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열,전통 수묵(水墨) 속에 피어난 유토피아(Utopia)
왕열,전통 수묵(水墨) 속에 피어난 유토피아(Utopia)
  • 박기훈 기자
  • 승인 2010.10.14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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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상 속에서 자연을 여행하는 작가 왕열을 만나다

[서울문화투데이=박기훈 기자] 지난 9월 9일부터 13일까지 진행됐던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서 왕열 작가를 만났다. 현실에 없는 전설 속 이야기를 그려낸 ‘무릉도원’은 아름다운 색채와 생략된 화면들로 여타 다른 작가들에서 볼 수 없는 ‘기분 좋은 몽롱함’이 숨어있었다. 인터뷰 내내 전통 수묵화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자연을 그려낸 작가 왕열에게선 우리 고유의 푸근한 정(情)이 물씬 풍겨왔다.

◈회화는 재료가 아닌 정서로 구분해야

진악산(충남 금산군 소재) 자락에서 유년생활을 보내며 많은 자연을 느꼈던 왕열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서예를 했었다. 그가 고등학생이던 때, 계속 똑같은 것을 반복하는 서예의 특성에 조금씩 지루해하던 어느 날, 미술실에서 실기를 준비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미술 실기하는 아이들은 매일 새로운 것을 그리는 거예요. 그래서 한번은 모필(毛筆)로 정물화를 그려봤는데 너무너무 재밌었어요. 틀 없이 자유롭고 색채도 사용할 수 있고 해서 그림을 시작하게 된 거죠”

이후 어릴 때 누구나 그렇듯 남들의 칭찬과 관심을 받기 위해 더욱 열심히 그림에 매진, 여러 실기대회에서 상을 타기 시작하며 본격적인 미술 인생을 시작하게 된 그는 작품의 밑바탕에 자연을 기본 주체로 삼고 있다.

“저는 기본적으로 ‘모든 것은 자연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해요. 동양화 전공으로 대학을 입학 한 후에도 계속 자연을 즐기고 여행하고 사색했고, 자연스럽게 자연은 제 작품의 기본바탕이 됐죠”

왕 작가는 우리의 전통적 수묵화에 서양화 기법을 접목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수묵화나 전통 산수화는 이 시대와 단절된 낡은 것으로 치부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대학에 있으면서 수묵화를 많이 그려온 그는 우리 전통의 동양사상과의 소통을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노력했다.

“화선지나 먹이 2,000여 년 동안 사용됐다면 분명 그것들의 장점이 있지 않겠어요? 그 장점에다가 이 시대에서 요구하는 컬러와 디자인, 기계적인 요소들을 조합해서 새로운 것들을 만드는 것이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죠”

▲신무릉도원(파초)/ 천에 먹, 아크릴 채색/ 46x53cm

“예술은 항상 새롭고, 항상 그 시대와 호흡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전에 한번 했던 것을 리바이벌(revival)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며 창작과 신선함을 예술의 중요한 덕목으로 꼽는 그답게 우리 전통 재료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재료들을 연구했다.

“우리 그림을 화선지에다가 그려서 유럽이나 남미로 가지고 나가면 하나의 드로잉이나 아주 가벼운 삽화로 밖에 인정을 안 해요. 그걸 보강하기 위해서 화선지의 장점을 가지고 가면서 재료를 개발하자고 생각하게 됐죠. 화선지는 위에 발라지는 것이 아닌 ‘흡수’나 ‘포용’의 특징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광목(廣木, 날실과 씨실을 무명실로 하여 짠 무명천)의 기름기를 제거하고 배접해서 화선지의 흡수하는 맛을 유지를 하게 됐죠”

이 뿐만이 아니다. 오늘날은 수묵과 같은 단조로운 색채가 잘 통하지 않는 아주 컬러풀한 세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전통적인 동양화의 발색을 잘 나타낼 수 있는 수성아크릴을  사용해 이 시대가 요청하는 그림을 완성해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열 작가의 그림을 보면 서양화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것은 재료가 우리나라 전통의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 그림은 근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동양사상이 배어있죠. 분명 동양적인 장점을 가지고 현대화로 개발했기 때문에 다른 서양화작가나 입체작가의 그림과 차별화되는 거죠. 그리고 내뱉거나 번쩍거리지 않는, 우리 고유의 감성인 ‘흡수’에서 나오는 은은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는 덧붙여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교육받고, 된장과 김치를 먹으며 살아온 진정한 한국인이 하는 회화는 한국인의 정서가 들어있기에 한국화’라고 정의한다.

“그림이나 모든 예술은 형식이나 재료나 기법들은 1차적인 것일 뿐, 중요한 것은 이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는가 하는 내용에 있습니다. 앞으로 그림을 읽는데 있어서 너무 형식이나 재료를 따질게 아니라는 거죠. 지금 우리나라는 재료를 가지고 동양화니, 서양화니, 조각이니 분류하는데, 저는 근본적으로 ‘한국에서 하는 회화들이 한국화’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거예요”

◈관람객들의 마음과 생각 놓이는 작품이 최고의 작품

왕열 작가는 현재 모 화랑 초대전을 계획하고 있다. 정확한 일정은 잡히지 않았지만, 이번에 계획 중인 전시에는 1,000호 이상의 대작(大作)들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신무릉도원(동행)/ 천에 먹, 아크릴 채색/ 61x73cm

“물론, 규모가 크다고 좋은 작품은 아닙니다. (제가 올해 쉰 한 살인데) 1,000호 혹은 2,000호와 같은 작품을 지금 시기에 해놓지 않으면 다음에 힘 빠져서 못할 거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제 작품이 지금 완성 단계에 있다거나 하는 생각이 아닌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픈 것이에요. 조금 더 활동적일 때 큰 작품을 많이 해놓는 거죠”

왕열 작가는 지금까지 39번의 개인전을 해 온 해왔지만 한 번도 다른 작가들처럼 ‘~한 주제를 가지고 전시회를 해보고 싶다’는 것을 정해놓지 않는다. 그는 ‘그때그때 감성에 따라서 나오는 전시회가 가장 좋은 전시’라고 말한다.

“저 같은 경우는 계절을 많이 타요. 봄에는 저도 모르게 연녹색과 같은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색채가 오고, 지금처럼 찬바람이 부는 날에는 노란색, 황토색과 같은 색상들이 순간순간 느낌으로 다가와요. 작가가 일단 계획을 세워버리면 그거에만 맞춰서 굳어버리기 때문에 별로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작가가 감성에서 느끼는 데로 솔직히 표현할 때 그 작품이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근대의 그림은 화가나 작가가 그렸던 의도대로 관객이 읽어주길 바랐던 경향이 짙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그림을 그리는 몫은 작가고, 그것을 보고 관람하는 것은 관람자의 몫이 됐다. 왕 작가 역시 이러한 추세에 동의한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몫을 열심히 다 하고, 관람자는 그 그림을 관람하면서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지고 감상할 수 있는 그림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제 그림을 보면 낙타가 소재로 나오기도 하는데, 관람자가 그것을 보면서 사막을 상상할 수도 있지만, 환상의 유토피아 세계에 있는 하나의 동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거죠”

이처럼 자신의 작품을 보는 관람객들이 자유로운 상상의 날개를 펼쳤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그가 궁극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요즘 현대미술은 보면 굉장히 자극적이고, 때로는 혐오스럽거나 무서운 것들도 많죠. 하지만 저는 되도록 계속 아름답고, 경쾌하고, 평온을 찾는 쪽으로 작업을 할 거예요. 관람객들의 마음과 생각이 놓일 수 있는 공간(작품)을 추구하는 것이 제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니까요”

◈지금의 그를 있게 해준 프로정신

왕열 작가는 현재 단국대학교 예술대학 동양화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을 위해 온 힘을 쏟는 것도 엄청난 시간이 투자되는 일인데,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병행한다는 것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지난 9월에 열렸던 <2010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서의 왕열 작가 모습

“솔직히 강의 준비에, 기타 학교 행사 등에 그림 그리는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 면이 있죠. 하지만 두 가지 일을 하니까 기본적인 생활이 안정적이라는 것이 전업작가 분들보단 좋은 점이죠”

그는 교단과 작품 생활을 병행하며 얻는 큰 단점으로 창작력이 방해받는다는 점을 들었다.

“예술은 창작이에요. 그러기위해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생각하고 느끼는 대로 해야 하죠. 그런데 지킬 것은 지켜야 되는 그런 하나의 기관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보니 자유로운 상상력과 같은 부분에서는 조금 손해를 보지 않는가 생각해요”

한편으론 젊은 학생들과 소통하면서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감각들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큰 장점이라고 말한다.

“내가 못 느끼는 젊은이들만의 감각들을 배워서 제 그림에 접목할 때, 다른 동년배 작가 분들 보다 그림이 좀 젊어지겠죠. 이건 정말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거죠”

예술가라면 누구나 특이한 습관이나 철칙을 가지고 있다. 어떤 작가는 밤을 새야지만 작업이 잘 되기도 하고, 어떤 작가는 작품 소재를 구하기 위해 멀리 여행을 떠나야만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왕열 작가의 경우엔 어떨까?

“예술은 예술가의 모든 것을 답변해 줍니다. 그래서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나 그림에 모든 것을 올인(All-In)하는 프로라고 생각해요. 프로는 적어도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하루 8시간씩은 예술을 해야 하죠. 저 같은 경우만 해도 학교에 가서 8시간 애들 가르치고 와서 1~2시간 작업실에서 끌쩍인다고 하면, 그것은 취미일 뿐 작가가 될 수는 없죠”

그는 ‘하루에 8시간의 작업은 해야 한다’는 것을 프로의 당연한 자세로 생각하며 지켜야 한다는 철칙을 고수하고 있다. 그 전날 어떤 일이 있었더라도 새벽 5~6시면 눈 뜨고 일어나 오전 10~11시까지는 작업을 한다. 그리곤 그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정해진 하루 작업 시간의 나머지를 소화해내는 것이다.

“가끔 작업실에 손님이 오셔서 새벽 1~2시까지 술 마시고 얘기하다가 주무실 때가 있어요. 그러다 몇 시간 후에 눈 뜨시고는 ‘어제 늦게 주무셨는데 벌써 작업하고 계시냐’고 깜짝 놀라곤 하죠(웃음)”

이는 그가 다른 이들보다 다작(多作)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다작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예술에 할애할 때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믿고 있어요. 아무리 천재 화가라도 작품에 시간 안배를 적게 하면 작품이 소홀해지니까요. 때문에 다작을 하면서 많은 작업을 하는 것이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데 빨리 가는 길이 아닌가 생각하죠”

그는 문득 화가로서, 교수로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기타 여러 가지 일을 병행하는 것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미안하다며 항상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친구들과도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자식들이 다니는 학교에도 찾아가서 담임선생님이랑 상담도 하고 싶고, 집사람에게 무슨 일 있으면 일도 잘 도와주고 그래야 되는데 24시간동안 바쁘다보니까 항상 소홀한 것 같아서 미안한 생각들이 많이 들어요. 어제도 친구들 모임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모임에 가서 하루 저녁 놀다보면 다음날 그림이 엉망이 되니깐 중간에 나오게 되니 저 때문에 분위기가 깨지는 것 같더라고요.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예술인의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져야

예술을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축복받은 일이다. 예술의 가장 근본목적은 창조나 창작에 있다. 이는 본디 신의 영역이었다. 예술은 이러한 창작분야에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분야인 셈이다. 다시 말해, 남들이 보기에 낭만이 있고, 멋이 있고의 차원을 넘어 이 세상에 와서 창조물을 남기고 간다는 의미다.

재벌과 같은 사람들도 돈을 많이 벌어서 빌딩과 같은 건물을 남길 순 있다. 하지만 조각이나 회화 같은 예술 작품을 하나 만들어 후대 사람들이 감상하고 감동 받으며 마음의 정화 및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예술가다.

“후배들이 맹목적이 아닌 사명감과 책임감, 그리고 열린 사고를 갖고 예술의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어요. 예술에 입문하는 대학생들, 또는 예술과 관련해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아주 선택받은 거죠. 거기에 자부심을 가져야 해요. 또한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를 가지고 시대에 맞게 개발해서 세계미술로 나간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문화에 대한 정부의 지원 중 미술 분야가 많이 소홀하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작품의 테크닉이나 감각, 작품에 대한 끈기 등 좋은 성향을 가진 민족이 없어요. 다만,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것이 약하기 때문에 좋은 자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적다는 것이 문제죠. 그런 것만 해결이 된다면  우리나라 작가들이 세계적인 작가로 더 많이 나아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왕열(王烈) 작가 프로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대학원 동양화과 졸업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학 박사

개인전 38회(한국, 미국, 스위스, 독일 등)
동아미술제 동아미술상 수상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3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한국미술작가대상
단체전 400여회

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미술은행, 성남아트센터, 성곡미술관,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고려대학교 박물관, 워커힐 미술관, 한국해외홍보처, 한국은행, 동양그룹, 한국종합예술학교 등

現 단국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現 한국신묵회, 일청회, 한국미술협회, 동아미술제 미술동우회, 일레븐, 한국조형예술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