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묻힌 고독한 자유인
광주에 묻힌 고독한 자유인
  • 이은진 기자
  • 승인 2010.12.08 15: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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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8일.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유언대로 국립 5·18 민주묘지 7묘역에 안장된다.

“나의 삶을 이끌어 준 근본이념은 ‘자유’와 ‘책임’이었다.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이런 신조로서의 삶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듯이 바로 그것이 형벌이었다. 이성이나 지성은커녕 상식조차 범죄로 규정됐던 대한민국에서랴.”<대화>, 2005년

▲8일 오전, 故 리영희 선생의 유해가 화장을 위해 경기 수원 연화장에 도착하고 있는 모습.
[서울문화투데이=이은진 기자] 마지막 배웅, 리 선생을 가슴을 묻다.

한 시대의 별이 졌다. 땅에서 형벌 받던 이념, 하늘에서는 진정 자유로울 수 있기를…. 그 커다란 날개를 펴고 훨훨 날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실천하는 지성 리영희, 5일 0시 40분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에서 간경화로 힘겨운 투병생활을 해오다 숨을 거뒀다. 2000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병세가 호전되자 2005년 대담집 ‘대화’를 출간했으나, 최근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유족은 부인 윤영자씨와 아들 건일·건석씨, 딸 미정씨가 있다.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지며 장례위원장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임재경 전 한겨레 부사장, 고은 시인으로 결정됐다.

2010. 12. 8일 오전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故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의 영결식에서 유족들이 추도사를 듣고 있다. 광주 YMCA에 합동분향소를 마련한 광주전남장례위는 이날 추도성명을 통해 "금남로의 은행나무가 마지막 잎새를 막 떨구려는 순간, 리 선생은 우리들 곁을 홀연히 떠났다"며 "한 겨울의 혹독한 추위처럼 닥쳐오는 야만의 시대가 오늘의 언론에 다시 거울로 비추고 있다"고 밝혔다. 광주전남장례위는 8일 오후 4시부터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 7묘역에서 리 선생의 하관식을 거행한다.

6일 국립 5·18 민주묘지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고(故) 리영희 전 교수에 대한 민주묘지 안장이 국가보훈처로 이날 오전 확정됐다. 리 전 교수는 7묘역 4번 자리에 오월영령들과 함께 영면할 예정이며, 바로 앞 묘역에는 '민주화의 큰 별' 취영(翠英) 홍남순 변호사가 자리 잡고 있다.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사회의 큰 어른인 만큼 안장식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며 "고인을 모시는 일에 차질이 없도록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언론인 리영희는 진정한 특종 기자다. 세계 정치의 맥을 잡아 혈을 찔렀다. 그런 특종 기사가 부지기수다. 국내 질서는 휘어잡았으나 국제 질서에서 비루했던 이 땅의 권력자들을 끝없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언론인 리영희는 참된 지식을 궁구했고 또한 기꺼이 나누었다. 독서의 넓음과 깊음은 현대사를 통틀어 따를 자가 별로 없고, 그에 바탕을 둔 글쓰기는 비겁한 삶을 각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글은 방황하는 지식인에게 양심을, 주린 민중에게 밥을 주었다. 밥이 되는 양심을 나눠주었다.”」- 김훤주(경남 도민일보 기자)가 정의한 리영희다.

 

「80년대생이며 2000년대 학번인 나는 사실 리영희 선생님을 알 기회가 많지도 않았다. 그래서 소위 전론세대(70년대 리영희 선생의 저작 '전환 시대의 논리'를 통해 분단 냉전 이데올로기의 허구를 깨닫고 사회적 실천에 나선 세대)와 같이 선생을 통해 인식의 전환을 통한 감동을 맛볼 기회는 없었다. …늦은 입대를 앞두고 리영희 선생의 저작 '반세기의 신화'를 읽게 되었다. 군대를 늦게 가는 만큼 대학을 마치고 무엇을 하고 살아가야 할까 하고 고민하다가 남북관계를 더 공부해 볼까 하는 마음으로 펼쳐 본 책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리영희 선생님에 관심으로 선생님의 저작과 소식을 오늘에까지 접하게 되었다.」- ‘이’모 대학생이 블로그에 남긴 글이다.

 

이 시대의 양심으로, 실천하는 지성으로 존경받는 리영희. 파릇파릇한 대학 새내기에게는 생소한 리영희는 대체 누구인가? 세대를 거치면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남긴 그의 생애를 따라가 보았다.

▲故 리영희 선생의 생전 모습
리영희, 그는 누구인가?

1929년, 리영희는 금광으로 유명했던 평안북도 운산군의 북진면이란 외진 곳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주로 자란 곳은 5살 때 영림서 직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옮겨간 삭주군 외남면 대관동이다. “오늘까지도 해가 갈수록 더 그리워지는 추억”<역정,1988>이 서린 고향이다. 광복 한해 전인 1944년 초등학교(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경성공립학교 전기과에 들어갔다.

1946년 국립해양대학 항해과(2기)를 택한 것도 그런 가난과 무관하지 않다. 재학시절 ‘여순반란사건’을 협장에서 목격했고 백범 김구에 경도됐던 리영희는 졸업 뒤 친구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던 경북안동 공립중학교 영어교사가 됐으며, 전쟁이 터진 뒤 미군 상대의 연락장교 모집에 응했다. 이후 7년 그는 군의 부패와 폭력, 병무행정의 난맥상, 미국의 이면을 무참하게 경험하면서 “국가관과 전쟁관 그리고 이 사회에서 살 앞으로의 나의 마음가짐 같은 것에, 말하자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났다고 했다. 육군 통역장교로 복무하던 7년 내내 ‘미국이 불하한 외국 군대의 군복을 마다하고 작업복을 고집’ 했다. 타협 없는 원칙적 성격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리영희가 언론사 기자가 된 것은 말년 통역장교 시절 부산 양정동의 8평짜리 셋집 변소에서 우연히 찾아낸 신문 밑바닥 기자모집 광고였다. 1957년 리영희는 남다른 영어실력을 밑천 삼아 당시 한국 최대 통신사였던 <합동통신>에 입사했고, 통신사 일을 하면서 1959~61년까지 <워싱턴 포스트>의 통신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결코 대세나 주류에 영합하지 않았다. “주류가 아무런 근본적 인식 없이 그냥 거죽만 보고 한 방향으로 쏠릴 때 나는 항상 비주류일 수밖에 없었다.”

그 활약 덕에 1959년 그는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신문학 연수를 받을 수 있었고, 귀로에 들른 일본 도쿄 서점에서 사들고 온 책들 중의 하나가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노래>였다.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한 조선인 혁명가 심간(장지락)의 생애를 담은 그 책은 리영희가 본격적인 중국 연구자가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호의’의장의 첫 미국방문 수행기자로 갔다가 도중에 본국으로 조기 소환 당했다. 특종보도 때문이었다. 다른 언론사들이 박정희-케네디 회담에서 미국이 군사원조도 하고 경제원조도 하고 쿠데타에 대한 정치적 승인도 해주기로 했다는 ‘박정희 외교의 대성과’를 선전했을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때, 리영희는 케네디 쪽이 조속한 민정이양과 군의 원대복귀, 조속한 한-일 국교정상화, 베트남 사태 협력 등을 촉구했다는 내용을 타전했다.

1964년엔 제2차 아시아·아프리카회의(비동맹그룹)가 남북한을 동시 초청해 유엔 동시가입 가능성을 토의할 것이라는 특종을 썼다가 ‘국가기밀을 누설한 이적행위’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1968년 <조선일보> 편집국장인 선우휘는 ‘사상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이유로 리영희를 해직했다.

‘중공’이라는 말만 들으면 즉각적으로 ‘기아’ ‘괴뢰’ ‘피골상접’ ‘야만’ ‘무과학’ ‘반란’ ‘정권타도’ ‘침략’ ‘호전’ 등을 떠올리도록 훈련된 조건반사의 토끼들. 1970년대에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린 첫 저작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에 재수록된 ‘조건반사의 토끼(1971년 발표)에서 그는 토끼장을 벗어나야 한다고 절박하게 호소했다. 그 무렵 ‘64인 지식인 선언’에 가담했다가 언론사에서 두 번째 강제해직을 당한 터였다. 1977년 나온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와 함께, 토끼장에 갇히기를 거부한 그는 공법의 이름으로 2년 간 감옥에 가게 된다.  

진실, 그 유일한 목적을 위해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괴로움 없이는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우상과 이성>

1980년 ‘광주소요 배후 조종자’로 구속, 그해 다시 교수직에서 해직(1976년에 1차 해직), 1984년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주관 반통일적 교과서 시정연구회 지도사건으로 구속, 1989년 <한겨레> 창간기념 북한취재단 방북기획 건으로 구속 등 모두 아홉 번의 연행과 다섯 번의 기소 또는 기소 유예, 1천 일을 넘긴 세 번의 징역살이…. 그 후유증으로 그는 쓸개를 떼어내야 했고, 만성 기관지염으로 고생했으며, 성한 이빨이 없었다. 2000년에는 뇌출혈로 쓰러져 오른쪽 반신마비가 돼 고생하다 최근 간 기능 악화로 입원치료를 받아왔다.

그는 ‘의식화의 교사’였지만, ‘타고난 투사’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시끄러운 것을 못 견뎌 하고 행동의 절제를 미덕으로 안 그는 자신이 소심한 사람이라며 이런 말도 했다. “나는 문익환 목사처럼 낭만주의자가 못 되고 용기도 없는 사람이야. 나만 냉철한 현실감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니까.”<대화, 2005>

2006년 인터뷰 때 리영희는 “미국이 장차 동북아에서 강대해지는 중국과, 과거 소련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전쟁을 하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으로선 그 때문에 일본의 과거에 대한 향수는 지극히 강하다. 지금의 이런 동북아 상황은 1930년대 초와 아주 흡사하다.”는 정세인식과 함께 국내 기득권세력의 지배욕을 비판했다. 그의 정신은 한 순간도 쉬지 않았다.

“난 휴머니스트입니다. 인도주의자 그리고 평화주의자이고, 덧붙인다면 우상파괴자!” 그렇다. 타협을 몰랐던 선비 리영희, 그는 한국 현대사 최강의 우상 파괴자들 중 한 명이었으며, 그의 유일한 무기는 ‘진실’이었다. <리영희 저작집 12권, 21세기 아침의 사색>

 

▲ '기자의 혼' 상 시상식 날
리 명예교수는 경력으로 치면 대학에서 20여년, 언론사에서 14년을 지냈다. 하지만 평소 자신의 정체성을 일컬어 ‘언론인 70, 교수 30’이라고 자평했다.

리 명예교수는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이자 실천가였지만, 자신의 바람대로 언론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언론자유상과 늦봄통일공로상, 만해 실천상, 한국기자협회 제1회 ‘기자의 혼’상, 한겨레통일문화재단상 등은 그를 삶의 귀감으로 삼고자 하는 언론계 후배들이 바친 헌사이기도 했다.

 가족과 지인에게서 찾아본 그의 인간적 면모

세상은 고 리영희 선생을 '사상의 은사'로 부르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다. 리 선생은 투사 같은 이미지와 달리, 농담을 잘하는 등 유쾌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는 게 지인들의 공통된 기억이다.

부인 윤영자씨는 리 선생을 설거지 해 주던 자상한 남편으로 기억한다. “가정에서 권위적이거나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가사 일을 도와주는 파출부 아주머니와 항상 같이 밥을 먹었다. 모두를 동등하게 대한다. 설거지도 운동 겸해서 자주해줬다. 그게 기억난다.”

▲윤이상 추모 음악회에 참석한 부부
유홍준 명지대 교수(전 문화재청장)는 결혼식 주례를 흔쾌히 응해준 리 선생을 기억한다. " 리영희 선생의 주례 '데뷔'가 내 결혼식이었는데, 비교적 잘하지 못했다.(웃음) 주례사에서 약속을 잘 지키라고 하셨다. 당시 '성혼선언문'이라는 게 있었다. 거기에 '국가에 봉사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리 선생은 '국가'라는 단어를 지우고 '사회'라고 고쳐 넣었다. 파쇼적이기 때문에 '국가'를 빼라고 했다."

"겉으로는 엄격하고 카리스마가 넘쳐 접근하기 어려웠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부드러운지 모른다. 정이 많았고, 농담을 잘했다. 당시 리영희 선생이 신문에 올바른 소리를 할 때마다 동료 교수들은 '무슨 일 당하는 것 아닌가'하고 전전긍긍했던 일이 생각난다. 항상 사실보도에 입각한 진실 보도에 힘을 쏟았다. 미국 관련 기사를 쓸 때는 미국 의회 자료를 다 훑어보고 썼다. 압력에 굴하지 않는 저항적 저널리스트이자 사회비평가였다. 중국의 노신과 미국의 촘스키와 비교할 수 있다. 아, 근데 촘스키는 감옥에 안 가지 않았나." 이강수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는 외강 내유형 저항적 저널리스트로 그를 정의한다.

“1990년대 초에 경기 군포시 산본의 리 선생 자택에 놀러간 적 있다. 자택 뒤편 수리산에 등산을 갔는데, 보온병에 위스키를 담아오셨다. 리 선생은 이미 그때 간이 안 좋아서 술을 못 마셨는데, '자네들이 마시라, 난 냄새만 맡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보온병 뚜껑에 담긴 위스키 냄새를 맡으면서 보였던 천진난만한 웃음을 결코 잊지 못한다."- 정범구 민주당 의원

“1960년대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베트남전 파병에 대한 글을 썼다. 패권주의, 파시즘에 의한 전쟁을 강하게 비판했다. 지금 계셨으면, 제2의 6·25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현실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하셨을 것이다."- 임재경 <한겨레> 초대 부사장

▲리영희 평전, 김삼웅

냉철한 이성으로 암흑의 시대, 칼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낸 리영희였다. 그렇지만 그를 만난 사람들은 이성보다는 따뜻한 감성으로 그를 추억한다. 인간으로서, 사상가로서 나무랄 데 없는 리영희인지라 평전에서도 비(非)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있다면 아들, 남편, 아버지로서 가족에게 소홀했다는 것이다. 그 엄혹했던 야만의 시대에 지식인으로서 ‘일인분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던 리영희로서는 가족을 제대로 돌볼 겨를이 없었겠지만 1989년 화갑을 맞아 그 ‘잘못’을 가족들에게 사과하고 비로소 “가족의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리영희평전, 김삼웅) 아쉽게나마 그곳에서 이승에서 못다한 큰 사랑을 세상에 뿌려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