 더불어 문화전반적인 것들도 꾸준히 공부했죠. 그런데 단순히 학과를 안 나왔다고 공부를 안했다는 거는 아닌 거죠. 제가 저 공부하려고 대학원 갔더니 주위에서 ‘대체 누굴 잡아서 혼내려고 저렇게 공부하지’ 하더군요(웃음)”

한때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수습사원 기간 동안 전국 1등의 실적을 올렸고, 이후로도 ‘현대 자동차의 전설’ 중 한 명일 정도였던 그였지만 당시 참여연대와 민족문제연구소에 꾸준히 회비를 내며 관계를 유지할 정도로 우리나라 역사문제에 대한 열정은 계속됐다. 그러다 아는 지인들의 조언과 ‘앞으로 문화운동이 중요해지겠다’는 생각이 합쳐져 소위 ‘잘 나가던’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의 길로 진로를 바꾸게 된다.

“저한테 책임감도 쌓이고, 발언 하나하나에 무게감도 더 쌓여지고, 확 떠들면 문화재청이나 문화부가 꿈틀꿈틀 하면서 고쳐지고, 그러면서 탄력이 더 붙게 되더라고요(웃음)” 

황 소장은 마지막으로 예전 대학생들과의 일화를 설명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제가 깜짝 놀랐던 적이 있어요. 어느 날인가 대학생 기자단들이 와서 인터뷰를 하는데 저 때문에 전통문화학과를 들어가고 문화재 보존학과를 들어갔다는 거예요. 알고 보니 고등학교 1학년 때 MBC ‘느낌표’에서 진행했던 문화재환수운동을 보고 딱 결정했던 거예요. 진짜 제가 애들 인생을 망하게 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웃음)”

황평우 소장 프로필

고려대학교 환경보건학과 /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화유산학 석사과정

2004~2005 문화관광부 고구려사왜곡 대책 TF 위원
2004 ‘2004 서울세계박물관대회(ICOM)’ 조직위원회 상임위원
2004~2005 국무조정실 문화재청 정책평가위원
2005~2007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문화재 제도 분과)
2006~2007 MBC 느낌표 ‘위대한 유산 74434’ 공동 진행
2007~2009.4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문화경관 분야)
2007~2008 문화재청 풍납토성보존 TF 위원
2008~2009 (사)한국문명교류연구소 이사
2009.07~2010.06 국회 입법조사처 조사분석지원위원 외 다수

現 (사)한국박물관협회 정책자문위원/한반도운하 백지화 국민행동 집행위원/국회 문화재 제도개혁 특위 위원/문화재청 시민정책자문위원/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