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금동대향로를 둘러싼 진실은 무엇인가
백제금동대향로를 둘러싼 진실은 무엇인가
  • 이은영·박기훈 기자
  • 승인 2010.11.12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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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백제전으로 다시금 주목받는 백제대향로, 금칠만 하면 다 백제 금동대향로인가?

[서울문화투데이=이은영·박기훈 기자] 찬란한 백제문화의 상징이자 대표라고 꼽을만한 백제금동대향로의 복원품이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물론, 복원품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원본을 베껴낸 가짜다. 하지만 복원품이라고 소홀히 만들어진다면, 원본에 대한 신뢰마저 왜곡될 수 있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이는 우리의 문화와 역사 전반에 대한 부정으로 확대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 기획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진단해보기 위해 백제금동대향로의 발굴 시기부터 차근차근 거슬러 올라가 그 속 사정을 알아보기로 했다.

#대학 강사인 김 모씨(40세, 여)는 어느 날 평소 다니던 절에 향로를 하나 시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향로를 알아보던 중이었다. 그러다 부여군청의 (주)보광퓨터(대표 임부원, 경기도 부천시 소재)와 계약해 판매하고 있는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百濟金銅龍鳳蓬萊山香爐, 이하 백제금동대향로) 복원품을 발견하게 됐다.

하지만 주문을 하려고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보던 중 (주)보광퓨터가 생산하는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한 좋지 않은 글들을 발견하고는 잠시 주춤하게 된다. 이후 직접 현장을 가서 직접보기로 마음먹고 ‘2010세계대백제전’(9월 18일~10월 17일)이 열리는 부여로 향했다.

전시장에서 부여군이 추천하고 국립중앙박물관 인증서가 바닥에 찍힌 백제금동대향로를 살펴본 그녀는 마무리 등이 조악한 것을 보곤 실망했다. 그러다 우연히 다른 부스에 전시되고 있던 청암 오문계(백제금속공예 대표) 선생이 제작한 향로를 발견하게 된다. 좀 전의 작품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작품성이 뛰어났다.

#2005년 6월 8일자 대전일보 사회면에 실린 기사 ‘백제금동대향로 복각품 엉망’은 부여군청이 보광퓨터에 의뢰해 제조 및 판매를 하고 있는 백제금동대향로가 내구성이 취약하다는 것을 보도하고 있다.

제례용으로 제작된 향료에 실제 향을 피웠다가 향로가 녹아내려 화상을 입었다는 제보, 외국인 선물용으로 구입했다가 향로를 받들고 있는 용 조각이 휘어져 전체가 15도 가량 기울어지는 경험을 했다는 제보 등이 주요 내용이다.

중국기업과의 계약 성사 후 백제금동대향로 모형을 구입했다가 출국 직전 취소했다는 사람은 “향을 많이 피우는 중국인들에게 우리 고유의 뛰어난 문화를 알릴 수 있는 좋은 선물로 생각했었는데, 하마터면 해외계약을 망칠 뻔 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기도 했다.

특히, 이 기사 말미에는 “내구성이 강한 청동 복원품을 시도했으나, 단가가 맞지 않아 대중화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주석, 안티몬 등 재질을 섞어 생산하게 됐다”는 부여군청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 복원품의 현실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현재 국보 제287호로 지정돼있는 백제금동대향로는 높이 64㎝,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지난 1993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됐다.

뚜껑에는 3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돼 있다.

발굴되고 1년 후인 1994년, 당시 우리나라 전통공예 장인인 청암 오문계 선생(백제금속공예 대표)은 충청남도의 보조금을 받아 8개월간의 노력 끝에 국내 최초로 백제금동대향로의 복원에 성공했고, 1995년 6월엔 ‘한국공예 세계화를 위한 특별전’에 출품해 문화예술 대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그는 “백제인들의 기술을 그대로 재현해내서 국내는 물론 외국인들까지 감탄했던 작품이었다”며 자부심이 더없이 높은 상태였다.

오 선생은 스스로 자랑스러워 당시 문화체육부(현 문화체육관광부) 김 모 사무관을 찾아갔다. 그러나 김 모 사무관은 오 선생의 작품을 시큰둥하게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주)보광퓨터 임부원씨를 아느냐? 그 사람을 만나보라”는 답변만 받았을 뿐이다. 오 선생은 사무관의 태도에 실망한 채 고향인 공주로 내려오게 된다.

◈공예대상작 외면하고 공장제품 대체

이후 그의 복원품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자 현재 백제금동대향로 복원품을 생산하고 있는 (주)보광퓨터 대표 임부원씨로 부터 한 가지 제안을 받게 된다. “2억원을 지급할테니 백제금동대향로의 판권을 넘겨달라. (주)보광퓨터의 이름으로 상품을 개발하자”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오 선생은 ‘국보를 복원한다’는 자부심으로 심혈을 기울여 복원한 작품을 공장에서 생산되는 한낱 제품으로 전락되는 것에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이에 응하지 않았다.

오문계 선생은 “당시 신광섭 국립민속박물관장이 ‘향로 복원을 절대로 훼손하지 말아 달라. 절대 상업적인 물에 이끌려 향로를 가지고 장난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한 말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던 터였다”며 “당시 제안을 거절했을 때, 이미 40년 전에 폐기된 법안을 가지고 다시 찾아와 협박도 서슴없이 했었다”는 사실도 털어놨다.

그러던 중 국립중앙박물관이 (주)보광퓨터에 백제금동대향로 제작을 의뢰, 5개월 만에 재현을 하게 된다. 1995년 9월, 국립중앙박물관은 (주)보광퓨터의 복원품 바닥에 인증도장을 찍어주게 된다. 당시 문화체육부 측에선 “(주)보광퓨터가 제작한 백제금동대향로 복원품을 우리 문화 홍보 차원으로 재외공관에 보급하겠다”는 방침까지 밝히고 나서게 된다.

공예대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작품은 외면한 채 그 공예대전에서 주석 등의 주물을 출품해 입상작에 그쳤던 회사 (주)보광퓨터를 지원, 뒤늦게 복원한 것을 국가대표상품으로 계약했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론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오 선생은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려줬다. (주)보광퓨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 향로 복제를 담당했던 조 모씨가 찾아와 ‘선생의 작품을 어떤 전시회에서 구해왔다. 외형은 제대로 못 고치고 겉 손질만 하다 보니 향로가 뒤집어 졌다. 솔직히 선생의 작품을 따라갈 수 없었다’고 고백하며 당시 소송을 준비 중이던 선생의 증인이 돼 주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조 씨가 돌연 미국으로 출국해 버렸고, 일각에서 “문화체육부 등에서 그의 입막음을 위해 출국시켰다”는 후문만 남긴 채 석연치 않게 마무리됐다.

◈복원 아닌 단순 흉내, 국가망신 자초할라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이전에 오 선생이 만났다던 문화부 김 모 사무관이 충청남도청 문화재계 박상훈계장에게 전화해 이 일이 커지지 않도록 오 선생의 입막음을 당부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번은 그냥 넘어가고 다음 복원품부터는 오 선생에게 의뢰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는 것이다.

오 선생은 “충청남도 관계자가 더 어이없고 한심하다”고 일갈하면서 “지역 예술인을 보호해줘야 할 사람들이 외압에 굴복해 국가적인 망신이 될 일에 동참을 하고 있다는 것에 너무도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현재 판매되고 있는 복원품에 대한 문제점도 지적되고 있다. 문화재의 원형을 그대로 복원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주)보광퓨터에서 만든 백제금동대향로는 뚜껑과 몸체만 해체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원래 금동향로는 몸체부분과 다리 부분이 분리되게 돼있다.

또한 향을 몸체 안에 넣어 향을 피우면 윗부분 장식인 봉황의 가슴부분에서 연기가 나와야 함에도 그렇지 않으며, 다리부분과 몸체사이에 용접자국이 그대로 드러나는 등 빛나던 백제인들의 찬란한 예술성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백제금동대향로의 원본 높이는 64cm인데 비해 현재 (주)보광퓨터에서 만들어서 공급하고 있는 향로는 62cm다. 이러한 점은 복원이 아닌 흉내라는 반증하는 사실들이다.

▲좌측이 (주)보광퓨터의 작품이고 오른쪽이 청암 오문계 선생의 작품이다. (주)보광퓨터의 작품은 무늬나 조형이 조악하거나 날렵한 선이 무뎌진 모습들이 보인다.

오 선생은 자신의 작품과 (주)보광퓨터에서 만든 제품의 재질에 따른 차이점을 비교해줬다.  재질 및 외형은 물론이고 내부를 쳤을 때 나는 소리 또한 확연히 달랐다. 오 선생의 작품은 은은한 종소리가 나는 반면 (주)보광퓨터의 제품은 둔탁한 소리가 났다. 옛 우리 조상들은 기물을 만들 때 소리 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었다.

오 선생은 “국보를 그대로 재현해야하는데, 재질도 다른 것으로 사용하다보니 소리 또한 제대로 복원해내지 못했다”고 개탄하며 “제품의 단가를 낮추기 위해 제작비용이 덜 드는 재료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여기서 잠시 복원품 가격과 관련한 사항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당시 대전일보 기사에 따르면 부여군 관계자는 오 선생의 작품 가격이 비싸서 (주)보광퓨터에 의뢰했다고 했다.  오 선생의 작품은 당시 300만원 정도에 팔렸다. 그렇다면 당시 (주)보광퓨터에서 생산한 제품은 가격이 얼마나 됐을까?

1995년 11월 9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지면광고를 보면 가격이 290만원으로 책정돼있다. 단 10만원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한 공예게 인사는 “겨우 10만원 남짓 차이로 이런 선택을 했다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이라는 생각밖에 안든다”며 어이없어 했다.

이어 “당시 작품가격이 문제가 됐다면 문화체육부 측에서 취지를 설명하고 충분히 협의를 통해 절충이 가능했을 것”이라며 “문화체육부가 주최했던 대회에서 대상을 탔음에도 단 한 차례의 접촉도 없이 외면했다는 것은 뭔가 커넥션이 있다고 밖에 의심할 수 밖에 없다”고 부연했다.

실제로 (주)보광퓨터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금동향로 생산이나 판매에 따른 일정  수수료를 받는다는 얘기도 들린다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재 오 선생의 작품은 조달청 조달물품으로 등록돼기도 했다.1년에 300개 주문 수량을 기준으로 가격 180만원으로 대폭 낮춰서 납품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당시 문화체육부가 충분히 가격경쟁력에서도 가능한 일인 것을 전혀 도외시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 선생은 “철저하게 처음부터 짜여진 각본이었다. 우리나라 국보를 이렇게 훼손되게 만들어서 국보라고 내보이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며 “이는 우리 정부의 양식이 의심스러운 일이다”며 분개했다.

“내가 복원한 작품을 지정품으로 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으로서 백제 후예로 자부하며 사는 공예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괴감을 느낀다”라고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백제금동대향로 논쟁, 기억에서 잊혀지나

현재 부여군청 관광안내과 관계자는 이러한 사안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부임한지 3개월 됐다”는 그는 “복원품에 대한 불만은 없으며, 있다고 해도 값이 비싸다는 점뿐이었다. ‘세계대백제전’ 공개 당시 많은 이들이 정말 제대로 된 복원이라며 극찬했다”고 말했다.

백제문화권관리사업소 관계자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단지 “백제금동대향로 복원품이 종류가 여러 종류다. 아마 문제가 있다고 제보가 들어온 제품이라면 1:1 복원품이 아닌 축소 복원품일 것이다. 축소로 복원된 관상용을 함부로 다루니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성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그러한 사안에 대해 예전에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오래된 사항이라 자세히 모른다”며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단에 문의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문화재단 문화상품마케팅팀 관계자는 취재 내용과 관련해 금시초문이라며 “문화재단은 박물관 안에 편의 시설 등을 맡아하는 공공기관으로, 2004년에 설립됐다. 복원품 제작이 재단이 설립되기 전인 90년대 중후반부터 됐다는 것만 알고 있다. 박물관과 (주)보광퓨터 측이 합의한 사항이라 모른다. 단지 판매만 할 뿐”이라고 대답했다.

또한 현재 판매되는 제품의 이상여부나 그에 관한 불만 제기 등이 있는지에 대해선 “현재까지 그런 사항들이 접수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밝혔다.

이외에 기타 어느 곳에서도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순 없었다.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한 오문계 선생과 (주)보광퓨터와의 공방이 처음 생긴 지 벌써 15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그동안 관계자들은 교체됐고, 결국 ‘옛날에 있었던 일’로 묻혀 지고 있었다.

◈백제문화의 결정체, 제대로 꽃 피울 때

백제금동대향로는 3개 부분으로 되어 있다. 뚜껑 위 장식부분은 봉황이 알을 목에 끼고 날개를 활짝 펴서 날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아래 뚜껑에는 5명이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 모습, 크고 작은 산, 사람들, 동물, 말을 탄 사람들, 불꽃무늬 등 화려한 무늬가 조각돼 있다.

▲청암 오문계 선생이 작품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컷

몸통에는 연꽃, 물고기, 동물 등 여러 가지 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밑에는 용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모습으로 입으로 몸통을 받들고 있다. 구름과 풀잎무늬가 소용돌이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백제 문화의 우수성과 독창성이 한층 돋보이는 작품이자 동북 아시아에서 출토된 향로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인정받은 작품이다.

이러한 찬란한 백제문화의 결정체의 복원품이 불량으로 만들어져 전국 박물관의 전시품으로, 더 나아가 해외선물용으로 권장된다면 결국 국가적 망신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희망은 보였다. 오문계 선생이 ‘잘못된 점들을 바로잡기 위한 일련의 움직임이 있다’는 희소식을 전해온 것이다.

내용을 종합해보면,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 고고학담당자가 오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 (주)보광퓨터에서 제작하고 있는 향로의 문제점을 바로 잡기위해 (주)보광퓨터에 향로원본(처음 조각품)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아직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며 “이번 기회를 통해 오 선생의 작품이 지적재산권보호를 받게 하겠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에 국립박물관 담당자에게 “(주)보광퓨터에서는 죽어도 원본을 가져가지 못할 것이다. 내 작품을 카피해서 만들었는데 어떻게 원본을 가져갈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

오문계 선생은 “이번 기회를 통해서 진상규명이 이뤄지길 바라고, 정부가 이런 것을 앞장서서 밝혀줘야 할 것”이라는 바람을 밝히며 “얼마 전 대통령이 ‘공정한 사회를 만들자’고 천명한 것을 들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을 마치 바로잡으라고 하는 신호탄으로 여겨졌다. 이것을 계기로 국민권익위원회에 고충민원을 접수해 놓은 상태”라고 말했다.

평생을 장인정신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오고 있는 많은 대한민국 예술인들은 그들의 명예와 자존심을 국가가 먼저 지켜주기를 바라고 있다.

앞으로 정부와 충남도청, 부여군청이 어떻게 이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할 것인지 그 귀추가 주목되는 이 시점에, 백제의 찬란한 문화예술이 유린당한 것을 통탄한 한 네티즌의 글을 옮겨적는다.

-국보287호 ‘금동대향로’의 발견지 부여에서 : 백제 금동대향로에서 묻어 나오는 찬란한 문화예술을 나당 연합군에게 강탈당하지 않기 위하여 왕궁 사찰 연못에 내다 버렸던 가슴 아픈 사실을 간직한 부여, 능산리 고분군 주변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가 말이다. 처절한 굴욕감을 이겨 내려는 당시의 백제 상황, 그 처절한 혼들의 울림이 들리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