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100년간의 파괴를 통탄 한다
우리 시대 100년간의 파괴를 통탄 한다
  • 권대섭 대기자
  • 승인 2010.11.13 1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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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화 자원에 대한 인식 제고 절실...

 

고향마을 뒷산 상여 집 너머 ‘굴밭 뜸’(屈田)이란 곳에 아주 오래된 공동묘지가 있었다. 동네 뒷산인데다 상여 집(고새이 집이라 불렀다) 너머 수풀 우거진 외진 곳 공동묘지라 분위기가 아주 음산한 곳이었다. 어릴 적 형들을 따라 그곳에 놀러 가면 오래된 묘지들이 구멍이 숭숭 뚫리거나 정상부가 함몰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묘지 내부가 거의 보일 정도였다. 그 묘지들 속에서 아주 오랜 삼발 형 토기들이 뚜껑들과 함께 절로 흘러 나왔다. 어린 우리는 그것들을 그냥 줍거나 묘지 흙을 조금만 걷어내면 꺼내어 가지고 올 수 있었다. 1976년 중학 3학년 때, 그 토기 하나를 학교에 가지고 가 국사 선생님에게 보였다.
“야. 너 이거 어디서 난 거냐?”
“우리 마을 뒷산 공동묘지에 이런 토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건 삼국시대 가야토기다. 묘지에서 꺼내려면 신고해야 돼. 도굴이 될 수도 있데이...”
 그 후 3년 뒤, 1979년 고교 3학년 무렵. 식량증산 명목으로 마을에서 일제 경지정리사업이 벌어졌다. 마을 뒤뜰 밭지대를 논으로 바꾸어 쌀농사를 짓게 하려는 사업이었다. 뒤뜰 전체가 파헤쳐지며 구획정리가 되어 나갔다. 그 공동묘지도 정리 대상이었다. 형식상 묘지 주인을 찾는다는 신문 공고를 냈지만 삼국시대 마을 주민무덤에 주인이 나타날 리 없었다. 불도저가 사정없이 묘지를 밀던 날, 수많은 토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 깨어져 나갔고, 일부 온전한 것들은 인부들이 어디론가 가져가 버렸다. 나중에 듣자니 그때 인부들이 토기들을 경주 박물관에 가져갔다느니, 어디다 팔아먹었다느니 소문만 무성했다.
 

어른이 되어 그때 일을 생각하며 가슴 칠 때가 많았다.
‘그게 천 년 전 우리 고향마을 주민들이 남긴 유산이었는데, 그걸 몰라보고 지키지 못했구나! 내 고향마을이 그렇게 무지했단 말인가!’
너무 원통하고 안타까워 지난 추석 때 그곳을 찾았다. 논농사를 지으려고 그리 파 엎었건만  결국 우리 마을 뒤뜰은 다시 밭으로 된 지 오래. 아니, 요즘은 오히려 쌀을 생산하던 논마저 전부 포도밭으로, 또 무슨 밭으로 바뀐 시대인지라...그 오랜 공동묘지 자리는 콩밭이 되어 있었다.

 일대 밭들은 그 묘지를 헐 때 나온 돌들을 이용해 둑을 쌓고 축대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길옆 밭 둑 아래 고랑에 아직 그 토기 빗살무늬 파편들이 남아 있었다. 그것들을 주워 다 집에 가져가며 생각했다. 그래봤자 한 농부의 콩밭 밖에 되지 못했거늘, 차라리 그대로 뒀더라면 지금 쯤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마을을 알릴 수 있는 소재가 됐을 걸...한 농부의 작은 소출과 비교할 수 없는 효과가 있을 텐데...
 행정안전부가 기획한 향토자원 조사에 참여하며 또 한 번 가슴을 친다. 서울 종로구 인왕산 일대 문화유산 중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의 진경산수 현장을 찾아가는 길. <경교명승첩> 등에 남긴 겸재의 진경그림. 언젠가 현장을 찾아보고 싶던 차에 이번이 기회가 되었다. 설레는 맘으로 뛰어 든 일이라 바삐 그림 속 현장을 답사해 나섰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혹시나 했는데 역시였다. 겸재가 그린 진경산수 중 인왕산 정상이나 청와대 경비구역 내에 있어 손을 대지 못한 몇 곳을 빼고는 모조리 흔적조차 알아 볼 수가 없다. 인곡정사, 옥동척강, 청풍계, 백운동, 필운대 등 모조리 흔적조차 없다. 사람 사는 게 먼저지 하며 개발이란 이름으로 시멘트 콘크리트 길속에 묻히거나 주택가 건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아름답던 진경산수, 한양 명승이 너무 쉽게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중요한 건 수 천 년, 최소 수 백 년간 그 모습으로 있던 명승들이 하필 우리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당대 100년 사이에 심각한 파괴와 왜곡을 겪고 말았다는 것이다.

창조적 파괴가 아닌 탐욕과 무지와 자본에 눈이 먼 광란의 파괴, 자연과 조화를 거부한 콘크리트 시멘트 · 회색 아파트에의 맹신만 판을 쳤을 뿐이다. 심각하게 돌아보자. 사람 살겠다며 밀고 부순 그곳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은 것은 무엇인가? 문화재급 묘지를 밀어 밭으로 만들었건만 한 농부가 얼마나 많은 소출을 올리겠는가, 진경산수 현장을 밀어 콘크리트 집 짓고 시멘트 길로 덮었건만 그 이득은 어디로 누구에게 갔는가? 그런 유산이 일본이나 유럽에 있었더라도 그렇게 무참히 파괴되었을까?

지난 100년간 우리는 건설과 발전, 개발의 이름으로 우리 정체성과 문화와 역사를 밀어 버렸다. 그것은 세계인이 미래의 우리나라를 찾아 올 통로를 밀어버린 거나 마찬가지 결과를 초래했다. 소탐대실(小貪大失)한 것이다. 우리 주변에 널린 역사와 문화 자원들은 크든 작든 단순한 과거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열어 줄, 오래된 미래의 ‘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