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호선 원장 “문화예술 위해 살겠다”
천호선 원장 “문화예술 위해 살겠다”
  • 주영빈 기자
  • 승인 2010.12.17 13: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쌈지길, 백남준과의 교류 등 문화예술에 공헌해온 천호선 컬쳐리더인스티튜트 원장

[서울문화투데이=주영빈 기자] “문화예술 안에서 동지를 만들고 이를 퍼트리고 싶다”

 지난 11월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중 메세나 대상을 수상한 천호선 컬쳐리더인스티튜트 원장. 그동안 우리나라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지원하고 헌신해온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를  만나기 위해 최근 종로구에 위치한 그의 집을 찾았다. 집안에 들어서자 다양한 공예품과 벽에 걸린 미술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서재 겸 거실에는 그가 거쳐온 문화 기록물들을 볼 수 있었고 인왕산과 북악산이 보이는 확 트인 공간 덕분에 예술적 운치가 강하게 느껴졌다. 기자를 기쁘게 맞이한 천 원장은  집안 곳곳에 그득한 그가 애장하는 미술품과 도자기, 공예품들을 기자에게 일일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자상함을 보였다. 그가 얼마나 문화예술품들을 사랑하는지가 가슴 찌릿찌릿하게 전해져 왔다. 현재 경기도미술관장인 부인 김홍희씨도 한 몫을 단단히 했을 법한 소장작품들 사이사이로 행복바이러스가 집안 가득 퍼져있었다. 

  쌈지길 대표로서 유명해진 천호선(67) 원장은 최근 아츠앰배서더아카데미를 성공시키는 등  문화교육에 힘쓰고 있다. 인생을 사는데 있어 역경도 있었지만 문화예술과 함께 온 그의 인생은 뜻깊다. 초대 뉴욕문정관을 계기로 일생을 문화예술에 헌신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공무원이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더욱 문화예술에 매진해 왔다. 최근에 어려웠던 시련을 마라톤으로 이겨냈다는 천호선 원장, 그는 현재에 머물지 않고 앞으로도 문화예술 발전을 위하여 동지를 만들고 이를 세상에 퍼트리겠다고 다짐한다. 

-문화외교관 양성 프로그램인 아츠앰배서더아카데미 1기, 2기 모집에  성공을 거두셨다

"문화예술에 관한 전문적인 강좌가 예술의전당, 세종문화예술회관, 종합예술학교 등에서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수강생들 사이의 연대감을 북돋우는 프로그램도 있겠지만 대부분 강의를 듣는 것으로 그칩니다. 하지만 아츠앰배서더아카데미는 강의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문적인 분야의 인사들이 서로 자신의 전문성을 나눠가지며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또한 공연을 즐긴 후에 공연에 대해 토론도 하고 공연자들과 술자리를 통해 대화를 갖는 것은 다른 프로그램과 다른 분위기일 겁니다"

문화예술계 첫 상 의미깊어

-저희 서울문화투데이 메세나대상도 수상했는데 어떠셨습니까?

“수상 이후 저 친구 대단한 사람 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문화예술과 관련해서 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제게는 더 의미가 크고 감사한 수상이 되겠습니다. 공무원이 되어 처음 청와대에서 11년간 근무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고 표창장뿐 아니라 30대 초에 훈장을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다. 다음 문화공보부로 옮겨 12년간 근무하면서 뉴욕문화원 등 해외에서 10년을 일했고 본부에서는 문화예술국장을 지냈습니다. 저로서는 문화예술 분야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해왔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표창이라든가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국회사무처에서 12년간 일했는데 제가 한 큰 업적중의 하나는 국회방송국을 만든 것 입니다. 법적인 토대와 예산이 확보된 후에도 국회방송 설립에 대한 정치권의 반대가 워낙 강해 상당한 고전이 있었지만, 제가 캐나다 근무중에 느꼈던 국회방송이 민주주의의 초석을 만드는 작업이라는 신념으로 어려움을 뚫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국회방송 설립 공로로 국회의장 표창장을 받고, 정년퇴직하면서 두 번째 훈장을 받았습니다”

  천호선 원장은 문화예술 분야에서 서울문화투데이 메세나대상 수상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그 이후  천 원장은 최근 이태리대사관으로 부터 받은 훈장 수여 통보 서한을 보여주었는데, 문화교육자, 문화공헌자로서 외국에서 일정 부분 인정받았다는 것으로 그간 문화계에 가졌던 섭섭함이 조금은 누그러진 듯 했다.

-뉴욕문화원에 발령받아 가신 일이 천 원장님의 공직인생에서 큰 전화점이됐다고 하는 글을 어디서 읽었습니다.

“뉴욕문화원으로 가면서 내 일생을 문화예술만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나름대로 이상이 있겠지만,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보다는 위에서 시키는 일을 충실하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문화예술은 정치적 차원에서 다루는 분야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문화예술도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지만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뉴욕에서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무척 신이 났습니다”

 천호선 원장은 뉴욕에서 백남준을 알게 되었다. 뉴욕에 있는 많은 한국 작가들이  백남준과 교류가 없었고, 당시  머스 커닝햄 댄스컴퍼니의 후원회장을 통해서  백남준을 소개받게 된 일화를 들려 주었다. 천호선 원장은 백남준과의 만남을 전후해서 그동안 문화원 활동의 중심이었던 한국 전통문화의 소개보다 새로운 문화예술을 만드는 노력을 알리는 데 중점을 두었던 일들을 회상했다.

-뉴욕 문화원에 간 것이 어떻게 문화에 헌신하는 큰 계기라 볼 수 있을까요?

“뉴욕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문화예술을 창조하는 곳입니다. 새로운 문화가 뉴욕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죠. 한국인도 세계 문화예술 창조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백남준이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문화예술 창조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우리나라 현존 작가들의 예술작품을 소개하는 일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KOREAN DRAWING NOW"라는  한국현대미술전을 뉴욕 브룩클린뮤지움에서 개최했는데, 현지의 ‘Jene Baro’라는 커미셔너를 한국에 보내 서세옥, 이우환, 박서보, 김창열, 이종상 등 대가와 황인기, 이상남 등 젊은 작가 총 47명을 선정했습니다. 이것이 미국에서 열린 한국 최초의 현대미술전으로서 이 전시는 스미소니언 주도로 미국에서 2년 동안 순회 전시할 수 있었습니다”

 -원장님의 업적 중에 쌈지길을 만드신 것을 들 수 있는데, 하나의 문화 창조공간을 만든 것이고 또 현재 쌈지길은 인사동의 랜드마크가 됐습니다. 쌈지길의 착안과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쌈지스페이스는 작가들에게 작업 공간과 숙소를 제공하는 창작 스튜디오/레지던시 공간이자 한국 최초의 대안공간으로 기능했습니다. IMF 위기에서 아이디어가 나왔죠. IMF 때 쌈지의 홍보비 일부로 <쌈지 아트프로젝트>를 만들고 젊은 작가들이 경제위기 속에서도 계속 작업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는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공황속에서 제일 먼저 아티스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시행한 것에서 착안하게 된 것이죠. 미국이 경제공황 때 아티스트들에게 계속 작업할 수 있도록 지원한 것은 미국이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쌈지길 쌈지스페이스 문화예술계 헌신의 이정표 세워

 -쌈지길이 다른 기업에 넘어갔습니다. 예술성과 작품성 높은 공예품들을 쌈지길에서 보여주셨는데 어떻습니까?

“쌈지길 자체로서 운영이 어려웠던 것은 아니지만, 쌈지 본사가 넘어가면서 같은 운명이 되었습니다. 뉴욕문화원에서 <한국미술5000년전>의 미국 순회전시를 지원하면서 한국 문화의 정체성, 독자성이 공예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쌈지길은 우리 시대의 공예품이 만들어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입니다. 또한 쌈지길에 몰려오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감을 충족시키고 그들의 안목을 높여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쌈지길 전체에 <앤디 워홀전>, <백남준과 그의 FLUXUS친구들> 전시를 한 것은 관객들의 안목을 높여주고자 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사동에 공연문화를 만들어 세계 중요 관광지와 같이 나이트 라이프, 즉 밤 문화가 있도록 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특이한 공연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전통 모듬북과 소리, 쟈즈, 한국춤이 어우러지는 공연후에 관객들에게 한국춤을 가르쳐주는 프로그램도 진행했습니다. 처음에는 인사동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경찰에 신고해서 경찰이 왔다가 이렇게 좋은 공연에 무슨 신고냐고 말하면서 그냥  돌아간 일도 있었습니다”

 천 원장은 쌈지길의 착안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패션업체 쌈지를 만들어온 동생 천호균사장과 문화예술의 발전이 쌈지를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전통문화, 전통공예를 고수하고 있는 인사동에서  전통의 에센스를 뽑아 현대화하는 작업이 세계속에서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데 중요하다는 생각을 같이 하면서 쌈지길을 발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천 원장은 쌈지길에 대해서는 여전히 안타까움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의 긍정적이고 미래에 대한 희망 때문일까, 과거보다는 앞으로의 일이 더 중요한 듯하다.  

-하지만 쌈지길에 대해서 현재 착찹할 것 같습니다. 현재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혹 이와 관련해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요?

“지금 당장은 없지만 공예를 위해서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해서 한국벤처공예대학의 학장을 맡아 했었습니다”
“공예라는 것은 대표적인 생활문화, 생활예술, 대중예술입니다. 일본에서는  자기 자식이 차를 마실 나이가 되면 그 아이의 찻잔을 지정해 주고 그 아이가 성년이 되면 스스로 자신의 찻잔을 선택토록 하는 전통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트가 생활이 되는 대표적인 것이 공예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중문화, 생활문화로서 공예품의 가치가 재조명되는 이론화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천이사장이 아끼며 소장하고 있는 예술성이 뛰어난  황갑순씨의 도자기 세트.

 -외국에 우리 문화를 알리는데 있어 문화 상품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문화 분야의 전문가로써 문화 상품과 또 작가의 공예 작품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문화상품은 기계적 대량생산이 주를 이루게 되고 공예작품은 핸드메이드가 중심이 되겠습니다. 그 예로 서울대 황갑순교수의 도자기는 손으로 갈고 닦는 데에서 독특한 손맛이 있습니다.  황갑순교수의 작품이 너무 좋아 쌈지길에 별도의 매장을 만들었는데 가격이 너무 비싸 판매는 신통치 못했습니다”

천 원장은 황갑순의 도자기를 직접 보여주며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는 장인의 손길을 느껴보라고 한다.

▲ 방짜유기로 만든 잔에 따른 맥주

 또 인터뷰 도중 천 원장은 방짜유기로 만든 잔에 맥주를 따랐다. 용기의 재질에  따라 음식의 맛이 달라지고 공예품이 얼마나 신비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말한다. 공예품을 직접 느껴보라고 주문한다. 그가 따라 준 놋그릇잔의 맥주는 무척 시원했고, 시간이 지나도 맛이 변하지 않았다.

▲천 원장이 보여준 왕골로 만든 공예품. 색감이 뛰어나고 정교함이 돋보인다

-이건 조금 다른 얘기긴 한데요. 최근 저희가 취재하는 건이 있어 공예쪽 전문가이시니까 여쭤봅니다. 외국 국빈들이 와서 우리가 선물을 할 때 문화상품을 줘야 할까요 아니면 작가의 작품을 줘야 할까요?

“가격문제가 있겠지만 공예품을 선물할 경우 품격을 위해서 작가의 작품을 선물하면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본의 경우 일반 대중들도 공예품에 대한 사랑이 대단한 것 같은데 우리나라는 일반 대중들의 미의식이 일본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관여하고 계신 (주)문화은행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문화은행이라는 이름은 1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고 설립된 지는 15년 정도 됐습니다. 원래는 외국에서 들어오는 명품회사들의 국내 런칭을 돕는  일을 맡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재는 주식회사로 만들어서  문화예술과 관련된 정부일도 하면서  컬처리더인스티튜트(Culture Leader Institute)를 설립, 문화예술 교육에도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저는 문화은행에서 교육 관련 프로그램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근자에 <Arts-Based Training> 프로그램을 새롭게 개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세계와의 경쟁에서 이겨내기 위해서는 창의력 향상을 위해 문화예술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가지고 기업교육을 전담하기 위해 만든 것이죠. 포춘지가 선정한 미국 500대 기업중  400개 이상이 이러한 문화예술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덴마크 사람들은  디자인을 가지고 세계를 이끌고 나갈 수 있다는 국민적 의식과 교육제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수동적이고 주로 외우는 교육을 받아왔는데 지금이라도 각 분야에서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훈련이 있어야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가고 세계를 이끌고 나갈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창의교육이 필요한 거죠"

일상생활에 아트가 스며 들어야

-오늘날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의 흐름의 방향계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요.

“각 분야 문화예술의 통섭이 중요한 흐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비디오 아트가 나오면서 뮤직 비디오라든가 TV 프로그램의 미적 수준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일부 프로그램의 수준이 낮은 경우도 있지만, 이는 일반 대중들의 수준이 높아지면 자연이 달라지겠죠. 특히 전에는 무대장치가 부수적인 요소에 그쳤지만 요즘은 그 자체가 하나의 아트로서 기능하는 것 같아요. 그 일례로 최근 뮤지컬 <빨래>를 보았는데 내용도 감동적이었고 무대장치도 우수한 작품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에 아트가 스며들어 가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합니다”

 -좀 미안한 질문이지만, 미술품 경매 회사를 만들었다가 쌈지길과 마찬가지로 그야말로 '말아먹었'습니다.

“경매회사는 우리의 미술이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향 설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경우 <옥션별> 회사 설립 시기를 잘못 선택한거죠. 2007년에 미술시장이 호황이었는데 회사 설립 후 2008년부터 경기불황이 오면서 미술시장이 얼어붙었죠. 지금은 이름도 <별컬렉션>으로  바꾸고 전시와 컬렉션 중심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천 원장은 옥션별과 쌈지길에 대해 실패라고 단정 짓지 않는다. 물론 위축되었고 힘들었지만 문화예술 종사자로서 하나의 경험이고 인생을 사는데 과정일 뿐이라고 결론짓는다. 

-쌈지, 경매.. 인생의 시련을 겪으셨는데 극복하신 힘은 무엇일까요?

“옥션이 안되고 쌈지길이 넘어가면서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됐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한 것이 마라톤이었습니다”

마라톤에 대한 얘기를 꺼내면서 그는 한층 더 밝아졌다. 마라톤은 육체의 건강 뿐만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아주 좋다고 마라톤 예찬에 침이 마른다. 그는 마라톤이 대학 시절 암벽등반을 하던 때 처럼 한단계 한단계 밟아가는 또 다른 인생의 '희망계단'으로 여긴다. 그의 문화 예술에 대한 헌신도 마라톤과 같지 않을까.

마라톤 통해 새로운 힘 얻어

-인생에서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것은 무엇인가요?

"전 공무원을 오래 한 때문인지 공공적인 마인드가 강합니다.  쌈지길에 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아이디어를 얻어갈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생각을 의무로서 여기고 일했습니다. 앞으로도 문화예술 속에서 항상 즐겁고 나 자신의 수준을 계속 끌어 올리면서 이를 공유하는 동지를 만들고 주변에 그 영향을 전파하는 작업을 계속 해 나갈 것입니다"

그는 인생에 대해서는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지닌 듯했다. 67세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그의 인생은 앞으로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올해는 천 이사장에게 좋은 일이 많았던 해로 기억될 듯 합니다. 총평을 부탁드립니다.

“올해는 터를 다지는 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국벤처공예대학도 그렇고 아카데미도 그렇습니다. 교육과 관련해 터전이 만들어지는 것 같고 내년에는 펼칠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이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아트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시간과 노력을 더 많이 투자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고, 이렇게 되어야 우리나라의 문화수준이 높아질 것입니다”

천호선 원장은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문화계 인사로서 할 일이 많고 주어진 일도 많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제는 문화교육자로서 인재 양성과 국가에 헌신하는 사람으로서, 42.195km의  출발선에 선 마라토너처럼 더 멀리 오래도록 뛰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